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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평점 :
1945년에 태어나 2020년에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의 사후 에세이를 읽는다. 그는 자연과의 교감에 깊이 관여했고, 이를 글로 남기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기후 위기라는 시대적 상황 앞에서 자연 세계에 대한 그의 태도가 갖는 무게는 상당하다. 나아가 고통을 삶의 원천으로 승화하는 방식은 모두에게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하늘', '대화', '문턱', '강'이라 이름 붙인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특히 '하늘'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는 경험과 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기록한 부분이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두 개의 중심적 세계관을 책의 맨 앞에서 다룬다. 하나는 '자연'에 대한 관념이고, 또 하나는 '성모'에 대한 경험이다. 전혀 다른 위상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두 대상은 신비주의라는 공통된 맥락 속에서 작동한다.
나에게는 무한히 용서하고 무한히 위로하는 빛이라는 중심축이 있었다. (…) 그 빛, 그리고 나를 하늘로, 나 자신의 바깥으로 끄집어내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던 새들이 내 삶에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져다주었다.
'자연'에 대한 관념
이 책에 묘사된 자연은 도시적 삶의 저편에 있는 전원의 풍경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주말에 숲속에서 피톤치드를 들이마실 때 생각하는 '자연'이라는 낱말 따위가 아니다. 작가가 말하는 자연은 우리 모두가 속해 있는 거대한 공간이거나 그것을 작동시키는 근본 원리에 가깝다. 그는 도시 안에서도 자연을 느낀다. 그의 예민한 감각은 포장 도로 밑을 흐르는 물의 움직임을 더듬는다. 난개발과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변함없이 존재하는 무언가를 다시금 확인한다. 그는 그것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하며 충분히 존중하는 사람이다.
1952년 7월, 나는 지진의 진동을 느끼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땅의 흔들림이 어딘지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느껴졌다. (…) 그때 느낀 물과의 원초적인 교감, 송수로의 계단 폭포 앞에서 나를 완전히 침묵하게 만들던 본능적인 술렁임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언가 본질적인 것, 가브리엘리노 부족보다 오래되고 경제적 능력보다 인간의 삶에 더 필수적인 어떤 것이 내 앞과 내 주위에 있다고. 샌타애나 하늘에 흰 동전처럼 떠 있던 8월의 태양, 지층이 끊어져 갈라진 땅, 엘니뇨의 기후는 포장으로 덮일 수 없었다. 그건 결코 사라질 수도, 파괴될 수도 없었다.
자연은 실로 거대하고 복잡하며 다층적인 구성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기껏해야 겸손이다. 하지만 자연 앞에 서 있는 인간을 한낱 미물로 묘사하는 것은 겸손을 표현함과 동시에 어떤 대상화를 전제로 한다. 우리는 자연의 전체를 가늠할 수 없기에 우리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에 더 익숙하다. 이성 중심의 사고, 과학 기술에 대한 맹신은 자연을 객체로 대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만든다. 만약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 더 큰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외려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즉, 겸손만으로는 부족하다.
작가는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분명하고도 예민한 감각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것은 유명세나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그러한 감각의 완성에 있다. 그는 칸트가 '숭고'라는 말로 표현했던 감정의 상태로 자연을 대하는 사람이다. 무한하고 절대적인 크기에 대한 심미적 판단.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대상의 물리적 크기보다는 자유롭게 작동하는 마음의 크기에 있다. 이는 인류가 자연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조언이 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당신도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튿날 데이브와 채트워스까지 긴 지그재그 드라이브를 하던 중에 나는 내 유년기의 밸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임을 다시금 직감했다. (…) 얼핏 보면 밸리가 철저히 붕괴되었다고-돈을 좇는 타락한 욕망에 쪼개지고 시들어 자동차가 지배하는 땅이 되었다고-생각해버리기 쉽다. 그러나 밸리의 영혼은 무사히 살아 있다. 와해됐다는 건 착각이다. (…) 내가 벨리에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는 이유는 이런 이해의 물리적 토대를 다시 마주하기 위해서다.
'성모'에 대한 경험
자연에 대한 관념과 함께 그의 삶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중심축은 신앙이다. 성모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자연을 다룰 때보다도 확신에 찬 어조가 된다. 마치 자연이 관념이고 성모가 실체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철저히 가톨릭 신자로 성장했지만 그가 받아들인 것은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라 기도하는 삶 자체다. 그는 종교적 확신과 이교도에 대한 공감을 동시에 추구하는 보기 드문 사람이며, 종교의 이름보다 영성의 신비를 잃지 않기를 바라던 사람이다.
그는 인생에서 두 번이나 성모의 임재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한번은 그물에 걸린 바다사자들을 구하려고 바닷속으로 뛰어들 때였고, 또 한번은 그보다 36년 전에 한 아동 성도착자의 방에 갇혀 지저분한 침실을 응시하던 때였다. 두 경험이 모두 고통과 관련 있다는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당신이 무신론자라면 일종의 영성 체험에 해당하는 그 경험들에 반발심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종교나 신앙을 강요하거나 강조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몸 안에 남아 있는 생명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새로운 방법에 대해 말하고자 할 뿐이다.
고통의 힘
그는 6살부터 10살까지 총 4년 동안 한 남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성적 고문을 당했다. 남자는 알코올의존증 치료소를 운영하던 사람으로 지역 사회에서 꽤나 명망 있던 인사다. 남자는 그의 어머니에게 호의를 베풀며 그의 가족과 친분을 맺었고 점차 그를 지배해 나갔다. 이 에피소드는 「하늘 한 조각」이라는 글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끔찍해서 거론하는 것조차 어려운 이야기를 그는 담담한 어조로 풀어놓는다. 그와 달리, 그것을 읽는 당신의 마음은 불편해질 수도 있다. 책의 성격과 맞지 않는 이야기가 어째서 갑자기 등장한 건지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내 수긍하게 될 것이다. 자연과 신앙에 대한 그의 태도는 고통을 다루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파멸에 이르고 말 경험이 어떻게 삶을 작동하는 힘으로 작용한 걸까? 그 자신도 결국 인정했듯이 모든 상황은 그 어린아이를 구원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어머니의 의도적인 외면을 의심해야 했고, 가족을 지켜냈다는 자부심도 유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을 파괴한 남자를 응징할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그는 가족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어떠한 확신도 갖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고통은 그를 잠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고통을 힘의 원천으로 삼아 살아갔다. 그러므로 그의 마지막 저작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너는 여기서 죽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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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 고통받고 있다고 느껴서 괴로운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