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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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 또래다.  

나보다 먼저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지만, 그 일이 있을 때는 스물 여덟, 겨울이었다.

사랑하지는 않지만 사업가인 남편의 아내로서 의무를 다 하기 위해 원치 않은 모임에 나갔고,

그곳에서 우연찮게 그를 만났다. 그의 불안한 눈빛을 읽었을 뿐.첫눈에 종이 울린다거나 눈을 질끔감게 하는 그런 강렬함은 없었다.

그러나 단 한마디 인사에 마치 어떤 계시를 받은 것처럼 그를 따라-아니, 그를 이끌고- 아이와 집을 버리고 나갔다.

두 달 남짓의 생활은 현실과 종종 부딪쳤고, 그녀는 다시 그를 버리고 나갔다.

그리고 다시 겨울, 11월.

헤어졌던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는 돌아왔고, 그녀는 또 다시 아이와 집을 두고 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이 모든 일이 불과 1년 도 되지 않아 일어났다.

결국은 통속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나 빨려들 듯이 읽어 내려간 이야기인데, 책을 덮고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녀는 일 년도 되지 않은 시간 속에 모든 삶을 내던져 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간 자체는 어떤 결정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확신이 드는 순간 가족-귀여운 아들마저도!-도 보이지 않았듯이.

 

그는 서른 네살이다. 결혼에 실패한 적이 있고 그밖에 몇 번의 사랑에서 차인 적도 있는 것 같다.

삶의 허무함이 글을 쓰도록 떠밀었고 우연찮게 그녀의 남편네 회사가 스폰서를 선 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축하연에 어색하게 참석하여 있을 때 그녀를 보았다. 그의 눈에 생전 처음 띈 너무도 품위있는 부인을.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현실적이지 않다. 그는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어떻게 처음 본 순간 그녀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다는 결정을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생각이 들 수 있다고 쳐도, 그것을 그대로 표현한단 말인가! 그저 양아치이거나 카사노바일 수밖에,

나는 이런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의 마음은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생각이 든다.

얼마나 순수하기에 아무 것도 재지도 고려하지도 않고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마음에 빠질 수 있던 것일까.

그 마음 속에 오롯히 들어간 그녀는 -불행인지, 행복인지-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받은 것일까.

 

나에게도 매우 진실된 표정과 말투로 내게서 빛이 난다고 하며, 나를 샹젤리제와 같다고 말해 준 사람이 있었다.

나의 몸과 생각, 나의 가치에 대해 자신감이 없던 때였기에 그런 이야기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 때 나는 나를 그렇게 평가해주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과연 내가 그만한 찬사를 받을 만한지에 대한 의문을 동시에 가졌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나를 자기가 가진 최고의 것으로 대해 주는 것이 즐거웠다. 그만큼 내 자존감도 바닥에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그것이 내게 대한 감탄이기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자신감과 만족감의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그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동시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 끝이 났다.

 

그의 모습은 내게 이런 기억들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에 대한 고백과 사랑에서 나는 예전 그 사람을 생각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 몇 번의 고백과 실패를 했었던 그인데 또다시 그 신호를 진실한 사랑으로 믿을 수 있을까?

그녀에게서도 완성을 보지 못하면 곧 실패라고 치부해 버리고 말 것을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이 소설의 끝이 마음에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둘의 마주하는 시선과 완벽하다는 강렬한 느낌은 현실로 들어서게 되면 곧 사라질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가?

그렇게 희석되고 부서지지 않고 꿈처럼 오롯히 남을 수 있도록 한 결말은 강한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완벽했다.

 

스물 아홉의 나에게 다시금 그런 사랑이 찾아온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할까?

"당신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나는 이미 속물이 되었다.

 


 
  "당신 이제야 오는군."

 베르톨트가 막스를 보면서 애기했다.

 

  "기분 나빠하지 마십시오, 사장님. 제가 마리온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거 말입니다. 습관이 되었거든요......

    왜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만들어? 당신을 깨우러 가려고 했잖아."

 

 술을 조금 마신 듯 했지만 많이 취한 건 아니었다. 다른 남자들처럼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마치 건장한 청년 같아 보였다.

그는 예의 그 낡은 바바리를 입고 있었다. 비에 젖은 머리칼이 온통 앞으로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얼굴만은 빛나고 있었다.

나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기쁜 것 같았다.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나에게로 달려오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눈을 나에게 고정시킨 채 올라왔던 두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현관까지 뒷걸음질을 치려는 걸까?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계단 아래에 그대로 서서 나를 기다렸다.

 막스가 한쪽 옆에 서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는 베르톨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 천천히 걸어와."

 베르톨트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한 계단 한 계단, 전처럼. 귀부인처럼 미소를 지으면서...... 그래, 그래, 그렇게! 좀 보세요, 사장님. 저런 모습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지요. 무대 위에 올려놓을 수도 없구요. 전 이미 한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사장님은 그때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행중이었을 겁니다.

내가 그것을, 마리온의 저 모습을 보고 나니 다른 것은 모두 쓰레기인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 그때와 같은 옷이군요.

사장님, 그때와 꼭 같은 옷입니다. 참 멋진 옷이지요. 하지만 옷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장님께서는 믿지 않으시겠지만...... 그런데 당신 왜 극장에 오지 않았지? 얼마나 기다렸는데...... 사장님이 못 가게 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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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의 포구기행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해뜨는 마을 해지는 마을의 여행자
곽재구 글.사진 / 열림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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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오는 게 가을이고, 그 때마다 보는 게 낙엽이면서도, 해마다 그 즈음 바람이 쌀쌀해지면

문득문득 행동에 옮기지도 못할 거면서도 여행을 꿈꾸게 된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펴든 책이었다.

값진 책의 공통된 속성이라면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상을 주고, 반성의 계기가 되며

언제 보아도 소소하더라도, 사소하더라도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아닐지.

꽤 오래 전에 사서 -원래 그러했지만- 조금 더 누래진 책장 하나하나를 다소 꼼꼼히 펴 들면서 여행기의 새로운 맛에 입맛을 들였다.

시인이 바라본 바다는, 

실제로 외롭고 적막하고 황량한 모습마저도  참 감성적으로 다가온다.

혼자 바닷가에 누워 달콤한 낮잠을 잘 수도 있고, 새벽녘의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도 흘리고,

일 하는 사람, 땀 흘리는 사람에게서 새생명을 발견하고 사랑의 의미를 찾는,

그런 모습을 보니 그래서 시인이구나, 싶었다.

여행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 ㅡ 여행의 팁이라든가 맛집 소개, 가는 길 안내, 볼 만한 명소...

그런 게 없어도 그저 펼쳐진 바다를 보담고 있는 포구와 그곳에 정박 중인 배를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서술이 마음을 움직인다.

 

특히 저기 저 곳, 여수.  


'밤을 세운 긴 기차여행 끝에 당신이 한 낯선 바닷가에 닿는다면 그곳의 이름이 무엇이었으면 좋겠는가.

목포? 부산? 포항? 강릉?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밤을 세우고 햇빛을 만나고 처음 본 바닷가 마을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그곳의 이름이 목포면 어떻고 포항이면 어떻고 청진이면 어떠한가.

그러나 소금 내음 속으로 물살 선선하게 번져가는 그 마을의 이름이 '여수'라면,

당신 한눈에 그 마을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 바닷가에 신발 두 쪽을 벗어두고 눈빛 맑은 그곳의 한 처자와 남은 세월을 아득바득 살아봄직하지 않겠는가.

별, 꽃, 바다, 꿈, 생선, 솥, 밥, 나무, 불, 물, 솥, 그물, 달빛 ......

한 두 음절이면 족할 단어들의 서러운 눈빛과 함께, 숨어서 오래오래 적막하게.      -151쪽.

 



새삼스레 다가온 이름에는, 웬지 고즈넉한 분위기와 우수에 찬 눈을 지닌 누군가를 만나 동행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홀로 떠나는 여행. 그 멋을 진작 누리지 못한 나의 두려움이 살짝 아쉬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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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가쿠타 미쓰요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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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이 책이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서고, 어떤 기억으로 존재하는지 소소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로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대다수의 경우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나'를 위해서이고, '나의 상처'를 치유해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겐 단지 스치는 것일지라도 '나'에게는 특별하고 소중한 것으로 남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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