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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으로 들어가기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피할 수 없는 삶의 폭풍 앞에서, 우리가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 법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입안에 차갑고 짠 바닷물이 맴도는 듯한 짙은 여운이 남습니다. 카롤리네 발의 신작 『폭풍으로 들어가기』는 뻔한 위로나 값싼 힐링을 남발하는 흔한 소설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스무 살의 주인공이 거친 삶의 파도와 정면으로 부딪히며 기어코 '살아내는' 과정을 그린, 눈부시도록 처절하고 아름다운 생존기입니다.
폭풍 속으로 도망친 어른, 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전작이자 베스트셀러인 『스물두 번째 레인』과 세계관을 공유합니다. 언니 틸다가 떠난 집에서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동생 '이다'가 이 책의 주인공입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갓 어른의 이다는 낡은 가방 하나만을 챙겨 독일 북부의 척박한 '뤼겐 섬'으로 무작정 도망칩니다.
어머니를 향한 지독한 애증과 영원히 씻어낼 수 없는 죄책감. 이 무거운 상실의 짐을 짊어진 이다는 뤼겐 섬에 도착하자마자 매일같이 거친 폭풍이 몰아치는 차가운 발트해로 뛰어듭니다. 얼핏 죽음을 향한 위태로운 투신처럼 보이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독자는 그 수영의 진짜 의미를 깨닫고 깊은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이다에게 바다는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자연의 횡포 앞에서도 "나는 내 몸을 통제하며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처절한 '생존의 의식'이었기 때문입니다.

피보다 진한 연대, '선택된 가족'의 탄생
벼랑 끝에 선 이다를 아무 조건 없이 거두어준 곳은 뤼겐 섬의 낡은 술집 '물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정한 노부부 크누트와 마리안네, 그리고 상처를 품은 청년 라이프.
작가는 생물학적으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 낯선 타인들이 어떻게 혈연보다 더 끈끈하고 절대적인 '선택된 가족'으로 거듭나는지를 가슴 뭉클하게 묘사합니다. 나의 가장 뾰족한 밑바닥을 보여주어도 결코 나를 내치지 않을 것이라는 100%의 맹목적인 믿음. 이다는 친어머니에게서조차 느끼지 못했던 그 완벽한 안온함을 이 낯선 이방인들 품에서 비로소 찾아냅니다.
회피를 멈추고 삶의 먹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하지만 삶은 평온한 안식처에 영원히 머물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다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던 마리안네에게 암이 전이되며, 이들에게 또다시 거대한 상실의 폭풍이 몰아칩니다. 과거의 이다였다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그랬듯 또다시 도망쳐 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이다는 고통스러운 투병이라는 거친 현실과 불안정한 라이프와의 관계 속으로 피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갑니다.

이 소설이 빛나는 지점은 상실의 슬픔을 억지로 '극복'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다는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부인하지 않고, 그 먹구름 속으로 당당히 들어가 기꺼이 쏟아지는 비를 맞는 '온전한 수용'을 선택합니다. 다가올 죽음의 이별이 두려워 도망치는 대신, 오늘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오늘 하루의 바다를 기꺼이 헤엄치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마치며 : 당신의 삶에 폭풍이 닥쳤을 때 꺼내 읽어야 할 소설
『폭풍으로 들어가기』는 척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바치는 서늘하고도 따뜻한 위로입니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피할 수 없는 폭풍우를 만납니다. 그 먹구름 앞에서 주저앉아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다면, 부디 이 책을 펼쳐 보시길 권합니다.
이다와 함께 차가운 파도 속으로 몸을 던져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을 때, 당신은 틀림없이 다시 한번 힘차게 살아갈 눈부신 생의 용기와 곁에 있는 사람의 벅찬 온기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올해 만난 가장 강렬하고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소설, 강력히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