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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평점 :
책의 제목인 스틸 라이프(still life)는 ‘정물’을 의미한다. 정지한 것, 움직이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그린 그림이 정물화가 된다. 정물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니타스 정물화이다.
이 작품들을 언뜻 보면 꽃과 과일이 식탁에 놓여있어 풍요로워 보이기도 하는데, 자세히 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썩은 과일이고 죽어가는 꽃이기 때문이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공허함, 삶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정물화는 역사, 종교화보다는 교훈을 주는 ‘소박한 이급 예술’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정물화가 화가에게는 실험의 무대가 되었는데, “아이디어나 색채, 의견들을 실험해 보는 데 유용한, 사색하기 좋은 형태의 장르”였기 때문이다.
“시간 자체가 갖는 성격과 역사적 맥락 때문에 반복이 불가능”한 작품들과는 달리, 정물화에서 드러나는 “반복은 다른 장르에서는 불가능한, 정물화만의 특권”이다. 우리는 세잔의 이전과 이후에도 사과의 그림을 봐왔고 지금도 어딘가에선 또 다른 사과가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대상을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익숙한 것을 에니그마(수수께끼)처럼 보는” ‘낯설게하기’의 기법을 사용해 정물을 바라본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예술과 문학 작품 속 정물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동시에 책에 등장한 셜록 홈스, 고흐에서 나아가 누군가의 방과 책상을 구경하고 싶어진다. 정물(靜物)이 정물(情物/감정이 있는 물건)이 되는 순간이다.
책은 아카이브적인 방식으로 “정물이라는 소재가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가장 넓게 탐색”한다. 저자가 가지고 있던 정물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신나게 풀어놓는 느낌이다. 그 과정에서 각 페이지마다 달린 충분한 주석은 책을 읽다가 무언가를 검색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준다. 하지만 책장을 가볍게 넘기면서 읽기 좋은 책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양한 지식을 넓고 얕게 탐구하는 것이 아닌 넓고 깊게 파고들어서다. (책을 읽고 나면 드는 뿌듯함은 덤이다)
저자인 가이 대븐포트는 이번 도서를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다. 그가 가진 "백과사전적 지식 뿐 아니라 문학적 역량"은 동료로 하여금 최고의 문장가라는 평을 받았다. 책을 읽고 나면 "자신의 수업 중에 비누가 등장하면, 하던 강의를 멈추고 갑자기 비누의 역사와 의미에 관해 10분이 넘는 독백을 시작"했다는 그의 일화에 웃음과 함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것이다.
*출판사 도서 제공으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