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편에서 이리가 ㅣ 오늘의 젊은 작가 53
윤강은 지음 / 민음사 / 2025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 생명도감에 기록된 식물 중 하나인 복숭아는 여타 낯선 생명체와는 달리 유안이 아는 것이 되었다. 그야말로 실체 있는 생명체가 되었다. 살아있었던, 혹은 살아 있는 것이 되었다. 133p
이 책은 기후위기로 인해 눈으로 덮여버린 한반도의 미래 상황을 그린다. 압록강지역, 한강지역, 온실지역으로 나뉜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세계이며 각 지역에 사는 청년들이 오고가며,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서 벌어진 상황 가운데서 오고가는 소통과 교감을 통해 의미를 찾아나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다섯명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온실구역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짐꾼일을 하며 사는 유안, 한강구역에서 태어나서 한강구역에서 압록강지대를 왔다갔다 하며 짐꾼으로 사는 화린, 한강구역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복수감에 군인으로 살기로 결정하였으나 자신에게 없는 ‘군인으로의 태’를 갖추고자 노력하는 기주, 대륙에서 태어났고 대륙군 특수부대에서 교육받고 자랐으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환멸을 느껴 탈출하였으나 반도군에 잡혔다가 반도군에 일부가 된 백건, ‘대의’를 찾아 대륙군으로 전향한 한강구역에서 기주와 화린과 함께 자란 태하. 이 다섯사람들의 소통과 대화를 통하여 새로운 희망을 얻어나가는 그림을 발견한다.
이 책에서 말한다고 느껴지는 것은 크게 두가지 부분이었다.
살아남는 것, 그리고 의미가 되는 것.
소설 속 세계는 기후변화로 인해 눈으로 덮인 세계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아름다운 미래따윈 없고 척박한 땅이 되었다. 생산도 온실구역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 우선시 되는 것은 생존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 그것이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그래서 태하는 대륙군으로 넘어갔고, 그래서 기주와 백건은 전쟁이 발발한 뒤 한강구역으로 도망쳤다. 살아남기위해 한군데로 모였고 그곳이 생산구역, 한강구역, 압록강 구역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 어떤 존재로 살것인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살것인가? 라는 질문이 뒤이어 등장한다.
‘오직 진군하는 자에게만 미래가 있다.’ 그러니 이런 결말은 너무나 이상했다. 부당했다. 부당하게 살아남았다.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진군하지 않고 도망친 자가 살아남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53p
기주는 생존만을 생각했다면 굳이 압록강 구역이 아닌 한강구역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으면 됐을 것이다. 백건은 목숨을 내건 무한 경쟁의 환경에서 벗어나 도망쳤다가 자기가 배워온 가치와 다른 결말을 맞이하여 삶의 이유를 생각하며 찾는다. 유안도 도진이 말했던 이야기들을 되뇌이며 그 의미를 다시 새기고 화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의미가 되기 시작한다.
백건을 본 기주가 그를 살리고자 노력했던 것은 그의 ‘군인다움’도 있었겠지만 이방인이라는 존재로서의 동질감을 느껴서 아니었을까? 유안이 화린을 받아들인 것은 자기와 같은 짐꾼이며 개를 지극히 아끼는 모습에서 동질감을 찾아서 아니었을까? 백건이 태하를 우연히 마주쳤을때 사살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자기와 같은 선택을 했다는 동질감을 느껴서 아니었을까? 너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동질감. 그리고 그 '같다는 느낌'에서 오는 상대방을 향한 애정과 끈끈함. 그것이 인간사이의 진정한 연결의 매개체가 되고 서로를 묶어주는 끈이 된다. 서로에게 의미가 된다.
생존에 유리한 방식은 집단생활이지만 그 집단이 초대형집단이 되어서 부락의 단위를 넘어선 국가의 단위까지 가게 된다면 오히려 국가를 위한 선택은 개인의, 혹은 소집단의 희생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생존을 위하여 점점 집단의 크기를 줄여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욕망에 휩싸일수 밖에 없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압록강구역을 위한 지원을 단념한 한강구역이나, 나름대로의 살길을 찾은 온실구역이 그 예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좋은 말이지만, 그 ‘우리’가 누구까지의 우리인지, 어디까지의 우리인지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온다.
온실구역, 한강구역과 같이 이익관계로 모인 ‘우리’도 있지만
말할 수 없는 동질감, 사랑, 그것으로 서로에게 새로운 의미가 되어주기위한 ‘우리’인 유안, 화린, 기주, 백건, 태하도 존재했다.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주는 것, 그리고 서로를 기억해주는 것으로 그 관계는, 그리고 그 존재는 생명도감에 나와있는 복숭아와 같이 죽은 것이 아닌 살아있는 것이 된다.
점점 더 인간관계가 멀어지고 그래서 기상이상으로 온세계가 눈 덮인 것같은 사람 사이의 쌀쌀함이 느껴지는 시대에 산다.
나는 오늘 누구에게 어떤 의미로 살고 있는지.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의미를 심어주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눈보라가 치는 잘 안보이는 지금 저편에서 어떤 이리는 오늘도 울고있다. 그 아이를 찾으러 나도 저편으로 걸어가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