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위의 삶 - 뇌종양 전문 신경외과 의사가 수술실에서 마주한 죽음과 희망의 간극
라훌 잔디얼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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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세상 모든 이야기의 주제는 이 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나'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이야말로 인간 상상력의 시발점이다. 이러한 원리가 픽션의 세계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픽션은 현실의 결핍이거나 그 반작용의 결과물이다. 현실과 픽션이 작동하는 방식은 동일할 것이다. 현실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군더더기를 제거한 것이 곧 픽션이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모든 인간 삶을 포괄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누구도 그 물음에 정확히 대답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물음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붙들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물론 인생을 진지하게 사는 이라면 누구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탐구하게 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 그런 시도는 아주 잠깐만 일어날 뿐이다. 반복적인 일상의 패턴은 그것을 유지하는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작업들을 차단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한 번도 결론 내리지 못하며, 그것을 알고자 했던 마음조차 잊어버린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경험과 믿음, 기억과 역사, 희망과 갈망에서 생겨난 독특한 내면의 이야기, 즉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흡수해서 이들을 진행형 서사로 엮어내는 능력을 자서전적 기억이라고 하고, 이는 스스로의 자아를 바라보는 기반이 된다. 자신의 개인적 서사를 창조하는 이 신비로운 나비는 우리의 순간을 한데 묶어준다.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저자의 탐구는 총 10개의 장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 각각의 장에는 신경외과 의사로 살던 그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도록 만든 굵직한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는 환자들의 이야기는 메디컬 드라마의 그것처럼 완전한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그것의 비규정성은 저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삶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순간을 알아채는 것은 아니다.


환자와의 관계에서 촉발된 궁금증을 탐구하는 저자의 방식은 매우 복합적이며 유동적이다.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 의심과 함께 때로는 도덕적이고 때로는 당위적이기도 한 사유 방식이 동원된다. 책 전체에서 결정론적 사고에 짓눌리지 않으려는 유연한 태도가 느껴진다. 이성적(과학적) 사고로 비이성적(비과학적) 현상들을 재단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저자가 완성된 사람이라기보다는 여전히 배우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게 한다.


또 하나 인상 깊은 점은 모든 경험의 과정을 뇌과학적 시각에서 검토한다는 점이다. 그는 신체에 나타난 물리 작용뿐 아니라 기억이나 몰입과 같은 심리 작용도 뇌의 기능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신앙조차도 뇌의 전기 작용에 의한 일종의 오류로 다뤄진다. 물론 그는 신앙이 고통을 겪는 환자에게 큰 힘을 준다는 점을 인정한다. 신앙에 대한 그의 진술은 무척 조심스럽다.생명을 다루는 직업은 종교적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고, 그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확실한 것은 그가 인간이 만든 교리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이다.


수술 중 치코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준 자극은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생각과 감정에 마지막으로 접속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 시간은 깊은 영성을 체험하게 될 마지막 기회였다. 수술 중 치코가 신과 자연이란 단어를 내뱉었기 때문에 나는 호르헤에게 치코가 독특한 사례인지, 아니면 신과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간질 환자에게 나타나는 전형적 현상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호르헤는 내가 이 질문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채고,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이건 흔한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신앙은 신비스럽게도 뇌 안에서 물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과학자인 내가 보기에도 신앙은 생리 기능을 발동시켜, 환자들이 수술의 스트레스를 견디고 치명적인 질병을 견뎌야 한다는 절망감에서 거리를 두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뇌 안에 종교적 감정과 관련된 부위가 있다면, 이는 곧 신앙이 선천적 또는 후천적 기질이거나 아니면 둘 다임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


저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극명히 깨달은 순간을 '자아'라는 제목이 달린 3장에서 다룬다. 여기에는 그의 직업적 정체성과 함께 스스로가 가진 힘을 깨달은 순간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는 아직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한 여자아이와 엄마를 만났다. 아이는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로 병원에 실려왔고, 그의 역할은 단지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엄마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일반적인 절차에 따라 일종의 수술용 드릴로 아이의 두개골에 구멍을 냈고, 그러자 뇌압 때문에 아이의 뇌가 잘게 쪼개져 분출되었다. 그 순간은 공교롭게도 그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새로운 면모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힘을 얻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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