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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관하여 ㅣ 정암고전총서 3
플로티누스 지음, 송유레 옮김 / 아카넷 / 2024년 11월
평점 :
감동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멋진 번역이며, 세심하고 꼼꼼하며, 깊이있고 밀도높다. 주석은 엄청난 공이 들어갔음이 엿보이고, 해설은 본질을 꿰뚫는다. 한 명의 학생으로서 너무나도 읽어나가는 경험이 즐거운 책이다.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배우게 하는 멋진 책으로 나와 같이 무지하고 미숙한 많은 이들에게 평생의 등불이 될 것 같다.
사소한 오타나 혼동이 약간 있다. 예컨데 주석에서 발렌티누스주의 영지주의를 언급하기 위해 반이단교부들의 저작에서 몇몇 단락을 제시하시는데, 단락번호에 사소한 오타가 있다. 그리고 해설의 주석에서 CNRS의 포르퓌리오스 생애 비판정본을 소개하며 1권에 텍스트와 번역이 있고 2권에 주석논문이 있다고 하시지만, 텍스트와 번역은 1권이 아니라 2권에 있다. 1권은 일종의 색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플로티노스가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인용하는 거의 모든 인용구가 주석에 명시되고 있는데, 다만 몇 문장은 누락되어있다. 예컨데 비의종교에 관계된 격언으로 알려져있고 예를 들어 파우사니아스의 저서에서도 언급되곤 하는 문구가 주석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문헌학적 주해를 의도하신 것은 아닌 것 같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송유레 교수님이 영지주의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시며 이를 일종의 이원론으로 파악하시는데 아마도 예전에 발표하셨던 논문의 관점을 요약하신 것 같다. 그러나 주석에서 유달리 언급되는 영지주의 교파가 발렌티누스파이며, 이는 철저한 일원론 철학이고 세계긍정의 낙관적 일원론에 속하기 때문에 어딘가 의아하게 느껴지곤 한다. 예전의 교수님 논문에서 한스 요나스를 빈번히 언급하시거나 쿠르트 루돌프의 관점을 영지주의의 정의로 사용하셨던 기억이 있는데, 한스 요나스가 발렌티누스파를 이원론으로 파악하거나 쿠르트 루돌프가 만다야교와 마니교의 이미지로부터 다른 영지주의를 추적하려고 했던 것에는 비판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사실 Puech 이후 플로티노스가 반박하려한 바로 그ㅜ영지주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많은 논란이 있어왔지만 어쨌거나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비관적 염세주의나 혹은 선민의식으로 요약하는 것과 현대 학자들의 해체주의적 관점은 차이가 있는듯하다. 낙 함마디까지 가지 않더라도 예를 들어 에피파니오스의 파나리온의 플로라에게 보내는 서신 따위는 플로티노스의 반영지주의적 논증과 거리를 두는듯 보이니말이다. 예전의 논문에서 The Rediscovery of Gnosticism를 언급하셨던 기억이 있는데 그 컨퍼런스에서도 진리의 복음에 대해 비슷한 지적이 있었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Zeke Mazur의 논문처럼 1.6(1)조차도 여러 영지주의 논고들과 병행구절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 너무 재밋다. 또한 해설 어딘가에서 교수님이 하르더의 논문의 관점에 따라 제30-33논고를 하나의 대논고로 파악해야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여기엔 최근의 번역, 예컨데 뤽 브리송 등이 참여한 불역에서 이견이 제시되기도 하고, 아니면 레벨레트흐에서 최근 브레이어판을 대체하여 나오고 있는 새로운 뷔데판의 30-33에서도 미묘한 태도를 취하는 등 이견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 물론 Vrin에서 나온 B. Ham의 30(3.8) 번역처럼 최근의 출판물들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논문과 서적이 적지않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런 잡스러운 취향차의 문제나 그 외에 사소한 오타가 있지만 너무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책이다.
이 번역을 읽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토록 훌륭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한 명의 독자로서 영광스러운 일이며, 또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부드럽고 정확한 언어로 깊이있는 지식을 전달해주시는 교수님과 같은 분들의 기나긴 노력에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오랜 시간동안 기다려온 책이 드디어 나와서 좀 의식의 흐름대로 횡설수설했지만 과연 이보다 멋진 책을 올해 만날 수 있을지 의심된다. 아니, 아마 올해가 아니라 지난 십 년과 이후 십 년을 통틀어서 가장 감동적인 책 목록의 첫 줄에 이 책은 영원불멸로 남아있을 것이다.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지만 교수님이 어느 방향에 계신지 모르기 때문에 책에라도 절을 하고싶을 정도다. 너무나도 행복한 경험을 하게 해준 이 책을 만나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