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 - 세상과 사람과 미디어에 관한 조이여울의 기록
조이여울 지음 / 미디어일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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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뜨겁게 보고 차갑게 쓴다>를 읽으며 떠오른 두 풍경


<풍경 하나)


하루 종일 가을비가 내렸다.

소리도 없이 줄기차게 내리는 비.

비오는 풍경 속에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다.

기와지붕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지는 빗소리,

마당에서 올라오는 흙냄새,

축축하게 젖어드는 돌담,

창호지에 비치는 반투명의 어둑한 빛,

비를 피해 달아나는 작고 어린 생명들...

이런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새 비는 내 안에서 내려

가슴은 축축이 젖어 둥글어지고 무너져 열린다.


이 글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글이 내 안에 와서 가만히 나를 적시고

나를 조용히 무너져 열리게 했다.


<풍경 둘>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져 아궁이에 불을 넣는다.

불을 때면 불이 어떻게 붙고, 타오르고, 사그라지는지 보게 된다.

잘 마른 나무와 젖은 나무,

낙엽송과 참나무,

자잘한 나무와 굵은 나무가 타는 모습은 제각각 다르다.

그런데, 어떤 나무든 가장 격렬하게 타오를 때는 불꽃이 없다.

불이 완전히 익으면 불은 마치 정지된 것 같다.

아주 격렬한데 고요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에 나오는 숲의 분노를 보는 것 같다.

숲의 분노는 거대한 포효로 나타나지 않는다.

분노는 깊은 고요함으로 나타난다.

진정한 분노가 무언지 보는 순간이다.


이 글이 그랬다.

그가 다루는 사건이나 상황은 뜨겁고 격렬하고 아픈데,

그것을 내놓는 언어는 이상한 평온한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 평정이 가장 격렬할 때 고요한,

가장 타오를 때 멈춘 것 같은

불꽃 얼음 ‘잉걸’처럼 느껴졌다


2


이것은 거의 직관적으로 온 느낌들이다.

그 느낌의 정체를 설명하자면 그의 글이 지닌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우선 그의 글에는 놀랍게도(!) 자의식이 없다.

대부분의 저널리스들의 글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자의식,

‘나의 글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자의식, 일종의 권력욕이 그의 글에는 없다.

그 어떤 글보다 자의식이 넘쳐날 수 밖에 없어 보이는 사안들을 다루는 그의 글에 자의식이 없다! 그의 글은 자의식을 넘어가 있다. 그래서 비처럼 스며든다.

자의식 없는 글은 오랜 숙련 끝에 다다르는 대가들의 글에서 만나게 되는 귀한 성취다. 삼십대의 그가 자의식을 넘어선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일종의 경이다! 쉽지 않은 자기단련과 성찰의 경지다.


무엇보다 그의 글에는 객관성을 가장한 객관이 아닌, ‘진정한 객관성의 힘’이 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가능한 한 존재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마치 그 존재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낯설고 특수하고 불편한 어떤 것들에 대해 대부분의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 자기 방어를 한다. ‘무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다. 내 일이 아니라 특수한 존재들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우리를 설득해 내는 것은 강한 자기 주장이 아니라 바로 ‘진정한 객관성의 힘’인 것이다. 이 힘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깊이 있게 구체적으로 오래 공부한 자가 얻는 힘이고,

자의식을 넘어서 대상과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간 자의 힘이고,

자신의 한계를 명료히 알면서 깊은 통찰에 이른, 잘 벼린 지성의 힘이다.


이런 힘은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을 때 단련될 수 있는, 자기 수련에서 나올 것이다.

이 ‘객관성의 힘’은 ‘성적 소수자’나 ‘집 나온 십대 소녀’가 내 앞에 와서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공감을 불러낸다. 겉으로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것 같아도 다 읽고 나면 그 안에 따뜻함과 희망이 있다. 잔잔하면서도 큰 힘이다. 격렬한 고요함, 불의 얼음 ‘잉걸’이다.


객관의 미덕은 이상적 저널리스트의 미덕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이것에 익숙지 않다. 많은 글에는 은연중에 ‘좋고’ ‘싫음’이 드러난다. 많은 저널리스트의 글은 마치 자기 회사나 집안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편 가르기’를 한다. 자기 시선을 일방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니 사태의 진상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객관성을 가장한 자기 이념의 설파인 글들  많다. 우리 사회의 많은 지식인은 마치 자신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절대적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듯, 자신이 세상을 떠난 신의 위치에 있는 듯한 자세로 글을 쓴다. 그런 글은 객관성의 가면을 쓴 자기 주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떤 지식인의 글은 정교하고 잘 다듬어진 문체로 유명하고, 그의 글이 갖는 흡인력은 대단하지만 다 읽고 나면 칙칙하고 허무적이다. 객관적인 것 같지만 대상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자신의 허무주의를 설파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 그의 객관적 태도 속에는 대상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나 애정을 보기 어렵다.

자신의 가치 판단을 명확히 하면서 대상을 다각적으로 깊이 바라보는 ‘진정한 객관성의 힘’은 웬만해서는 갖추기 힘든, 특히 복잡한 사회문제를 다룰 때는 더더욱 어려운, 뛰어난 미덕이다.  


그의 글이 갖는 또 다른 시대적 의미가 있다. 사회적으로 보면 우리의 70, 80년대는 누구나 어느 편에 들어가서 싸워야 하는 시대, 격렬하게 치고받아야만 하는 시대였다. 그의 글은 그런 시대의 한계에서 벗어난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글이다. ‘냉철한 내면적 자기성찰’의 글이다. 대부분의 조직이나 지식인이 아직도 치고받고 싸우거나 그 시절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철한 성찰적 글들이 힘을 갖지 못한다. 이게 계속되면 그 사회는 망한다.


그의 글은 글에 대한 신뢰를 자꾸 잃어가는, 글이 뭘까 자꾸 회의하게 되는 내게 여전히 글이 주는 힘을 보여준다. ‘쓴다’는 행위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그것도 깊이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3


마지막으로 그의 글에 꽂아주는

공상 소설 같은 상상 하나!


‘십대들이 주도한 3.1운동’과

‘제주 해녀공동체의 역사와 삶’에 대한 발굴은

신선하고 힘이 있었다.

그 글들은 이상한 설렘과 상상력 같은 것으로 온다.


십대들과 그 십대를 닮은 할머니들이 신나게 벌이는 연대.

세상을 많이 겪어서,

정직하게 절망해서 그 절망을 넘어 선,

삶이 비극이라는 것을 이미 깊이 알아서 내적 평화에 도달한,

분노든 뭐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다시 십대처럼 철없는 싱싱한 할머니들과 

삶 자체로 천둥벌거숭이 십대들이 같이 뭔가를 하고, 놀 수 있는!


그런 근거도 없는

철없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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