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의 문으로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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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펼치자마자 첫 문장부터 꿈꾸는 듯한 몽롱한 느낌의 활자들이 쏟아져나온다. 작가의 전작에서 보지 못했던, 언뜻 보기에 현학적이라 할 수 있겠는 새로운 스타일의 문장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런 혼란하게 퍼져나가는 안개와도 같은 문장의 흐름 안에서도 구병모 특유의 지금 우리 현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적확하게 지적하는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굳건히 가져간단 것에 새삼 다시 한 번 감탄한다. 현실에 꿈이 침투하여 혼란을 빚는다는 ‘꿈 증상’은 가상의 설정이지만 그에 대처하는 소설 속 인류사회의 모습은 당장 전염병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우리의 현실도 겹쳐보이고, 작품 속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인물들은 현대사회의 소모품으로 갉아먹히며 피로에 잠식당한 우리의 모습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꿈에서 꿈이라고 자각하지 못하고 현실감을 넘나들듯이, 아니 실은 꿈이란 자각이 없듯 현실이란 자각도 없는 채로, 꿈인데도 현실인양 별 의식을 못한 채 무작정 내달리듯이. 『상아의 문으로』 에서도 그런 꿈과 현실의 불확실한 경계를 뚜렷이 자각하지 못하는 어질어질한 의식의 전개를 거침없이 질주한다. 허구를 그리는 소설인데도 써내려가는 문장들이 중간중간 지금 현실의 고통스러운 이면을 예리하게 꼬집다가 다시 몽롱한 소설 속 꿈으로 돌아간다. 읽는 이의 현실과 픽션의 경계가 차츰 흐려지면서 두 세계를 쉴새없이 넘나들게 된다는 부분에서 꿈을 무척 닮은 소설이다.


  이번 신작을 한 줄로 표현한다면 꿈으로 점철된, 꿈 그 자체를 글로 담아낸 듯한 소설이라 하고 싶다.

  마치 한 편의 거대한 시와도 같다고 느껴지는 문장 때문에도 그렇다. 이전의 건조한 어투로 당장의 장면을 명료하게 묘사하던 문장과는 사뭇 다르다. 시와 같은 음율이 곳곳에서 흐르도록 단어 하나 하나에 무척이나 신중을 기한 것이 진득하게 전해져온다. 그래서 활자를 눈으로 따라가며 읽고 있으면 문장들이 혼란하게 나에게 물밀듯이 들어오다가 돌아서면 이내 잊혀지고 만다. 기억에 붙잡아 두려면 두 번 세 번 다시 보아야 잡힐 듯 말 듯한 생경한 문장들이 모여 꿈 그 자체를 구현해낸다. ‘꿈’이라는 테마를 이렇게나 잘 구현하는 문장들을 빚어낼 수 있는 실력, 그 기반에 그것을 이루어내게끔 하는 작가의 통찰력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그간의 구병모 작품은 담담하게 말하며 그것을 보는 내 감정에 격정적인 파문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격동적으로 휘몰아치는 문장의 소용돌이에 내가 휘말리지 않고 무던하게 중심을 지키고 있어야 앞으로 읽어나아갈 수 있다. 전에 겪어본 적 없는 낯설고 새로운 독서 경험에 짜릿하게 전율이 이는 순간이었다.


  꿈은 잡아두지 않으면 놓친다. 이내 산산이 흩어져 잊어버린다. 잃어버린다. 그러나, 『상아의 문으로』는 내 눈 앞에 실재하는 물질이고, 두 손에 잡히고, 그렇기에 종이에 달라붙어있는 글자들을 언제고 몇 번이고 다시 쫓아갈 수 있다. 그런 아이러니를 실물의 책 한 권에 담아, 꿈의 실체가 손 끝에 닿는다 여겨지는 오묘함이 매력적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이 작품에 사랑을 느낀다. 혼곤한 꿈을 내 손 안에 두고 두고두고 곱씹을 수 있다니. 심혈을 기울인 문장들을 엮어 한 편의 기나긴 꿈을 현실에 자아낸 작가님께 경애를 담아 찬사를 보내고 싶다. 책을 매개로 하여 작중의 꿈이 현실로 배어져 나오는 경험을 맛보고 싶은 이들에게 손에 쥐어주고 싶은, 그런 한 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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