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아 비바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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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에게 무질서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게 내 삶이다. 나는 잃어버린 것과 발견한 것만 갖고서 작업한다.”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는 책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날 것‘, ’원시‘, ’생명력‘ 같은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 뿐이다. 애초에 줄거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무의식적인 본능에 따라 하는 일은 말로 표현될 수 없”기에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건 불가능한 것이다.

책에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를 따라가”는 ’나‘가 등장한다.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딛는 걸음은 일정하지 않다. 확신이 없어 두려움이 밀려오고 존재하지 않는 답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우리에게 두려움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한숨 자고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간다.

의식의 흐름으로 전개되는 문장들은 일종의 선언처럼 느껴지는데, 무언가로 특정되기를 거부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리스펙토르의 글쓰기는 전혀 새로운 장르로 다가온다. 혼자 책을 읽고 있다면 맘에 드는 문장을 소리 내어 여러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주문을 외운 것처럼 묘한 기운이 생길 것이다...“그것은 그것 자체다. 나는 나 자체다. 당신은 당신 자체다. 그것은 그것 자체다. 나는 나 자체다. 당신은 당신 자체다. 그것은 그것 자체다. 나는 나 자체다. 당신은 당신 자체다.”

 책을 읽다가 멈춰서 이 모든 걸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시도하는 즉시 그것은 우리의 이해가 허용되지 않는 곳으로 달아난다. 아주 머얼리-. 대신 살아 있는 물이자 해파리를 의미하는 책의 제목 ’아구아 비바‘처럼 흘러가는 듯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떤 행동을 할 때 뇌의 특정 부분이 붉은빛으로 활성화된 사진을 본 적이 있으신지? 리스펙토르의 글을 읽고 있으면 지금까지 책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부분에 불이 들어오는 기분이다.

『그림자와 새벽(윤경희 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내용의 몰이해 너머에서 이처럼 가없이 율동하는 필치에 현혹되는 데서도, 줄거리 모르게 오로지 리듬으로 확장하는 시를 상상하는 데서도, 독서의 희열은 있다.” 

150페이지 정도의 작은 책이지만 새로운 감각으로 하는 독서의 희열이 매우 큰 책이다. 왜 리스펙토르의 팬들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는 평이 있는지 알 것 같다. 


*출판사의 도서 제공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그렇게 나는 무르익은 열매들처럼 무거운 상징들로 이루어진 무거운 삶에 빠져든다. 나는 잘못된 닮은꼴들을 택하지만, 그 선택이 온갖 뒤엉킨 것들을 헤치며 나를 이끌어 준다. - P29

하지만 이 저주받은 한여름의 날들이 내게 포기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나는 의미를 갖는 걸 포기하고, 그러면서 달콤하고 고통스러운 나약함에 사로잡힌다. 둥글고 둥근 형상들이 허공을 지난다. 여름의 열기다. - P38

우리들 각자의 삶에서 뭔가를 잃어버린 순간에―그때 우리가 완수해야 할 임무가 공개되는가? 하지만 나는 어떤 임무도 거부한다. 나는 아무것도 완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살 것이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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