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트 키즈 -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 젊은 날의 자화상
패티 스미스 지음, 박소울 옮김 / 아트북스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로의 방향이 바뀌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모르던 걸 알게 되었다라기 보단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게 됐다. 돈벌이, 주거문제, 소비생활 등등 영화를 꿈꾸던 시절에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끔찍한만큼 이런 생각의 결론은 노답과 우울이다. 현실적인 여건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답이 없고 남들은 어떻게 살까 조금이라도 둘러보면 우울해진다. 나는 내가 시험에 합격하고, 직업이 생겨도 계속 영화를 꿈꾸고 그 속에서 살아갈 줄 알았다. 이렇게 내가 현실의 눈을 금방 뜨게 될 줄 몰랐다. 예전의 내가 그리워졌다. 영화 일을 꿈꿨던 내가 그리운 게 아니라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지내던 시간이 그립다. 그때처럼 ‘어찌어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큰 욕심 없이 주어진 것에 만족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들로 약간의 우울을 느끼며 지내던 중 유튜브 편집자K에서 이 책을 알게 되었다. 편집자K님이 책과 관련된 40문 40답을 하던 중 이 책의 한 대목을 말씀해주셨는데 그 이야기가 귀에 확 꽂혔다.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연애 이야기였는데, 이들은 미술관 티켓을 한 장밖에 살 수 없을만큼 무척 가난했고, 그 때문에 한 명만 전시를 보러 들어가고 다른 한 명은 밖에 기다렸다가, 전시를 보러 들어간 사람이 나오면 나중에 말로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내 안에 다 죽어가던 낭만이 갑자기 불타올랐다. 현실이 시궁창이어도 다른 방식으로 삶을 영유하는 그 낭만. 막상 책에서 직접 본 그 대목은 아름답기보다는 애잔했지만.. 그래도 돈이 없어도 소중한 것들을 이어가는 그 모습이, 주차 미터기 옆에서 담배 피우는 로버트를 전시관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패티의 모습이 내가 잊고 있던 걸 깨워줬다. 연인 관계를 정리한 이후에도 영혼의 친구처럼 지내면서, 패티는 로버트를 생각하며 시를 써주고, 로버트는 패티의 앨범 커버 사진을 찍어주니... 정말 멋진 우정이다.


어떤 날은 미술관에 갔다. 티켓 한 장밖에 살 돈이 없었던 우리는 한 명만 들어가 전시를 보고 나와 어땠는지 이야기해주곤 했다. 어페이스트사이드로 자리를 옮긴 새 휘트니 미술관에 간 날은 내가 들어갈 차례였다. 미안해하며 들어가서 전시를 봤지만, 지금 내 기억 속에는 그날 미술관 건물의 거대한 창 너머로 건너편 주차 미터기에 기대 담배를 피우던 로버트의 모습밖에 남아 있지 않다. 전시를 보고 나와 전철역으로 걸어가던 길에 로버트는 나에게 말했다. “언젠가 우리가 함께 저 미술관에 들어가는 날, 그날은 우리 작품이 전시되어 있을 거야.” (p.69)


책을 읽으면서 가난 속에서도 예술의 열정을 놓지 않는 두 사람의 이야기도 너무 좋았지만, 첼시 호텔에서 다양한 예술가들을 만나 서로 교류하는 모습은 요즘처럼 SNS가 사교의 기반이 되고 코로나 때문에 얼굴 보며 만나기 어려운 시대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아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다른 예술가를 소개해주고, 서로의 전시를 보러가고, 서로의 방에 놀러가고, 함께 작업을 하고... 같은 호텔 건물에서 각자 숙박하며 그런 커뮤니티를 꾸려간다는 게 재밌어 보였다. 또 패티가 예술 작업을 하면서 느끼는 여러 고민들에 대해서도 공감하며 읽었다. 예술의 무용함에 대한 회의감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에 대한 생각들...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려고 앉으면, 베트남 전쟁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바깥세상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노력이 어떤 의미도,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정치적인 운동에 가담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추구하는 바가 세상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또 다른 형태로 관료주의에 영합하는 일이 아닐까 싶은 불안에 휩싸여, 가능하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깨어 있고 정의로운 운동에도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p.91)


그리고 패티가 마약도 전혀 안하고, 예술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청년이라 의외였다. 예술가라면 엄청 자유분방하고 패기로울거라는 나의 선입견이 아직도 남아있나보다. 처음부터 가수를 꿈꿨던 것도 아니고, 랭보를 무척 좋아하며 시를 열심히 쓰는 시인이었는데, 자신이 쓴 시에다가 멜로디를 붙이면서 음악을 시작했다는 게 놀라웠다. 로버트도 그림을 그리다가 우연히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처럼 패티도 큰 야망을 가지고 음악을 한 것이 아니었다. 로버트뿐만 아니라 샘과 같은 주변 사람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예술적 태도를 다져가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예술가에게 고독은 필요하지만 고립은 좋지 않다는 걸, 외골수적인 태도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이야기 속에서 카발은 범죄자다. 슬림을 납치해 자기 은신처에 가둔다. 둘은 사랑에 빠지고, 옥신각신하고, 자기들만의 언어를 만들어 즉흥 시를 읊는다. 즉흥시를 읊으며 둘이 시적 언어에 대해서 논쟁하는 부분을 써 나갈 땐 내가 자신없어 했다. “못하겠어요.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뭐든 내뱉어봐.” 그가 말했다. “즉흥적으로 하면 실수도 안 해.”

“내가 다 망쳐버리면요? 맥을 끊어버리면요?”

“안 그럴 거야.” 그가 말했다. “드럼 치는 것과 같아. 박자를 놓치면, 다른 음악이 나오지.”

이렇듯 단순하게 번갈아 가며 작업하면서 샘은 나에게 즉흥 창작의 비법을 가르쳐주었는데, 그건 일생을 통해 추구하는 바가 되었다. (p.245)


책을 다 읽고나선 앤디 워홀이 궁금해졌다. 로버트는 앤디 워홀을 동경했고 자신의 롤모델으로 삼았지만, 패티는 앤디 워홀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작품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데, 당시 예술가들의 예술가였던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로버트가 폴라로이드로 사진을 시작했다고 하니, 나도 폴라로이드 사진이 찍고 싶어져서, 예전에 사놓고 잊고 있었던 카메라 어플을 오랜만에 사용해봤다. 기대보다 결과물이 마음에 들어서 혜윤이 사진 엄청 찍었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