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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의 세계사 - 인류의 문명을 바꾼 7가지 금속 이야기
김동환.배석 지음 / 다산에듀 / 2015년 2월
평점 :
언젠가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청취자 사연에 담당 작가가 라디오에 직접 출연하여 농담을 섞어 이렇게 답했다.
"라디오 작가는 한 분야의 깊이 있는 지식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얇고 폭넓은 지식이 더 유용해요.(웃음) 마치 지구를 덮을 정도의 얇고 넓은 습자지 같은 지식일수록 좋아요.(웃음)"라고.
우스갯소리지만 '풍부한 상식'을 라디오 작가의 주요 요건으로 말한 것이리라.
내가 전기공학과에 처음 입학했을 때 느꼈던 학과에 대한 자긍심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장 주위를 둘러보면 전기없이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금속의 세계사'라는 이 책을 보고 나니 전기뿐만 아니다. 금속이 없으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전기마저도 만들고 쓸 수 없다. 금속이 인류 역사와 함께 한지 오래돼서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이 책은 또 라디오 작가들에게 좋은 먹이가 될만한 책이다. 금속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정말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쏟아내고 있다. 신화와 성경에서 시작하여 역사, 고고학, 환경문제, 경제문제, 스포츠, 영화, 화학, 물리학 등 다양한 보따리를 풀어주고 있다. 더구나 재미있다. 그렇다고 깊이나 전문성이 천박한 것도 아니다. 라디오 작가에겐 금상첨화다.
이 책에서 시간대별로 순서를 지키는 것은 인류가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한 금속의 순서 밖엔 없다. 구리부터 납, 은, 금, 주석, 철, 수은을 각 장으로 하여 순서대로 배치하고 각 금속과 깊이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재미있게 이야기 해 준다.
가장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이라는 명확한 증거에 근거하여 최초 사용 시기를 추적해가는 점은 저자들이 갖추고 있는 학자적 소양이다. 반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풀어가는 것은 라디오 작가적 기질이라고 하겠다. 이런 기질을 숨기고 연구원을 하고 있으니 누구보다 저자 본인들이 더 근질거릴 것 같다.
- 비소에 열을 가하게 되면 독성 증기가 나와 저승길로 이어진 무지개다리를 놓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후 위험하지 않은 주석을 구리 합금의 재료로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150쪽)
- 나폴레옹은 11월 21일, '베를린 칙령'을 선포했다. 이는 중2병으로 마음 복잡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학생들이 사회 시간에 배우는 세계사 용어 '대륙봉쇄령'의 또 다른 명칭이다. (162쪽)
이쯤되면 누가 라디오 작가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기술하는 역사책은 없을 것이다. 사실 제목을 보고 문체가 논문처럼 딱딱하고 약간은 지루할 것이라고 예상 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1장 구리에서 지적 풍요로움을 느끼며 사치를 누렸다면 2장인 납에 가서는 깜짝 놀랄만한 생활상식이 덮쳐온다. 납의 맛이 달달하다니. 어린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이 부분을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정복에 실패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주석 때문이었고, 거의 동시에 남극탐험을 시작한 아문센과 스콧의 운명을 가른 것 역시 주석 때문이었다는 것. 또 수세기에 걸쳐 어떤 연금술사도 만들지 못했던 금을 - 물론 가능성뿐이지만 - 수은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영화 '두사부일체', '말죽거리 잔혹사'의 모티브와 배경이었던 상문고등학교.
내 모교다.
그 문제의 사립이었던 상문고 재학시절 화학선생님의 성함이 신수호선생님이셨다. 학기 초 첫 수업에서 영어식으로 당신 이름을 '수호 신'이라고 소개하시고는 '내가 너희들의 화학의 수호신이 되겠다. 시키는대로만 따라와라.'하셨다. 그래서일까 나는 주기율표를 죄다 외우고 과목 중에 화학만큼은 자신만만했었다.
그랬지만 수은으로 금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납이 달달해서 아이들이 계속 입에 물고 빨다가 쉽게 삼킬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이 외에도 시간여행을 하게 해주는 고고학적 유물 발굴 이야기, 신라금관이 갖는 세계적 의미, 올림픽 금메달 이야기, 수은 중독과 축적에 관한 구체적인 사건 등 많은 이야기들이 시간 순서와 무관하게 단지 하나의 금속을 주제로 자유롭게 펼쳐진다.
일전에 읽었던 진취적 관점을 가진 '보스포루스 과학사'라는 책처럼 금속 중심의 과학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역사책으로만 짐작했었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와 상식이 가득한 인류사 전문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에필로그를 통해 이 책의 주제와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 책을 통해 문명의 탄생부터 오늘에 이르는 금속의 세계사를 알고, 주변을 치밀하게 둘러싼 금속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인간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도 함께 알게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우리 삶 속 금속에 조금 더 주목할 수 있다면, 앞으로 금속과 어떤 역사를 만들어 나갈지 조금이나마 고민할 계기를 마련한다면, 더할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261쪽)
책을 덮고 나면 저자들의 이러한 목적이 달성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과 역사를 이토록 재미있게 써줘서 고맙다.
얼마 전 TV에서 영화감독 박찬욱감독을 인터뷰했었다. 힘들게 작품을 만든 후 어느 순간이 가장 보람차고 행복하냐고 묻는 질문에 '아내에게 칭찬받았을 때'라고 해서 기억이 남는다. 세계적인 거장도 소박한 가족의 품안에서 행복을 느낀다니 일반인도 공감 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운 것이리라. 그래서일까 애처가인 듯 보이는 이 두 저자도 감사의 글을 통해 아내에 대한 인사를 잊지 않는다.
- 끝으로 원고 집필 동안 현명한 조언과 다양한 자료 수집으로 책을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준 평생의 동료이며, 친구이자, 선생님이기도 한 사랑하는 아내 김윤정에게 한없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광화문에서. 김동환. (278쪽)
- 끝으로 사랑하는 두 아들 지훈이와 진우의 엄마이자 사랑하는 아내인 박미숙에게 한없이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안산에서. 배석 (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