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1 - 1-12장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1
하경택 지음 /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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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랑의 혁명 선언>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창세기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있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 ‘너무 과장 아닌가’했지만 읽어보니 저자의 고백이 맞았다. 그녀는 창세기를 통해 신앙의 근본을 배웠다.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란 책을 읽으며 나 또한 신앙의 가치를 되새겨본다. 창세기는 선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즉 우주를 창조하셨다 라는 선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최초의 인권 선언, 인간과 동식물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소중한 피조세계를 향한 선언이다. 노동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노동이 신성하다는 선언이다. 칼 마르크스가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셀 수도 없는 오래전, 이미 창세기는 노동의 가치를 긍정했다. 얼마나 놀라운지 모른다. 노동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지만 일에 허덕이는 노예 상태의 인간에게 안식하라! 는 선언이다. 이 모든 선언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창세기는 선언이자 사랑고백이다. 연애편지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다. 그 목적이 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땅을 경작하고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노동이자 하나님의 창조질서다. 인간은 에덴동산을 가꿔나가야 했다. 흔히들 상상하듯 에덴동산은 무위도식하는 곳이 아니었다. 게으름뱅이의 땅이 아니었다.(218) 처음부터 노동하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은 그 곳에서 노동해야 했다. 수많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기 위해 돌아다녔고 가지치기를 해야 했으며 경작도 해야 했다. 지금처럼 노동이 고되진 않았겠으나 탱자탱자 놀고만 있지는 않았을게다.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다. 왜 노동을 하느냐? 당시 설화 ‘에누마 엘리쉬’를 살펴보면, 인간들은 신들이 하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인간은 신의 대체용품이었던 것이다. 그 신화에 따르면, 하나의 용품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부품 조각 같은 존재였다. 인간은 신을 위해 존재했다. 구약성경은 이 신화와 정확히 반대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일하신다. 인간을 위해 세계를 창조하셨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창조된 세계에서 자신의 삶의 영위를 위해 일한다. (219) 이 얼마나 놀라운 인권선언인지 모른다. ‘에누마 엘리쉬’를 비롯, 고대 근동 설화를 보면 하나의 ‘왕’을 위해 수없이 많은 인간들은 희생당한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기계부품이었다. 비존재였다. 칼 마르크스의 개념을 빌리자면 ‘노동의 소외’가 일어났다. 그런데 성경은 아니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존귀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세계를 창조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지, 최초의 인권선언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일에 빠져있다 보면 중간에 멈추고 쉬는 것이 그렇게 불안할 수 없다. 계속 일을 해야 할 것 같고, 쉬면 그르칠 것 같다. 현대사회를 보면 일중독자들이 곳곳에서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빠져나오질 못한다. 창세기는 이러한 사회풍조에 일침을 가한다. “안식하라!”. 하나님께서 쉬셨다. 여섯째 날까지 창조를 하신 하나님은 일곱째 날 안식하신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었고 쉬어야 함을 하나님은 정확히 아셨다. 그 시간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다. 열심히 노동하고 경작하지만, 사람은 피조물이고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라는 것을.(225-226) 쉬지 않으면 누가 가장 피해를 입게 될까? 당시는 자유가 없던 가축과 약자들이었다. 주인이 쉬어야 종들도 쉴 수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갑과 을의 사회’, 한국사회에서 을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귀한 형상인데 말이다. 이 때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인간들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다. 전태일이 분신하면서까지 처절히 외쳤던, “일요일은 쉬게 하라”는 말을 떠올려 볼 때, 어쩌면 이 시대에 안식이란, 저항일 수 있겠다.  

노동과 안식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의 초록불을 가리키는 상징이었다. 초록불이 빨간불로 바뀐다. 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거스르며 모든 것을 깨뜨렸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졌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졌다. 사람과 피조세계의 존중이 깨졌고 노동의 신성함이 깨졌다. 하지만 창세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저주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은 뱀과 땅이었다. 하나님께서 입히신 ‘가죽옷’, <쿠토넷>은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얼기설기 만들어 입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와 대조된다. 그렇게 인간은 타락을 하고 하나님 앞에 악을 저지르지만, 그것을 덮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 프레드릭 뷰크너는 흥미로운 통찰로 이를 표현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몰아내셨다는 말은, 분명 아담과 하와가 우리처럼 하나님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마자 줄행랑쳤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내쫓고 싶었다면 에덴을 나온 이후 가는 곳마다 우리를 뒤쫓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통쾌한 희망 사전>” <쿠토넷>은 인류의 타락 이후에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총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이 너무도 극심해졌다. 자칫 하나님의 은총을 가릴 정도로 말이다. ‘마음의 생각하는 바 모든 계획이 항상 오직 악할 뿐이었다.(130, 저자 사역)“. ’ 모든‘.’항상‘,’오직‘ 강조 부사가 세 번이나 들어간다. 얼마나 세상에 악함이 가득했는지를 보여준다. 언어로 형용이 안될 정도로,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을지 모른다. 근데 이 모습을 보는 하나님의 상태가 이상하다. ’ 하나님께서 한탄하신다니(130, 저자 사역)‘ 하나님의 무감동성을 주장하는 ’정통신학‘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하지만 구약성서에는 이러한 ’ 신인동감론적‘ 표현이 가득하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예언자들>을 읽어보면, 월터 브루거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파토스(phatos), 정념이 얼마나 강렬한지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무감각하고 무감정하신 분이 아니다. 우리의 악을 보고 분개하시며, 아픔을 보고 마음 저려하시는 분이다. 후회와 통탄이라니, 너무도 인간적이지만 그분은 그만큼 우리에게 동감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의 말대로 ”하나님의 전능이란 자기를 온전히 내어줌으로써 전능“이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부요함과 영광으로 개방하는 풍성한 사랑으로 재정의하는데, 그분께서 자기의 마음을 온전히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보며 우리에게 통찰을 주는 부분이 또 하나 있다. 하나님은 노아 개인이나 인류만을 위한 언약을 맺지 않으셨다. 노아와 함께 한 생물들이 대표하는 모든 피조물과의 언약이었다.(148) 하나님의 사랑범위는 인간에게 한정되지 않고 모든 피조물에게 열려 있다. 사실, 이것이 창세기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이기도하다. 그동안 전통 교리는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구속신학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 경향이 있었다. 신학의 대상이 오로지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를 면밀히 읽다 보면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 으뜸이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피조세계를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말이 아니었다. 피조세계와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라, 선한 목자와 왕의 모습으로 다스려라, 이 말이었다 그래서 강사문 교수는 “‘땅을 정복하라’는 부분을 ‘땅을 가꾸어라’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창세기의 이 말씀은 피조세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많은 교회들과 현대 사회의 모습에 일침을 가한다. 대기 오염이 심해지면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언약의 상징인 무지개(케쉐트)(147-150)이 점점 보이지 않는 것은 괜한 우려일까? 그런 면에서 창세기는 인류 최초의 환경선언문이기도 하다. 창세기를 관통하는 이 신학은 ‘보혈과 초록이 보색 대비를 이룸이 온전한 신앙임을’ 보여준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 수 있었고 많은 후손들을 낳았다. 창세기에는 그 계보가 나온다. 그리고 계보의 마지막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흔히들 알다시피 ‘믿음의 조상’이라 불린다. 이를 조금 바꿔서 ‘선교의 조상’으로 바꿔도 무관할 듯하다. 구약성서 전체에 하나님의 선교 계획이 나타나는데, 아브라함부터 본격적이다. <하나님의 선교>를 쓴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아브라함의 삶은 선교적 삶이라고 정의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한 목적은 아브라함만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후예들, 이스라엘은 열방을 위한 구원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 속에 있는 구속의 대상은 오직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한 열방이다.(257)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은 오늘날 교회의 존재 이유를 말해준다. 내부 공동체만 오순도순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교회의 목적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랑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러셨듯이 말이다.  

첫 부분에도 말했듯 창세기는 선언이다. 노동에 대한 선언, 선교에 대한 선언, 피조세계의 소중함을 향한 선언, 인권을 향한 선언이다. 내용만 들으면 혁명이라도 일으킬 것 같다. 맞다. 하지만 폭력의 혁명이 아닌, 사랑의 혁명이다. 온 피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절절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러브레터”인 것이다. 사랑 없고 강퍅한 이 시대에 창세기는 사랑의 편지로 다시 읽힌다. 더불어 고대의 한 문서에 불과할 수 있는 창세기가 오늘날에도 이렇게 적실성 있게 들려질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과 저자의 열심인 수고 덕분일 것이다. 창세기를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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