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비의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김순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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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의 언어로 총천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덜어내고 비우고, 깎고 깎은 글로써 더 많은 색과 결, 깊이를 느끼게 한다. 당신이 미처 말하지 못한, 깊숙한 내면의 말들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만날 수 있기를. 그렇다면 당신 또한 누군가에게 이 책을 선물하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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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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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그런 적 있어? 

누군가를 이해해보려고 무진 애를 써본 적,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적, 그렇게 누군가를 이해해보고 싶었던 적.


그런 적 있어?


지난 열흘 동안 내가 만난 한 여자는 그런 사람이었어.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사람. 목숨이 너댓개는 되는 것 마냥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온몸을 던지는 사람이었어.

그녀의 이름은 스밀라야. 스밀라 카비아크 야르페르센. 

스밀라는 그린란드의 사냥꾼이었던 아네 카비아크와 덴마크의 외과의사 모리츠 야르페르센 사이에서 태어났어. 

그녀는 코펜하겐 항구 근처 하얀 아파트에 살고 있어. 세련된 도시의 삶에 적응한 듯 보여도 몸 속엔 그린란드의 빙하가 흐르고 있지. 그녀는 한시도 그것을 잊지 않아.



"사람이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스밀라?"

"사소한 부분은요. 하지만 커다란 일들은 저절로 일어나죠."


그녀는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나. 특히 '눈雪'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지.

내가 스밀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감각을 신뢰한다는 점이야. 그녀는 사물이든, 단어든, 사건이든 자신의 감각을 통해 느낀 후, 자기 언어로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녀는 어느 것하나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어. 그녀는 본능적으로 깊숙한 것은 깊숙한 곳까지 가야하는 것을 알아. 그 안의 심연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도 알지. 이를 테면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는 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야.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지붕에서 떨어진 한 아이, 이사야라는 소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 . 그 아이가 남긴 조그만 발자국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 앞에 무력해져. 달리 손 쓸 도리가 없다고 여기지. 어떻게 왜 죽었는지 궁금해해봤자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스밀라는 그렇지 않아. 스밀라는 무력해하지 않아. 결과 이전의 것을 이해하기 위해 마음을 먹어. 이를테면 목적같은 것. 미약하지만, 모든 것을 말미암게 한 첫번째 도미노 같은 것. 마지막으로 넘어진  도미노 뒤에 연루된 수많은 조각을 직접 감내하기로 마음 먹어. 

그녀는 여성이면서 동시에 남성이기도 해. 흔히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그녀'에 대한 이미지나 정의에 대해 스밀라는 박살을 내버릴 줄 알는 사람이거든.  손 안에 스크루 드라이버를 꼭 쥔 채, 상대의 갈빗대가 끝나는 자리를 더듬어 찾아내려는 여자, 누군가의 쇄골과 승모근 사이 움푹 팬 삼각형 중앙에 자신의 모든 몸무게를 실어 찌르는 사람이 그녀야. 스밀라. 자신을 뒤쫓아 온 누군가가 있다면, 상대를 향해 무거운 책장을 넘어뜨려 그로 인해 팔뚝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나도 눈 하나 깜짝하지를 않지. 오히려 다리가 천천히 꺾이는 소리도 놓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스밀라야.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온몸을 심하게 떨고 있어. 그녀가 마주하고 있는 것이 공포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지. 그녀는 공포를 피해 줄행랑을 치는 것이 아니라 덜덜 떨리는 손일지언정 공포의 목을 쥐기 위해 더듬거리는 사람이야. 그녀는 '의미의 감각'을 쥐기 위해 얼음 한복판을 걸어가는 여자야.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그녀는 평정심을 지니고 있는데 그 정도는 엄청나. '빙산의 일각'이라고 표현했을 때 해수면 아래 어마어마한 크기의 얼음이 있잖아? 그녀의 평정심이 그것과 같은 느낌이야. 그녀의 평정심은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강한 욕구로부터 생성된다고 생각해. 어떤 곳에도 속한 적 없는 그녀는, 대학은 중퇴했고, 가족과 살지 않아. 잠시 몸 담은 단체에서도 언제나 퇴출되기 일쑤지. 누군가는 그녀를 두고 '결코 어딘가에 적응할 수 없는 여자'라고 했지만 나는 그녀가 자기로서 살아온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무리 안에서 문제없이 적응하고 사는 것이 결코 '잘 사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듯이, 자신과 맞지 않은 곳이었기에 무리에 속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녀는 자기로서 살아가는 용기와 의지를 지닌 사람이야. 


"두려워요. 하지만 어쨌든 할 거예요"


그녀에게 행복은 중요한 목적이 아니야. 그녀에게는 '스밀라 자신이 되는 것'이 목적일 뿐이야. 행복이 그녀 곁에 머무른다해도 자기의 목적과 상관없다면, 그녀는 행복을 버리고, 철저히 자기의 목적을 향해 걸어갈 사람이야. 설령 그로 인해 그녀의 모든 것을 잃거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해도 말이야.


나는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우리에게 존재 목적과 의미가 있다면, 서로가 그 목적과 의미의 한 부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우리의 많은 순간 중 가장 사소한 순간들을 함께 음미해나가며, 그래서 우리가 서로의 조각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조각은, 진짜의 것들. 날 것들. 이를테면, 모순적인 진실일지라도 거짓이 아닌, 실제의 실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스밀라에게 '이해한다'는 말은 '살아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야. 폐쇄공포증을 느끼는 그녀가 무인승강기 안으로 자신의 몸을 접어 넣은 적이 있어. 폐쇄공포증의 중앙으로 들어선 셈이지. 그녀는 무언갈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살아있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택하는 것이 있어. 그건 바로 '어려운 것'이야. 그녀에게 어려운 것은 새로운 것들이자, 이전까지 알 수 없던 것들이야. 그러나 택하고 경험하는 순간,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것이 되버리지. 그녀의 삶은 그것들을 통해 '유일한 삶'을 획득해. '유일하다'는 것은 태어나는 동시에 누구에게나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야. 스밀라처럼 '획득'되는 거였어. 


사람들은 무언갈 보호하기 위해 애쓰지만 오히려 그 노력때문에 그 무언갈 잃기도 해. 무장을 한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라 해제를 했을 때 오히려 더 분명하게 얻을 수 있는 게 있는 법이지. 스밀라는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때로는 그 노력을 게을리함으로써 솔직한 자기가 되기도 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키스를 하고 싶고, 안기고 싶어하는, 그런 자신을 스스로 허락하기도 하지.


우리는 한 모금 더 마셨다. 달빛이 무척 밝아 색깔을 구분하는 게 가능했다. 녹색 갑판, 내 파란 보온 바지병의 금색과 빨간 상표 딱지달빛은 햇빛 같았다만져질 듯한 온기를 지니고 갑판 위를 비추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키스했다온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어느 시점에 이르자 나는 수리공의 몸에 걸터앉았다우리는 더 이상 두 몸이 아니고 밤의 어둠 속 열기의 조각일 뿐이었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스스로를 수줍음이라는 핑계를 대지 않았으면 좋겠어. 말이 필요 없는 상호 이해의 순간 같은 것, 나도 상대도 따뜻해지는 순간.

그 순간이 내게는 가장 큰 공포이자, 두려움이야. 


스밀라는 자신이 이누이트와 갖는 연관성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어. '한 점 의심의 그림자 없이 삶이 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고,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화해할 수 없는 모순들 사이에서, 절망에 빠지지 않고 간단한 해결책을 찾지도 않은 채,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나도 이누이트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스밀라를 만났던 열흘 남짓의 시간 동안, 나는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 앓아야 했어. 열병처럼 뜨겁더니, 나중엔 서늘해졌어. 내가 이해하고 싶은 그 사람이 되기 위해 얼마나 철저할 수 있는 지, 얼마나 처절해질 수 있는 지 물어봤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살아있다면 나는, 이렇게 나로서, 계속 노력하고 있을 거야. 

"사람이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스밀라?"
"사소한 부분은요. 하지만 커다란 일들은 저절로 일어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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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범우문고 56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 범우사 / 198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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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에 가는 친구에게 단 한권의 책을 선물하기 위해 이 책을 골랐다.
허투루 지나갈 수 없는 문장들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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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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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뻐근한 날이었다.

온마음이 찢겨져 나간 듯 쓰리고 아린 날이었다.

사실은 누군가에게 맞은 것도 아니고,

비난을 받은 것도 아닌데 이유도 모른 채 곪아가던 날이었다. 


책도 읽기 싫고, 글도 쓰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곁에 있는거라곤 책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던 날이었다.


곰팡이 냄새가 나던 친구의 방에서 곰팡이가 슬은 것 같은 책을 꺼내 읽었다. 

후- 한숨을 쉬며 책장을 넘겼다.

자두 나무 곁의 두 사람이라는 사진이 있었는데 두사람이 웃는 지 우는 지 

무슨 표정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다음장을 넘겼다. 

다음 몇 장을 더 넘겼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와 사진을 다시 보고

다시 다음 몇 장을 다시 읽었다가

또 다시 앞장의 사진을 바라 보았다.


글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글이 셔터처럼 두 사람을,

자두 나무의 흔들리는 나뭇잎을,

찰칵,

소리없이 찍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읽다가

놀란 채로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리고 다시 멍하게 사진을 바라봤다. 


이 책의 작가는 나로 하여금 자기 마음을 통해 내 눈을 보게 했다. 

스물하고도 일곱해 넘도록 아무일 없던 내 눈이 낯설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이라는 책 때문이었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뻐근한 날이었는데

온마음이 찢겨져 나간 듯 쓰리고 아린 날이었는데

몸 어디에도 멍든 곳은 없었고,

마음 구석에도 찢긴 조각도 찾을 수 없었다. 


자두 나무 곁에 두 사람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모호한 사진 한장은 그 무엇보다 투명한 위로를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습이 나올 거예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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