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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Real 14
이노우에 다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심혈을 기울여 그리고 있는 만화입니다. 우리나라에는 2001년부터 정식발매되고 있습니다. <슬램덩크>처럼 농구라는 스포츠가 작중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작품의 포커스는 어디까지나 '농구'가 아닌, '신체적 정신적 결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현재 농구를 다룬 만화 중, 이 정도로 만화적 과장을 완벽하게 배제한 만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목처럼 그야말로 '리얼'한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죠.
작가는 넓은 세상 속에서 다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는데, 특히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골육종을 앓아 다리를 절단한 청년,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된 학생.
이 두 명은, 바로 우리가 평소에 '장애인' 이라고 통틀어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작품은 이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주요 등장인물은 세 명입니다. 골육종이라는 선천적인 병 때문에 중학생 때 다리를 절단하고 휠체어농구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는 청년인 토가와 키요하루. 그리고 비장애인이지만 다른 사람을 사고에 휘말려들게 해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방황하고 있는 고교 중퇴 학생인 노미야 토모미. 그리고 토모미와 함께했던 고교 농구부의 에이스였지만 한순간의 실수로 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가 오게 된 타카하시 히사노부.
이 세 사람의 시점을 계속 전환시키며 여러 시점에서 물 흐르듯이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여러 주인공들은 서로 간에 한두개씩 접점을 가지고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들이 헤져나가는 각자의 리얼한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중 인물들의 개인적 트라우마와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헤집어내 펼쳐놓고는, 하나하나 복기하면서 그 상처들을 천천히 치유해 나가는 느낌입니다.
이 작품이 특히 좋았던 점은, 작품 속 인물들의 생동감있는 삶의 형태를 담아내면서도 만화적 재미 또한 살아있다는 겁니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리티가 잘 살아 있고, 심리묘사나 감정 표현을 워낙 느낌있게 잘 해내 작품을 보는 내내 인물에 저절로 몰입하게 되죠. 그렇다고 그들에 감정이입이 잘 된다고 해서, 불편하거나 피곤한 느낌을 남기는 만화는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특별한 큰 사건이나 화려한 연출은 없지만, 이 만화에서는 인물들이 가진 삶의 역동성이 참 생생하게도 느껴집니다. 잔잔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인간적이고 삶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만화입니다.
'장애인' 이라는 존재는 누구에게나 익숙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그 익숙치 않은 세계, 그러나 누구에게나 금방이라도 찾아올 수도 있는 그 세계를 파헤쳐 보여줍니다.
장애자를 만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많은 작품의 경우, 대부분의 작품 내에서 그에 대한 취급, 혹은 그에 대한 이미지에 대한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장애자에 관련한 어둡고 칙칙하기만 한 분위기를 벗어나, 진중하면서도 잔잔하고 몰입감있는 전개를 펼칩니다. 과도하게 우울함에만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작정 쾌활하지도 않게, 작품 분위기의 완급조절에 있어서의 능수능란함이 느껴집니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작품이 내내 보여주는 것은 은근한 '희망'입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자신들의 절망과 개개인의 공포 좌절, 트라우마와 마주하고 그것들을 어떻게든 극복해나가려는 '과정'에 작품은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실제로 극복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고, 성공보다는 극복에 실패하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만화는 말합니다.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기 때문이죠.
이 만화가 장애인이라는 보편적에서 약간 벗어난 존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읽었을 때 묘한 공감대와 감동이 느껴지는 것은, 작품의 장애인들과 우리는 전혀 다를 것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써놓고 나니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우리는 '장애인들과 우리는 다른 점이 없다'는 그 진부한 사실을 항상 잊고 삽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그들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리얼>에서, 그들은 우리가 보통 '장애인' 하면 떠오르는 유약하고 돌봐주어야 하는 존재라는 이미지를 산산이 부숴버리죠. 인상부터 다릅니다.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는, 항상 힘이 가득 들어간 표정으로 휠체어농구에 임하는 키요하루만 봐도 말이죠.
선천적 장애가 아닌 이상,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 재할하는 과정에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인지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이것을 극복하고 난 다음의 일이죠.
또한 이것은 장애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읽으면서 끊임없이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리얼>은, '장애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직접적이고 상투적인 어조로 훈계를 하지도 않고, 의도적으로 감동이나 교훈을 전달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와 조금 다른 사람들' 의 삶을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을 뿐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삶을 보면서 저절로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와 조금 다르지만, 한편으론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무력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결코 자비롭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힘을 내어 살아간다는 것을.
또 세상은 누구에게나 가혹하고 삶은 언제나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