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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김주영 지음 / 문이당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1월 9일, 파리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은 10시간 이상을 영어(囹圄)의 몸처럼 갑갑하게 지내야 하는 오랜 비행시간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이 시간을 결코 지루하지 않게 보내는 나름의 지혜를 오래 전부터 터득하고 있었다. 원래 등짝 한 면 붙일 곳이 있어도 잠을 잘 잘 수 있는 편이라(이건 정말이지 타고난 복이 아닐 수 없다), 비행기 안에서 미뤘던 잠을 맘껏 때우는 경우도 있었다. 탑승 전날 뜬눈으로 밤을 보낸 뒤, 이륙 전부터 골아 떨어져 비몽사몽의 시간에 몸을 내맡겨두다가, 착륙 직전에야 겨우 눈을 부비며 정신을 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이 결코 편하지가 않다. 식음을 전폐하니 결과적으로 건강 리듬이 깨지기 쉽고, 또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무식한 처사다.
여행의 멋을 여유 있게 즐기면서도 실속 있게 시간을 때우기에는 뭐니뭐니 해도 책을 읽는 일이 가장 좋다. 탑승 기간이 길 때는 수필집이나 시집 같은 짧은 글보다는 장편소설이나 추리소설 같이 레이스가 긴 글이 제격이다. 호흡이 긴 글을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숨에 독파하는 일이다.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하는 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장편소설을 읽은 기억을 되새겨보면 방학 혹은 휴가 중이거나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아니면 여행 중의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일상의 틀을 벗어난 일탈의 시간과 공간들이었다. 그만큼 잡사에 쫓기는 우리들 대부분은 제대로 큰맘 먹기 전에는 소설 한권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비행시간 중에는 큰맘 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소설 읽기의 레이스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다. 하늘에 떠 있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소설과의 만남, 이 바꿀 수 없는 운명의 시간과의 대결에는 늘 집중력 있는 글읽기의 짜릿한 매력이 뒤따른다. 소설은 숨찬 클라이맥스를 거쳐 대단원의 막으로 치닫고, 이즈음 비행기는 약속된 도착지를 향해 마지막 한정된 시간을 질주한다. 소설의 전개와 비행시간의 이 절묘한 어울림 속에서 나는 현실과 가상을 자유롭게 오가는, 저 영원으로 통하는 여백의 공간으로 끝없이 또 끝없이 날아가곤 했다.
나는 인천공항에서 소설책 한 권을 손에 쥐고 비행기에 올랐다. 서점에서 김주영의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를 망설이지 않고 잽싸게 구입했다. 이 책에 붙어있는 'MBC 느낌표 선정도서'라는 딱지가 한눈에 금세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 딱지가 붙은 책은 적어도 2, 30만 부는 기본으로 팔린다고 들었다. 미술 책으로는 고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바로 '느낌표 선정도서'다. 따지고 보면 나는 김주영의 대표작인 『객주』 같은 소설조차 읽은 적이 없는 게으른 독자에 불과했는데,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를 덥석 집어든 것은 이 책이 단순히 '느낌표 선정도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말고 다른 까닭이 나에게 있었다. 나는 김주영에 대한 오랜 시간의 축적으로부터 길어 올린 친근감을 이미 가슴속에 가득 품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신문사에 다니던 시절, 바로 몇 미터 옆 문예지 부서에 가끔씩 나타났던 김주영을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있다. 아주 훤칠한 키에 쾌남인데다 목소리도 신중하면서도 우렁찼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자가 보아도 김주영의 자태는 아주 멋이 있었다. 또한 나에겐 김주영을 둘러싼 문학 이외의 이야기 거리가 한층 재미있었다. 김주영이 미술계의 유명한 여성조각가 G와 연애를 하는 사이라는 소문이었다. 아니 그것은 한낮 헛소문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에게 더욱 큰 흥미 거리는 조각가 G의 젊은 시절 애인이 고향의 집안 형님뻘 되는 K라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K는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아는 너무나 유명한 정치인이었다. K는 원래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 지망생이었다. 180㎝가 훨씬 넘는 키에 정치인으로서 가장 준수한 용모를 가졌던 K는 늘 여유와 베풂이 있는 정치를 원했던 '로맨티스트 정치인'이었다.
소설가 김주영과 조각가 G, 그리고 정치인 K의 조합으로 빚어지는 나만의 상상의 나래는 이 세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의 끄나풀을 통해서도 늘 한 줄기 속의 고구마 넝쿨처럼 언제나 하나의 더미로 수면으로 떠오르곤 했다. 나는 김주영과 K의 수려한 외모, 그리고 외모와 달리 조금은 어눌한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이 마치 형제처럼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대구 경북 문인들의 친목모임인 보리회 회원인 아내가 들려주는 회원 선배 문인 김주영의 말과 행동을 가끔씩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면, 나는 어쩌면 김주영의 문학에 대한 감동보다는 같은 '경상도 보리 문디'의 동질성으로 그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김주영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나'와 '아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나간 소설이다. 이른바 성장소설이다. 가난한 시골 마을의 풍경과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소년의 섬세한 내면을 배경으로 "김주영은 유년기의 아련한 기억을 되살려 담백한, 그러면서도 가슴 뭉클한 수채화 한 편을 그려 놓았다." 그것은 가난으로 찌든 저 아련한 세월의 땟국 속을 헤집는 아름다운 여행이다.
이 소설의 내용과 구성은 아주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에 감동하고 말았다. 나는 참으로 아주 오랜만에 책을 읽던 중, 소설을 읽던 중 가슴이 뭉클해져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이 소설의 무엇에 나는 감동했는가? 그 감동은 바로 나의 이야기, 불러내고 싶은 내 성장기의 추억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이 이렇게 나의 추억과 일치한다고 생각한 것은 이번이 생애 처음이었다. 내 기억으로 소설을 읽고 난 뒤 감동의 눈물을 쏟아낸 것은 『테스』의 죽음을 앞에 한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 한 바가지의 눈물로 베개 깃을 적신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문학의 눈물이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의 운명에 동화되어 퍼낸 눈물이 아니라 나의 운명을 겹쳐두고 퍼낸 눈물이었다.
나는 이 소설의 대사에서 나와 어머니와 형제들의 그 옛날 그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말았다. 사투리가 아주 따스하게 귓전을 울렸다. 그러면서도 그 사투리는 같은 경상도라 하더라도 김주영의 청도와 나의 선산(구미)은 엑센트와 억양의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공동체 문화란 얼핏 모두 같은 것 같지만 그 속에서도 다른 것이 있다. 어떨 때는 산봉우리 하나, 강줄기 하나의 경계에 따라 말의 차이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 미세한 차이는 소믈리에의 혀의 감각만큼이나 예민해야 알아차릴 수 있다. 모노톤인 듯 보이지만 이 세상의 모든 색이 살아있는 듯한 보나르의 화사한 화면과도 같은 풍요로운 뉘앙스, 이런 맛을 같은 사투리 내에서도 서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김주영의 사투리는 내가 성장하며 사용했던 사투리와 어느 면에서는 완벽하게 일치했고, 또 어느 면에서는 완벽하게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 종이 한 장 무게와 같은 차이를 한껏 즐겼다.
김주영의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이 소설이 나를 울린 정체는,다시 곰곰이 돌이켜 보건대, 시골 정서와 농촌 정서에의 진하고 진한 동질감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정서는 내 어린 시절의 풍경이요, 땅과 공기와 사람의 냄새가 아니던가. 쓰러져가는 초가집 그러나 양지바른 남향집, 근대화 과정 속에서도 프리 모던의 삶의 원초성과 건강함이 살아 숨쉬던 곳, 그 곳의 지난한 삶과 각각 한편들의 서로 다른 감동적인 생의 드라마들…. 텔레비전 드라마 「옥이 이모」나「형제의 강」에서 눈시울을 적시며 대리 체험했던,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여행. 김주영의 소설은 어느 날 유럽 여행길에서 문득 나를 지구 반대편의 저 풍요한 추억 여행으로 안내했던 것이다.
모든 흘러간 과거는 아름답다. 흘러간 어린 시절의 추억은 더군다나 아름답다. 가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면 심지어 가난이나 불행조차도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 오늘의 풍요보다는 어린 시절의 그 결핍이 더더욱 우리의 삶을 빛나게 했었다는 느낌이 들 때조차도 있다. 그 어린 시절이 비록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추악하고 어둑신한 도회지의 뒷골목이나 변두리가 아니라 햇빛 찬란하게 비치는 농촌에서 흘러간 것이라면 그것은 돌연 광채로 뒤덮인 기억들의 보물창고 같아 보이는 때가 있게 마련이다. (김화영 산문집, 『바람을 담는 집』중에서)
김주영의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이 소설의 행간을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가만히 속삭였다. 나의 흘러간 어린 시절은 아름다웠다. 결핍 속에서도 삶은 늘 빛나고 있었다. 나에게도 광채로 뒤덮인 기억들의 보물창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