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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by 에쿠니 가오리
왜 이리 뜸을 들였을까.
나는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뱅뱅 돌기 일 수 였다.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1982년 가을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100년에 걸쳐 '언뜻 보면 행복한' 야나기시마 일가의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은 무시한 채
어느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로 전개된다.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누구나 부여받게 되는
가족 내 역할, 엄마, 아빠, 이모, 삼촌... 이런 역할에 따라 전개되는 것도 아닌,
그저 '나'를 중심으로 한 어느 계절의 이야기가 뒤죽박죽 펼쳐진다.
'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는 매번 바뀐다.
상당히 불친절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담담하고 무심한 듯, 그러나
감성적이고 섬세한 언어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하나하나 이해하고 싶었다.
"중요한 건 모두 늘 그곳에 있으면서 말소리며 웃음소리며 음악이며 때때로 업무 이야기에 따르는 긴박감 따위가 숨 쉬듯 가깝게 느껴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는 거다."
- 1982년 가을
"때는 저녁과 밤 사이. 도서실은 불을 켜지 않으면 어둡지만 불을 켜 버리면 금세 공기 중의 무언가가 손상된다.
예를 들어 늦여름의 기운이. 뒤뜰의 나무도 낮만큼 또렷이 보이지 않지만 밤만큼 캄캄한 어둠에 잠기지도 않는다."
- 1987년 여름
"그날 이후 나는 전보다 더 순종적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울어봤자 나만 비참해질 뿐이므로.
감정에 뚜껑을 덮는 법을 깨우쳤는지도 모른다."
- 1963년 겨울
"내 눈은 이미 기능을 거의 멈추었고, 내 피부는 더위도 추위도 느끼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재미난 것은 공포심 또한 기능을 멈춘 것 같다는 점이다.
내게는 이제 두려울 게 없다. 방에 누가 들어오든 상관없다. 가족이든 남이든 마찬가지다.
내 인생과 그들의 인생은 결정적으로 가로막혀버리고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다.
내 육신은 여기 이렇게 누워 있지만 아마도 내 정신은 이미 유령일 것이다."
- 2000년 초겨울
시간의 순서에 따라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지금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 확인하며,
그렇게 읽을 수도 있었으나,
그저 나열된 순으로 읽어나갔던 나는 종종 그 흐름을 놓치기 일 수 였다.
그러나 어찌 보면 전체적인 줄거리 따위란 이 책에서는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네의 인생을 하나의 줄거리로 요약할 수 있을까.
지난 날을 회상하며, 오늘까지의 나의 인생을 몇 줄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까.
인물 검색에 등장하는 프로필 처럼,
그저 나를 요약할 수 있는 것은 생년월일, 출신학교, 가족관계 등 이 정도일 뿐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작가의 불친절한 전개처럼,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느 계절의 순간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야나기시마 일가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많은 사람들의 많은 어느 순간의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 중에서 내가 몇 번이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부분은
1963년 겨울 유리의 이야기였다.
절대 바람 같은 건 피우지 않는다고 말하며,
날 필요로 해주는 사람이라 여겼던 남편, 시댁으로 시집와
계절이 바뀜과 동시에,
불량품이 반품되듯 이혼이라는 이름으로 친정집으로 보내졌던 6개월 간의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씁쓸하고, 안타깝게만 느껴졌다.
밝고 쾌활했던,
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 껏 부풀었던 유리는
말을 하는 대신 허밍을 익히고, 예쁜 프랑스 인형처럼 점점 순종적으로 변해갔다.
주부다운 짧은 파마머리, 촌스러운 옷, 10킬로 가까이 빠져나가버린 가냘픈 몸과 생기 없는 눈.
결국에는 불량품 취급까지 당해야 했던 유리의 이야기는
담담하게 전개되고 있으나,
비참한 니진스키 라는 말처럼 나에게는 슬프게 다가왔다.
누구나 한 두 가지씩 가슴 속에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산다.
가족이란 그런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
또한 그런 가족에게는 공통된 이야기가 존재하기도 한다.
'라이스에는 소금을' 처럼
'라이스에는 소금을' 은 2세대인 키쿠노, 유리, 기리노스케에게 통하는 일종의 암호이다.
'성인이 되어 다행이다. 자유 만세'와 같은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지만,
또 한 편으로는 혼자인 공간,
그런 가족이라는 공간 속에 펼쳐지는 나에 대한 이야기.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