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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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일 년에 걸쳐 읽었다. 두꺼운 책도 아닌데 단숨에 읽히는 책도 아니었다. 부제처럼 편지로 씌어진 소설이라 오히려 긴 호흡으로 읽으면 좋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일 년 동안 읽었다는 건 좀ㅋㅋㅋ 그냥 이제 직장인 되니까 책에 시간 내기가 쉽지 않은 거 같다. 게다가 이제 데스크톱을 쓰니 책상 위에 독서대 올려놓고 책 읽던 시절 보다 책을 안 읽게 된다. 이렇게 더디게 읽었지만 그래도 책은 좋았다.

요즘 나라 망해가는 소식이 끊임 없이 들려오는데 그래서인지 자꾸 이런 내용의 책을 찾게 되는 거 같다. 다같이 힘든 시절 견디고 버텨서 희망을 찾는 이야기..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견디고 버틴다고 희망이 저절로 찾아오는 건 아닌 거 같다. 책의 많은 분량은 아이다가 사비에르에게 쓴 편지이고 그 내용은 대부분 따스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곳곳에 등장하는 사비에르의 짧은 메모들은 인용구들과 함께 냉철한 저항정신이 담긴 내용들이 많다. 책을 찬찬히 읽으면서 아이다가 쓴 편지들은 내가 잃은 것들처럼 보였고 사비에르의 메모들은 내가 회피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나 이렇게 비겁한 사람? 흑화된 사람? 요즘 그렇다.. 희망이 없다. 능력껏 이리저리 재밌게 살아보려 하지만 어떤 충만함이나 살아있음보다 일상의 기본값이 무기력인 거 같다. 시험 준비하던 재작년과 처음 일 시작한 작년에 비하면 토할 거 같은 느낌, 정신적 린치를 당하는 느낌 그런 극단적인 고통은 없어서 그때보다 숨 쉬고 살만하지만 그때 너무 흑화되어서 회복이 잘 안 된 건가. 세상과 사람과 직장과 일과 돈과 굴레가 너무 싫어서 차라리 세상이 더 빨리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곧잘 든다. 나 어떡하지... 더 나은 밝은 미래를 꿈꾸고 싶은데... 의욕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매일 올라오는 각종 뉴스와 통계들을 보면 나는 그나마 나은 상황인 거 같은데... 나는 그만두고 싶고 탈출하고 싶은데 나은 상황이라니....

"아니, 우리는 누군가를 따라잡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 밤이나 낮이나, 동료 인간들과 함께, 모든 인간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 행렬이 앞뒤로 너무 길어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뒤에 선 사람들이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점점 더 드물게 만나고, 점점 더 드물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 32)

얼마 후, 손 그리는 법을 설명한 책을 발견하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살펴봤어요. 그리고 사기로 결정했죠. 마치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 같았어요. 모든 이야기는 또한 손의 이야기니까. 집어 들기, 균형 잡기, 가리키기, 합치기, 주무르기, 헤쳐 나가기, 쓰다듬기, 자는 동안 내려놓기, 자르기, 먹기, 닦기, 연주하기, 긁기, 쥐기, 벗기기, 짜기, 방아쇠 당기기, 접기, 책의 각 페이지마다 서로 다른 행위를 하고 있는 손 그림이 정교하기 그려져 있어요. 여기 하나 보여줄게요.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요. 지금 당신을 만져 보고 싶어하는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어요. 너무 오래 당신을 만져 보지 못해 이젠 쓸모없이 되어 버린 손처럼 보이네요. (p. 88)

책에서 따스함과 희망이 느껴지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때문인가. 사비에르는 이중종신형을 선고 받고 수감중이며, 아이다는 위압적인 세상에서 약제사로 일하며 주변에서 본 것들, 들은 것들을 편지로 사비에르에게 전한다. 아이다가 쓴 편지에는 사랑과 사려깊음과 따스함이 담겨있다. 사비에르를 향한 사랑, 이웃들을 생각하는 사려깊음, 몸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따스함... 모두 내게 부족한 것들... 이것들을 내 안에 키우기엔 아직 이 각자도생의 한국 땅이 치러야 할 업보가 많은 거 같다. 나는 눈 앞의 좋은 것들, 아름다운 것들을 두고도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미래에 대해.. 오지도 않은 미래를 왜그리 잿빛으로 보는 걸까(통계를 보면...~_~) 엄마는 부정적인 생각이 삶의 연료가 되기도 했다는데,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부정적인 생각들은 이전에 했던 단순히 잘 안 될 거 같다는 생각과는 다르다. 앞으로도 쭉 안 될 거 같다는 느낌... 무엇이 언제 어느 순간 없어질지 모르니 지금 가서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는 생각... 어쩜 좋지.... 사비에르처럼 저항할 의욕은 없으니 아이다처럼 힘든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긍정과 희망과 밝음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연습 해보는 수밖에.....

여기까지 이렇게 우울한 독후감을 썼었는데 갑자기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한 시간 정도 통화하게 되었다. 성격상 사람들이랑 용건 없이 전화하는 일이(그것도 길게 통화하는 일은) 극히 드문데 오랜만에 친구랑 의미없는 말들까지 늘어 놓으며 깔깔 웃고 와 다시 써 놓은 독후감을 읽으니 세상에 웃을 일도 많은데 왜 이리 우울한 글을 썼을까 스스로가 충분히 밝을 수 있는데 너무 부정적이려고, 우울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미래가 답답해 보여도 희망을 찾아 보자. 그런데 혼자 방구석에서 찾지 말고 이리저리 바지런히 움직여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이것저것 접하고 공유하면서 근거 있는 희망을 찾아 확실하게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보자. 아직은 세상이 괜찮고 앞으로 당분간도 내가 우려하는 것보단 언제나 그랬듯이 더 괜찮을 거니까. 정말로 긍정인 사람이 되고 싶어. 긍정!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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