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nomadia > 아나키-꼬뮨의 지평, 혁명의 스티그마타
아나키스트의 초상 카이로스총서 3
폴 애브리치 지음, 하승우 옮김 / 갈무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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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나키즘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것일까? 맑스가 『바쿠닌주의자들의 활약상』이라는 짧고도 다소 경멸적인 문체로 씌여진 논문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그것은 무모함과 열정의 묘한 결합이며, 그래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음모적 사상이다. 그렇다면, 맑스가 또한 초기 아나키스트인 블랑키의 사면에 그토록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또 무엇이며, 인터네셔널 본부에서 아나키스트와 바쿠닌을 제명시키기 위해 중앙위원회의 권력을 절망적으로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또 무엇인가? 좌파의 시각에 이러한 의문은 항상 미결인 채로 남겨져 왔다. 때로는 고의로, 때로는 교조적이라는 비난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에게 있어서 대결해야 할 상대는 맑시스트들이었다기 보다, 맑시즘이 단일한 권력중심체의 이데올로그들을 양성하고, 그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트와 반역적 민중들의 해방 역량을 도구화하는 바로 그 행태와 조직적 시도였다. 따라서, 맑스가 정당하게 자신을 맑스주의자라고 부르기를 거부했듯이 크로포트킨은 스스로 우상(idol)이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국가도 없고, 황제도 없다"

폴 애브리치는 이러한 아나키스트들의 삶과 투쟁의 모습을 적나라하고 감동적으로 스케치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실행에 의한 선전' 그리고, '직접행동(direct action)'이라는 이들의 전략은 아나키스트의 삶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어째서 '폭풍'이라는 비유가 적절한지를 말해 준다. 그들 대부분은 한 권의 완성된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항상 당대 반란의 중심으로 달려 들어갔다. 실행과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혁명과 반역이라는 신성한 땅에 단 한 뼘도 다가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바쿠닌은 맑스의 적대자라기 보다 그를 항상 전면으로 밀어 부치거나, 스스로의 지적 역량을 혁명적인 당대성으로 벼루어낼 수 있게 해준 시니컬한 동지에 가까워 보인다. 『프랑스에서의 내전』은 바쿠닌이 철의 신념으로 피의 한 가운데에서 활동하면서 일러준 그 직접행동의 고귀함이 없었다면, 쓰여질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맑스가 초기의 부정적 판단을 수정하고 빠리꼬뮨을 긍정했을 때, 바쿠닌은 아마 맑스의 이 뛰어난 저작 이후를 이미 준비하고 있었을 터이다.

네차예프와의 에피소드를 다루는 부분은 흥미롭다. 네차예프라는 이 인물을 기화로 바쿠닌이 인터네셔널에서 제명될 때까지, 애브리치는 그 둘의 애증을 서간과 주위의 증언들을 토대로 실증적으로 엮어 낸다. 결과적으로 바쿠닌은 그 자신의 신념을 무엇보다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네차예프라는 인격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바쿠닌 자신의 화신이었고, 폭력과 아방가르드적 기질에 있어서 그를 앞섰으며, 혁명운동을 음모적인 범죄로 이끌어 가는 과감함에 있어서는 그 자신의 기대를 초월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음모가 아니라 범죄다. 애브리치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부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바쿠닌이 순수한 희생자인 것만이 아닌 것과 같이, 네차예프가 혁명운동에 얼마만한 해악을 끼쳤는가 하는 것은, 그의 운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인정함과 아울러 가차없이 비판되어야 한다. 그는 동지를 모함하여 죽인 범죄자이며, 거짓선전으로 운동의 도덕성을 훼손한 사기꾼이었으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야할, 오직 유일해야만 하는 인격이었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혁명에 있어서 현명한 의사의 처방과 같다. 전쟁에서 연합국의 손을 들어 주었던 순진함을 제외하고서, 크로포트킨의 인격과 주장은 아나키즘에 대한 어리석은 오해를 불식시킬만 한 것이다.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폭력은 '정당하게' 긍정되어야 한다. 누구에게? 황제의 군대와 부르주아의 사병들은 여기서 완전히 그 권리를 상실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빈자들에게 폭력이다. 빈곤, 기아, 도덕적 황폐, 알콜중독, 금전으로 인한 모든 범죄는 자본주의라는 악마의 쟁기질로부터 싹터온다. 아나키즘의 폭력은 이 폭력들에 비한다면 참으로 절망적이며 사소하다. 크로포트킨이 개인적인 암살과 폭력의 절망적 특성에 연민을 느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절대화하지는 말자. 그 길은 아나키즘의 협동공동체로 나 있지 않으며, 무자비한 테러리즘의 벼랑과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나키스트들의 초상 외에도 애브리치는 진지한 시선으로 다른 아나키스트들을 다룬다. 엠마 골드만과 베르크만 그리고, 플래신, 슈타이머와 플래밍을 비롯해서, 이들의 삶은 마치 감옥을 전전하는 성자와 같다. 깊은 도덕성과 혁명운동에의 헌신을 묘사함으로써 각각의 장들은 이 인격들 각자의 북소리로 공명을 만들어 내고 있다. 거대한 북소리. 그 북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애브리치가 그려 놓은 아나키스트들의 초상은 역자가 강조하고 있다시피, 죽은 자들의 초상이 아니다. 우리는 68년 낭떼르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전세계를 순환했던 투쟁의 열렬한 주기 또한 간직하고 있다. 빠리꼬뮌에서 69년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을 거쳐 최근의 반세계화 시위에 이르기까지, 투쟁이 드러내는 열정의 핵심은 언제나 아나키의 심장에 맞닿아 있다. 직접행동과 실행에 의한 선전, 그리고 모든 중앙화된 권위와 권력을 부정하는 꼬뮤니즘. 자본주의의 폭력에 맞서는 반역의 고귀함이 그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아나키의 심성을 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 드러난 아나키스트들의 초상은 투쟁의 순환 주기 속에 수백, 수천만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얼굴에 반복해서 나타날 것이다. 다름 아닌 그들이 바로 '여기/지금' 아나키스트들이며, 바로 그들이 지난 혁명의 성흔(聖痕, Stigmata)을 '여기/지금' 일구어내는 아나키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꼬뮨의 지평 안에 아나키는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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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cutecla > 인간에 대한 신뢰
휴머니즘의 옹호
머레이 북친 지음, 구승회 옮김 / 민음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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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북친은 유전자환원론, 가이아이론, 맬서스주의, 신비주의 및 심층생태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이론에 깔린 반인간주의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며, 결국 인류의 희망적인 미래를 위해서 선택해야 할 것은 휴머니즘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런 반인간주의를 거부하는 이유는, 20세기 들어와서 그러한 조류들이 사회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대치시키고 자기 구원을 위해 사회로부터 한발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북친은 반인간주의들의 이러한 주장이 문제를 단순화시켜 원초적인 것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류 역사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는 이것을 역사의 폐기라고 명명하는데, 반인간주의자들은 원시성으로부터의 진보적 발달을 이룬다는 의미에서의 역사를 거부하고 내적 본성의 퇴화나 퇴행적인 몰락으로서 역사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친은 역사과정에서의 실패와 참상을 통해 인류가 이룩한 지성과 도덕체계, 예술과 문명을 의미있는 것이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는 상호존중의 윤리를 바탕으로 생태지향적이며 미학적으로 고양되고 자비넘치는 인간의 잠재력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많은 지역에서 일어난 각기 독특한 사회혁명이 수렵에서 농업으로, 소규모 집단을 넘어서 사회조직으로 나아가는 유사한 문화적 진보를 보이고 있으며, 이런 보편화하는 역사는 보편적 휴머니즘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말한다. 현 인류가 맞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은 그렇다면 문화적 진보의 산물이냐는 의문에 대해, 그는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지적하며,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덧붙이면서 인류가 계몽적 휴머니즘에 더욱 매진할 것을 권유한다. 그는 인간들이 통찰력있게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보다 안전하고 안정적이며 풍요롭게 하고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이성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휴머니즘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생태적인 감수성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그리고 있어야 할 바로서의 실재를 보는 인간의 능력을 신뢰할 때, 이성적 존재로서 자아실현을 위한 잠재력과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휴머니즘을 옹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만이 이성과 과학과 경험의 누전적인 결과인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신비하고도 매혹적인 존재라며 휴머니즘 예찬을 끝낸다.

맺음말에서 그는 책을 통해서 비판했던 여러 비관주의 만큼이나 낙관주의 역시 극단적인 단순화를 범하고 있다며 덧붙인다. 그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인류가 발전하기 위해서 합리적인 미래에 대한 몇몇 지침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를 설명하는 사회적 정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 정수가 바로 계몽된 휴머니즘이라고 말한다. 둘째,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전면적으로 재수립하기 위해서 이성의 권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상품생산과 시장, 자본 역시 인간 이성의 산물이므로, 인간 이성에 의하여 자율적이고 공동체적인 코뮌으로의 새로운 사회로 발전해나갈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시간을 늘일 수 있는 기술과 과학을 진보시켜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 진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넷째, 정의와 자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완전히 재개념화해야 한다. 산술적인 평등이 아니라 상보성의 윤리에 바탕을 둔 평등을 이야기하면서 비동등성의 동등성을 사회적 제도가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물리적 나약함이나 사회적 조건에 의한 불평등을 보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지침을 실천하기 위해서 혹독한 윤리적인 노력이 필요다고 말하고 있지만, 물론 이러한 역사의 진보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루어질 것이라 신뢰하면서 책을 맺고 있다.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을 신뢰하기 위해선, 인간의 욕망이 이성에 의해 어떻게 조절되는가 하는 점을 짚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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