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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3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9월
평점 :
부모의 그늘이 없는 삶은 존재하기 어렵다. 우리는 한 부모의 아들/딸로 태어나, 많은 경우 누군가의 부모로 살게 된다. 그 과정은 의무와 책임의 연속이다. 자녀로서도 그렇고, 부모로서도 그렇다. 사생아였던 사르트르가 “아버지가 없던 탓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고백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나의 투쟁> 3권은 부모라는 자리에 대해 생각한다. 지난 2권에서 가히 ‘야만적’ 사랑에 빠졌던 작가 크나우스고르와 (2권 리뷰 참고) 린다 사이에 사랑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아이가 잉태된다. 다가올 미래는 황홀하다. 아버지가 되는 건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낳는 일인 동시에, 본인도 ‘아버지’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탄생은 당연히 기다려질 수밖에 없다.
린다는 두 손을 부른 배위에 얹고 앉아 말했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린다의 눈은 ‘나는 행복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건넸다.
오, 보름만 있으면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아빠가 된다니!
하지만 막연한 두려움 역시 동반된다. 부부는 작은 몸의 변화에도 안절부절 못하고, 아이가 잘못됐을 거라는 근거 없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부모 되기의 고통을 예고하는 시간으로 읽힌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는 아이 때문에 온몸에 진이 빠지는 일이 반복된다.
“하루 종일 아무 움직임도 느낄 수가 없었어요.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고요.” (…)
“괜찮아. 괜찮은 거야. 확신해.”
“괜찮을 거라고요? 젠장! 정말 당신은 아무 생각도 없나요?”
마침내 다가온 탄생의 순간, 거대한 고통이 찾아온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없는 개별적인 것이다. 어떤 통과의례처럼 철저히 개별적인 고통이 지나가야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누군가의 하나뿐인 부모가 될 수 있다. <나의 투쟁>은 이 과정을 의례의 기록관처럼 30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보여준다.
그녀는 폐가 터질 정도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아이의 머리에 대고 있던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
“자, 한 번만 더! 잘하고 있어요! 한 번만 더 힘을 줘요!”
내 눈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미끈미끈한 바다표범처럼 아이가 쑥 빠져나와 내 손에 떨어졌다.
‘아버지’로 다시 태어난 작가는 이제 부모의 자리에 선다. 아이를 보는 건 때로 행복을 주지만 그보다 많은 책임을 주기도 한다. 먹을 것을 주고,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재우고, 우는 걸 달래는 일까지 온갖 사소한 임무들. 여기에 눌린 작가는 본업인 글쓰기에 대한 생각까지 바뀌었다는 점을 확인한다.
아이들은 삶이다. 그 삶에서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몇이나 있을까?
여기에 비하면 글을 쓰는 것은 죽음이 아닌가. 문자들. 그것은 교회 묘지에 서 있는 비석에 불과하다.
동시에 작가는 먼저 부모의 자리에 섰던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자들을 서서히 이해하게 된다. 생전 처음 장인을 만나 지나온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어머니를 뵈러 가기도 한다.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에 비해 한없이 너그럽고 따뜻해져 있다. 부모가 되어야 비로소 그 마음을 안다는 말이 여기에 눈물겹게 들어 맞는다.
작품 말미에 이르면 작가의 시선이 마침내 아버지를 향한다. 그토록 사랑했고, 또 혐오해 마지 않던 사람. (앞선 1권은 아버지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나의 투쟁> 3권은 그가 아버지를 이해하는 방식이 바뀔 것임을, 그리하여 애증의 균형추가 어떤 식으로든 무너질 것임을 암시하며 끝이 난다.
“칼 오베, 나는 네 아버지를 사랑했어”
어머니에게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 비슷한 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제 와서? (…)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