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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숲 25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양여명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읽는 사람의 마음을 유유히 이끌어갑니다. 마음이 저절로 움직인다고 할까요. 그런 만화입니다.
만화를 읽으면서 말 그대로 '감동' 이라고 할 만한 느낌을 받은 작품은 극히 드문데, 이 작품은 그 드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읽기 전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읽고 나니 큰 보물을 찾은 듯한 기분입니다.
읽기 전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은 그림체 때문이었습니다. 책을 몇 장 팔랑팔랑 넘겨 대충 훑어보니, 제가 좋아하는 느낌의 그림은 아니었거든요. 어디선가 좋은 음악만화라는 추천을 받은 까닭에 한번 읽어보기로 했지만, 퍽퍽하고 직선적인 그림체 때문에 내용 또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 기대를 훌쩍 뛰어넘은 작품입니다.
음악을 다루는 만화 중에서는 <노다메 칸타빌레>와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인데, 이름난 책은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한 권 읽을 때마다 다음 권의 내용이 궁금해 안달나도록 하는 책은 오랜만이었습니다. 작화는 약간 투박하지만, 인물들의 감정묘사와 대사처리, 그 밖의 연출들이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고 미려합니다. 쓸데없는 묘사나 잉여로운 장면 없이 스토리를 주욱 풀어 나가며 독자를 매료시키죠. 그만큼 스토리텔링 능력이 특출납니다.
초반부와 후반부의 작품의 색깔은 많이 다른데요, 초반부에는 주인공 이치노세 카이와 아마미야 슈우헤이의 만남으로 시작하는 초등학생 시절 둘의 관계를 다룹니다. 초반부에 그들의 어린시절을 다룬 8권까지는 인물들의 인간관계 묘사와 강한 스토리텔링에 주력합니다. 반면 그 이후 후반부터는 그들의 5년 후를 배경으로 쇼팽 콩쿠르를 무대삼아, 스토리텔링보다는 인물들의 피아노연주의 음악적 묘사와 연출, 표현에 대부분을 할애합니다.
그들의 청년기 시점을 다루게 되고 콩쿠르와 피아노 연주 자체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야기 진행은 초반부보다 확연히 루즈해집니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의 모자람을 전혀 못 느낄 정도로, 만화가 피아노 콩쿠르 연주 자체를 묘사하는 능력이 기막히다는 것이 작품 후반부의 볼거리죠. 쇼팽 콩쿠르 대회가 진행되며 쉴 틈 없이 여러 참가자들의 연주가 진행되는데, 계속되는 연주에도 지겨움이나 심심한 느낌 없이 등장인물마다 계속 다른 느낌, 다른 분위기로 피아노연주를 묘사해냅니다.
만화라는 매체는 소리를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피아노 연주 장면을 이렇게까지 다양하고 매력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또한 피아노를 많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재미를 느끼고 즐길 수 있을 만큼의 묘사를 해 내죠.
소리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감동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만화는 증명해냅니다.
그림과 문자로만 음악의 느낌을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이 악기와 음악을 주제로 하는 문학이나 만화가 안고 있는 숙명적인 고민이죠.
하지만, <피아노의 숲>은 보란 듯이 그것을 해내는 만화입니다.
<피아노의 숲>을 이끌어가는 주요 등장인물 두 명은 '이치노세 카이'와 '아마미야 슈우헤이'입니다. 두 사람은 각각 '재능'과 '노력'을 상징하는 위치에 있죠. 물론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도 노력이 없으면 그것이 성립되지 않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기본적인 재능이 없다면 소용이 없겠죠. 여튼 어디까지나 그러한 위치를 상징한다 이겁니다.
이치노세는 흔히 말하는 '타고난 천재'로써,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위해 죽어라고 노력했던 아마미야를 번번이 좌절시키면서도 동시에 경쟁심을 불태우게 하는 라이벌 관계이기도 하죠. 막상 이치노세 자신은 자신의 재능으로 자만하지도 않고 아마미야를 둘도 없는 친구로 생각하지만, 이치노세의 무서운 재능을 경험하고 그의 벽에 가로막히는 아마미야는 그를 친구로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에게 끝없는 열등감을 가지기도 하죠.
'재능'과 '노력'의 대립은 언제나 많은 이야기의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어 왔으며, 종국에 누가 이기든, 누가 우월하든 간에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흥미로운 소재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능있는 자'와 '노력하는 자' 의 대립은, 수많은 매체, 수많은 작품들에서 너무나 흔히 쓰이는 구도에요. 그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만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익숙한 만화를 하나 예로 들어본다면 <나루토>라는 만화의 나루토(노력)와 사스케(재능)처럼 말이죠. 최근엔 이러한 구도가 너무나 익숙해지고 범람하게 되니 사람들은 때로 지겹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흔해빠지고 뻔한 구도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의 숲>은, 흥미진진합니다. '재능있는 자'와 '노력하는 자'. 이 둘이 음악 세계에서 서로 경쟁하고 자극받는 과정과 그 속마음을 세련되고 자연스럽게 잘 끄집어내 표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작품의 후반부 들어, 음악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고뇌와 방황을 직설적이고도 섬세하게 표현한다는 점도 인상깊습니다. 클래식, 혹은 피아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았으면 하는 만화에요.
취향을 많이 타는 만화라서 사람에 따라선 크게 재미를 못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만, 몇 개 없는 '좋은 음악만화'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만화를 다 읽고 나면 피아노 음색을 들어보고 싶어집니다. 특히 쇼팽의 곡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