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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11
오시미 슈조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4년 10월
평점 :
'버러지주제에'
표지부터 섬뜩했던 이 만화는 여러모로 강렬하고 충격적인 만화였습니다.
평범한 남자 중학생 카스가 다카오는 어느 날 교실에 짝사랑하던 미소녀 사에키의 체육복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 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필 같은 반의 나카무라라는 여자애에게 들키게 되고, 나카무라는 그것을 빌미로 카스가에게 온갖 변태적 요구를 하게 됩니다. 와중에 나카무라의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요구가 계속되고, 여기에서 점차 충실감을 느낀 카스가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나카무라와의 변태적인 행동에서 찾게 됩니다.
거기다 자신의 위에서 군림하면서 이끌어주던 나카무라도 사실은 자신과 비슷한 방황을 겪고 있는 것을 알게 된 카스가는 나카무라에게 더욱 빠지게 됩니다. 얼떨결에 동경하던 사에키와 사귀게 되고 사에키가 카스가의 모든 걸 품고자 할 정도로 사랑하게 되지만, 이미 나카무라가 자신의 전부가 된 카스가에게 있어 사에키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이런 카스가를 어떻게든 돌려보고자 하던 사에키는 점점 자신을 망가뜨리게 되죠.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마을은 카스가의 말을 빌려 "녹슨 철"입니다. 파도 한 번 일지 않는 지루한 가운데 조금씩 녹슬어 가면서 가라 앉고 있는 곳이죠. 카스가와 나카무라는 "버러지의 바다"와도 같은 마을을 벗어남으로써 해답을 찾고자 하지만, 조금씩 깨닫게 되는 "마을의 너머"는 그들의 이상향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또 다른 돌파구를 찾아나서게 되면서 이야기는 더욱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악의 꽃>은, 우유부단한 성격의 남자 주인공이 사춘기라는 미묘한 시기에 맞물려 순간 실수를 저지르고 이상한 여자애의 변덕으로 악의 수렁으로 빠지는 과정을 세심하게 묘사합니다. 사람의 심리적인 일탈과 혼란, 그리고 방황을 당황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묘사해냅니다.
주인공인 카스가와 나카무라는 '나는 빈 껍데기에 불과해' 라는 심적 방황을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저 너머' 를 꿈꾸며 자신들의 좁은 세상과 자꾸 부딪히게 됩니다.
제목인 '악의 꽃'은 보들레르의 시집으로, 주인공의 허세, 즉 빈 껍데기를 표현하는 주요한 아이템으로 등장합니다.
이 만화는 심리적으로 방황을 겪는 사람의 심정, 그 과정을 지독히 끈적끈적하게도 묘사해냅니다. 중학생인 주인공들의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도피, 변태성, 돌발성을 숨 돌릴 새 없이 모두 까발려 보여주고 독자를 쉼없이 몰아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몰입감이 정말 뛰어난 좋은 만화이기도 합니다. 이만큼 독자를 몰아붙일 수 있는 책도 많지 않을 테니까요.
읽는 동안 내내 캐릭터들에게 휘둘린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만약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하고 본다면 상당히 피곤할 겁니다.
7권 정도부터 작품의 반환점으로 들어서면서 주인공들의 중학생 시기가 지나고 고등학생 시기로 이야기가 넘어감에 따라, 폭풍같이 휘몰아치던 작품의 분위기는 극도로 차분해집니다. 주인공들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중학생 때의 방황과 혼란에서 벗어나게 되고, 비로소 그제서야 그 시절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방황은, 말 그대로 찰나의 폭풍이었다는 것이죠.
이 작품은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방황의 시기를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수성 넘치고 예민했던, 절로방황하게 되고 일탈의 욕구만이 샘솟던 그 시기를 말이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구나 그 잠깐의 방황기를 거쳐야만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청춘 성장물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어도 한번쯤 겪어봤을 법한 방황과 일탈을, 이렇게 작품 속으로 온전하고 적나라하게 옮겨놓은 것만으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다만 '만화는 무조건 밝고 유쾌해야 한다' 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추천하기 꺼려지네요.
작화도 상당히 뛰어나고, 특히 인물들의 미묘한 표정변화를 잘 표현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리티 또한 매력있게 잘 살려냈고요.
수려한 작화와 함께 몰입감 넘치는 스토리텔링이 맞물려 무척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또한 사람의 심리를 파고드는 연출, 특히 불안감이나 불쾌함 등의 막연한 머릿속 이미지를 '악의 꽃'이라는 특정한 사물에 이입해 구체화시키는 데에서 보이는 연출도 정말 기가 막히고요.
권두에 써 있는 작가의 말은 이렇습니다.
"이 만화를 지금 사춘기로 힘들어하는 모든 소년소녀,
일찍이 사춘기로 힘들었던 옛 소년소녀에게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