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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미술의 탄생 - 글로벌 아트마켓의 성장과 예술의 몰락
심상용 지음 / 아트북스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미술시장 뒤흔드는 시장미술…시장은 ‘예술’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3> 심상용의 『시장미술의 탄생』

이진숙 kmedichi@hanmail.net | 제188호 | 20101017 입력 height=0 marginHeight=0 src="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 frameBorder=0 width=0 marginWidth=0 scrolling=no>
홍콩 아트페어 전시장 풍경
1. 2009년 5~10월 스위스 바젤 바이엘러 미술관,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66) 대규모 회고전.
2. 2010년 2월 3일 런던 소더비 경매, 자코메티의 작품 ‘걷는 사람’이 당시 예술작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6500만1250파운드(수수료 포함, 약 1197억원)에 팔림.
3. 2010년 6월 한 달간 가고시안 갤러리 런던 지점에서 대규모 자코메티 관련 전시.
4. 2010년 6월 중순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에 다수의 자코메티 작품 출품.

다른 장소에서 비연속적으로 일어난 네 가지 일을 사건일지 방식으로 정리해 본다. 자코메티에 대한 이 새삼스러운 조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눈치 빠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모든 과정의 결과 구설에 오르고 있던 가고시안 갤러리의 자코메티 조각의 사후 에디션 판매 논쟁이 종지부를 찍고, 자코메티라는 이름은 더 많은 컬렉터의 소장품 목록에 포함됐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사건을 다시 풀어 보면 1)미술관이라는 비상업적 장소에서의 전시를 통한 작가의 미술사적 검증 2)경매 최고가 기록으로 투자적 가치 확인 3)새로운 투자 상품의 선정과 거래 활성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고도의 마케팅이 개입되지 않았다고 부정할 근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시장미술의 탄생』(2010·아트북스·1만6000원)에서 저자 심상용은 현대미술 시장의 구조를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틀을 제시한다. 이 책은 최근 출판되고 있는 미술시장 실무자들의 피상적인 체험기 혹은 소문 활자화하기와는 차원이 다른 체계적인 분석을 보여 준다. 그의 어투는 더러 울분에 차 있고 비관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미술시장과는 거리가 먼 평론가이며 교수다. 또 현재 미술시장을 주도하는 미국과 영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미술시장에 대해 충분히 비판적인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저자가 제출한 시장에 대한 보고서는 가장 투명하게 시장의 구조를 보여 준다. 사태가 지나치게 과장돼 있고 혼돈에 빠졌을 때 네거티브 필름의 위력은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법이다.

이 책의 주제는 미술시장이 아니라 ‘시장미술(Market Art)’이다. 시장미술이란 “‘과도하게 시장화된’ 예술의 유형으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학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시장미술의 등장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미술시장뿐 아니라 미술을 둘러싼 여러 제도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그 상관관계를 분석해 낸다. 저자는 미술시장 자체가 아니라 시장미술의 등장이라는 미술사적 관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오랫동안 잊고 있던 중요한 문제, 바로 예술의 본질이란 근본적인 문제를 환기시킨다. 미술시장이라는, 예술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정작 예술 자체에 관한 논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예술의 본질이라는 확고한 준거점을 확보하고 논의를 펼쳐 나간다.

1990년대 전후 글로벌 아트 마켓의 성장과 더불어 시작된 시장미술의 시대에는 “예술적 성취는 오차 없이 화폐 단위로 환산되고, 탁월성은 고가로 입증된다”는 그릇된 신념이 세상을 지배한다. 예술의 본질이 투자나 자금의 운용 같은 사고 방식과는 전혀 무관한 가치에 근거함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훌륭한 투자처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더 나아가 시장의 원리는 미술의 전 영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돈 되는 작가’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돈 되는 작가’ 중심으로 미술의 장(場) 전체를 재편”하고 있다. 불편하고 무시무시한 진실이다.

그러나 세계화가 중심국의 부의 증대와 주변국의 빈곤을 촉진했듯 서구를 기반으로 한 글로벌 아트 마켓의 중심 세력이 강화되면 될수록 이 중심에서 먼 시장과 미술계는 언제나 게토화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이 글로벌 아트 마켓은 PPR그룹의 회장이자 크리스티 경매사의 최대 주주인 프랑수아 피노, 로만 아브라모비치 같은 수퍼 리치 컬렉터, 각국의 주요 지역에 체인점을 둔 기업형 화랑, 소더비와 크리스티 등 거대 경매회사 등 강력한 재정 동원력을 가진 소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거대 경매사에서 행해지는 가격 결정은 미술시장을 통치하는 법이 됐다.

1차 시장인 갤러리와 2차 시장인 경매의 유착, 대중매체의 무비판적인 받아 적기, 비상업적 기관인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지위 약화, 평론가와 미술사가의 발언권 축소, 주식과 부동산 같은 비예술시장과의 직접적 연동성 역시 시장미술 시대의 특징이다. 글로벌 아트 마켓의 주역들, 즉 중심화된 미술 권력은 미술품으로 막대한 수익 올리기를 실행해 보임으로써 미술시장을 확실한 투자처로 인식시키고 강력한 미디어 조작을 통해 수많은 추종자를 만들어 낸다. 탁월한 자기복제 시스템을 통해 시장미술이 번성할 수 있는 매트릭스를 촘촘히 짜고 있는 것이다.

아트페어와 경매사가 비상업적 형식을 효과적으로 동원하며 작품 가치를 검증하는 미술관의 기능을 대신함으로써 결국 “고가의 작품=가치 있는 작품”이라는 등식을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고가품을 구매하는 수퍼 리치 컬렉터의 취향 추종하기, 그들의 취향에 맞는 돈이 되는 스타 작가 열망하기, 소수의 글로벌 아트페어의 강화와 지역 미술시장의 붕괴 등 시장미술의 발전 결과는 결국 창조성의 고갈과 예술의 몰락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세력들의 우행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놓은 이 책은 그 꼼꼼함 때문에 거꾸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영악하게 이 책을 읽으면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행해지는 전시를 주목하고, 그것을 경매회사의 기록을 통해 검증하며, 거대 갤러리에서 판매하는 작품을 사면 미술 투자 불패 신화를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운이 좋은 경우에 말이다. 그러나 얇지 않은 책을 쓴 저자의 노고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그가 주장하는 바를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예술의 몰락을 초래한 작금의 현실 앞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저자의 고민은 깊기만 하다. 저자는 시장의 자율성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 불황에 빠진 미술시장의 구조조정을 통해 살아남는 것은 결국 글로벌 아트 마켓의 강자일 뿐이며, 이는 다양성을 생명으로 하는 예술계에 매우 적대적인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시장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답은 시장 내부에 있지 않다. 시민적 양심의 회복, 미술의 공적 가치를 회복하는 게 가장 본질적인 탈출구가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의 뜻을 새기기 위해 길게 인용해 본다. “미술이… 진정으로 인류에게 필요한 것들, 곧 포용·겸허·양심·감성·감수성·아름다움·직관이라는 자질들의 출처가 되고자 나설 때, 시장은 그와 같은 시도에 잠재되어 있는 창조적 속성을 보존하고, 그 실제 주체인 작가들을 지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혜택을 공유하는 간접적인 산업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

어쩌면 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의 구체성에 비하면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만드는 것은 현실주의자들이라 하겠지만, 사실 세상을 바꾸도록 강제하는 것은 이상주의자들이다. 비록 제도화의 힘은 더디고 약하겠지만, 결국 시장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사람의 일이니 사람들의 자성은 아무리 촉구해도 부족하지 않다. 고민하는 소수, 한 줌의 이상주의자는 다수의 광기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부패로부터 구제하는 소금의 역할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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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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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손에서, 컬렉터의 손에서…예술은 두 번 태어난다

이진숙의 ART BOOK 깊이읽기<2> 컬렉터란 무엇인가? 『간송 전형필』과 『명품의 탄생』

이진숙kmedichi@hanmail.net | 제186호 | 20101003 입력 height=0 marginHeight=0 src="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 frameBorder=0 width=0 marginWidth=0 scrolling=no>
검소한 차림으로 수장품을 살피는 간송 전형필. 사진 김영사 제공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사건 당시 국내뿐 아니라 해외 미술계에서도 한국 미술시장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일시적인 타격일 뿐이지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같은 그림이 97억원이나 한다는 사실, 그리고 몇 년 뒤에 서너 배 가격이 상승했다는 사실을 모든 매체가 대대적으로 홍보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노이지 마케팅(noisy marketing)이 이루어진 것이다.

19세기는 작가의 시대, 20세기는 평론가의 시대, 21세기는 컬렉터의 시대라고 한다. 2007~2008년 한국 미술의 호황기에는 주식·부동산 시장과 미술시장의 변별력을 알지 못하는 세력이 대거 미술 시장으로 유입됐다. 『명품의 탄생』의 저자 이광표는 “문화재와 미술품을 투자와 투기의 대상으로만 보려” 하는 세태를 우려하며 “컬렉션의 진정한 의미와 아름다움을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책을 집필했다고 밝히고 있다. 타당한 시기에 제기된 타당한 문제 설정이었다. 시장의 주요한 축을 이루는 컬렉터들의 순기능을 회복하는 것이 한국 미술계를 위해 가장 시급한 일이다. 한국 미술 컬렉터의 역사를 밝히는 이광표의 『명품의 탄생』(2009·산처럼·1만8000원)과 간송미술관 창립자의 일대기를 다룬 이충렬의 『간송 전형필』(2010·김영사·1만8000원)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술 작품은 두 번 태어난다”고 『명품의 탄생』은 말한다. “한 번은 예술가의 손에서, 또 한 번은 그것을 느끼고 향유하는 사람 즉 감상자나 컬렉터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이 책은 고미술을 중심으로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화 패트론으로서의 건전한 컬렉터의 역할을 보여준다. 18~19세기에 이들은 작가들과 교우하며 창작에 영감을 주고, 한 시대의 문화를 만들어나갔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문화재를 지켜내기도 했다.

평생 공들여 모은 작품을 미술관을 건립하거나 공공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대중에게 공개한 사례를 살펴보는 과정은 책의 절정 부분에 해당된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개별 컬렉터들의 간절한 열망이 없었더라면 많은 작품이 사장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덕분에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이 작품들을 감상하고 그를 밑거름으로 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의 꿈이 모든 사람의 꿈으로 전환되는 위대한 순간을 함께 체험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명품의 탄생』이 통사론적으로 컬렉터와 컬렉션의 역사를 개괄하고 있다면, 『간송 전형필』은 한 컬렉터의 일대기를 좀 더 밀착해서 다루고 있다. 전형적인 영웅담의 구조로 쓰인 『간송 전형필』은 빠르고 쉽게 읽히며 적절한 순간에 감동을 조율해낸다. 간송이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수장하던 1930~40년대는 일제의 수탈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다. 당시 고려시대 고분 2000여 기가 도굴되고 고려청자 1000여 점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하니 나머지 문화재의 현황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화보국(文化保國)”이라는 오세창의 말이 실천의 강령으로 뜨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던 시점이었다.

간송은 “자신의 취향보다는 그것이 이 땅에 꼭 남아야 할지 아니면 포기해도 좋을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숙고는 하지만 장고는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 나타났을 때 놓친 적이 거의 없다”고 책은 평한다. 간송의 컬렉션 과정을 살펴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컬렉션의 시작과 과정에 좋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다. 화가 고희동, 역사소설가 월탄 박종화, 평생의 스승 위창 오세창, 한림서점의 백두용, 그리고 작품 수집의 손과 발이 되어준 이순황과 순보 기조가 그의 곁에 있었다.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은 좋은 작품과의 인연으로 연결됐다.

특히 3·1 만세운동의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오세창은 본인이 대수장가였으며 당대 ‘최고의 감식안’으로 알려져 있었다. 오세창은 『근역화휘』『근역서휘』『근역서화징』등 자신이 집필한 서화에 관한 책을 간송에게 전해 주었고, 초창기 간송은 이런 학습을 통해 유명 작가의 작품뿐 아니라 시기별로 중요한 작품을 수집했다. 또한 간송은 작품을 가지고 오는 거간꾼들을 홀대하지 않기로 유명한데, 스스로 좋은 인연을 좋게 유지할 수 있는 인품을 갖추고 있었다.

이 책에는 “군계(群鷄)가 일학(一鶴)을 당하지 못한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저 그런 골동품이 아무리 많아도 명품 한 점을 당하지 못하고, 명품을 한 점 소장하고 있으면 다른 골동품들도 덩달아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수많은 작품 중에서 ‘일학’을 고르기가 쉽겠는가? 재력뿐 아니라 ‘안목과 열정’이라는 항목이 컬렉터의 필수 항목이 되는 이유다. 안목과 열정이 없으면 컬렉션을 한다는 것은 ‘쓸모 없는 물건’에 막대한 재산을 낭비하는 일에 지나지 않게 된다.

간송이 유산으로 받은 전답을 팔아가며 구입한 작품가액은 어마어마한 액수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지금 돈 60억원에, 혜원의 ‘혜원전신첩’은 90억원에, 영국인 개스비로부터 청자 22점을 일괄 구입하는 데 1200억원을 투여한다. 국가도 못할 일을 개인이 한 것이다. 애국만이 목적이었다면, 이 정도 규모의 자금으로 다른 할 일도 많았으리라. 이러한 행위 뒤에 애국심 이상의 것이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다.

그것은 바로 미술품 컬렉터의 마음이다. 작품을 소장하는 것은 단순한 물욕,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호사취미가 아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의협심이 투철하더라도 진정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 미술품 컬렉션이다. 또한 우리 같은 범인들이 감히 문화재를 소장할 수도 없다. 답은 이거다. 김용진이 간송에게 단원의 ‘모구양자’ ‘황묘농접’을 넘겨주며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늘그막에 벗 삼아 보려고 자네에게 넘겨주지 않은 단원의 그림일세.”

‘늘그막에 벗삼아 보려고’ 간직한 작품! 작품은 친구나 부부만큼 깊은 인연으로 찾아오는 법이다. 안 해 본 사람은 절대 모르는 기쁨을 주는 것이 미술품 컬렉션이다. 나 혼자만 소유할 수 있고, 이리 보아도 예쁘고 저리 보아도 예쁜 그런 단 하나의 존재가 바로 작품이다. 그것은 평생을 함께할 친구를 얻는 일이다.

이런 미술품에 대한 애정을 갖지 않는다면 컬렉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기 차액을 노리고 ‘문화재와 미술품을 투자와 투기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사람들이 낭패를 겪는 이유는 작품과 친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주식이나 부동산과 ‘마음의 친구’가 되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으면 연락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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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란 무엇인가 - 문화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천재 예술가들
베레나 크리거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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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천재 예술가’ 는 낭만주의가 낳은 고정 관념

이진숙의 ART BOOK 깊이읽기: 예술가에 대하여 <1> 베레나 크리거의 『예술가란 무엇인가?』

이진숙 kmedichi@hanmail.net | 제184호 | 20100919 입력 height=0 marginHeight=0 src="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 frameBorder=0 width=0 marginWidth=0 scrolling=no>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자화상’(1908)
예술가란 어떤 사람들인가? 창조의 권능을 행사하는 ‘제2의 신’인가? ‘반사회적인 고독한 천재’인가? ‘세상의 구원자’인가? 사기꾼인가? 아니면 신종 유망사업에 종사하는 비즈니스맨인가?

고흐, 렘브란트, 이중섭…. 진정한 예술가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름들이다. 천재적인 재능과 예술에 대한 열정, 당대의 몰이해, 불행하고 고독한 삶이란 단어들이 묶음으로 함께 떠오른다. 열정과 재능은 부럽지만, 누구도 이들처럼 불행하게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불행은 권장할 일도 아니거니와 다른 길을 걸어온 예술가도 분명히 있다. 루벤스, 피카소, 앤디 워홀 같은 작가들은 생전에 부와 명예를 누렸고 사후에도 그 영광을 반복하고 있다. 드러내놓고 말은 못해도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두 번째 작가들을 희망 모델로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여전히 고흐 류의 작가를 위대하다 할 것이다. 우리는 남(예술가들)의 불행을 즐기는 악당인가? 도대체 예술가들의 불행을 당연시 여기는 이 끈질긴 생각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베레나 크리거의 책 『예술가란 무엇인가?』(조이한 역·휴머니스트·2010·1만8000원)는 이런 예술가상의 유래와 역사를 담고 있다. 예술가는 누구(who)냐가 아니라 무엇(what)이냐고 물음으로써 질문은 ‘예술가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영역을 넘어 ‘예술적 창조성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영역으로 확장된다. 책은 예술가라는 개념을 통해서 본 미술사라는 구조로 질문에 충실하게 답한다.

조형 예술에 종사하던 장인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창조자’의 지위로까지 격상된다. 예술가의 지위가 신적인 위치로까지 상승되면서 예술품의 ‘비합리적인 가격 정책’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즉 예술가의 명성만이 예술품 가격 결정에 있어서 ‘결정적이고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관념이 이때부터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예술가 숭배가 정점에 이른 것은 낭만주의시대인데 예술가에 대한 통념은 이때 대부분 형성됐다. 내면세계로의 탐닉, 반시민적인 태도, 부족한 사회적 인정, 가난·고독으로 인한 고통이 ‘천재’인 예술가들의 중요한 특성으로 묘사된다.

특히 예술가의 ‘반시민적 태도’는 여러 미학자들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칸트는 예술은 상품이 아니며 예술적 활동은 돈을 벌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배고픈 예술가가 철학으로 세례를 받는 순간이다. 경제활동의 의무가 제외되는 대신 더 큰 의무가 부가된다. 예술가는 “더 높은 것, 즉 아름다움과 진실을 통찰하기 위해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는 예술가들에게 더 큰 책임과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한다. 이제 예술은 인류의 보다 보편적인 해방을 구현해내는 매체로 봉사해야 한다. 생시몽은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를 ‘아방가르드(선두부대)’란 군사 용어로 설명했다. 사회의 아방가르드로서 예술가는 자신의 행동을 정치적 행동과 결부시키며 세상의 구원자를 자처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 아방가르드들의 경우처럼 정치가와 예술가가 동등해진다는 것은 매우 유토피아적인 순진한 생각이었음을 미술사는 쓸쓸히 회고한다.

획일화된 대량 상품생산 사회에 이르러서는 아방가르드로서의 예술가의 특수한 역할이 포기된 것처럼 보이고 개성이 배제된 작품들이 미술관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작가의 죽음”이 선언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순간에 다른 유형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바로 앤디 워홀이다. “최고의 예술은 비즈니스다”라는 자신의 말대로 그는 예술(비즈니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은 인기와 부를 쌓았다.

예술가는 이제 반시민적 태도를 버리고 자본주의의 상품 유통 구조에 편입되어 “자신이 계획한 것에 따라서 일하는 날품팔이 노동자”에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좀 더 낫게 표현해도 예술가들은 이제 “독립적이지만 사회 보장 없는 활동을 하는 ‘일인회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실 ‘날품팔이 노동자’는 봉건적 압박에서 벗어난 순간 대부분의 사람이 처한 상황이었다. 20세기 중반에 예술가들이 이런 처지가 되었다는 뒤늦은 확인은 결국 예술과 예술가를 둘러싼 모든 환상이 깨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환상이 깨진 자리엔 또 다른 신화가 만들어진다. 데미언 허스트(1965년생)는 2009년 단독 경매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단 하루 만에 1470억원어치의 작품을 팔아치웠다. ‘일인회사의 대표’가 보여준 최고로 현란한 쇼의 한 대목이자 21세기적 예술가 신화의 단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술가들은 실제로 작품의 생산과 판매를 위해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활동해야 한다. 조세의 의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품팔이 노동자’ 혹은 ‘일인회사의 대표’들도 ‘시대와 불화하는 예술’이라는 보편적인 규정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창조성’은 언제나 예술의 제일 덕목이기 때문이다. 예술적 창조성은 “가치 창출에 대한 직접적인 압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잘 발화한다. 소위 ‘고객의 니즈’에 맞추어 만드는 것은 상품이지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미술작품이 고객의 니즈를 배신하면 할수록 결국에는 더 위대해지고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해왔다. 아방가르드로서 기존의 통념에 대해 거부하는 것은 예술적 창조의 제1 원천이다.

시대와 불화하는 예술가들이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저자는 “창조성은 가벼운 정신적 불안정의 상태에서 가장 강하게 형성되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창조성이 극대화되는 ‘가벼운 정신적 불안정 상태’에 있는 예술가들은 더러 사회에 부적응한 괴짜들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괴짜’들이 더 괴짜다울수록, 더 많은 괴짜들이 존재할수록 사회 전체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힘은 커진다.

저자의 말대로 예술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쉽게 죽지 않는 “끈질기게 이승으로 돌아오는 유령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 유령들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영매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요셉 보이스의 말대로, 창조를 향한 충동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창조를 향한 충동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예술가라는 유령들을 찬탄과 비난의 말 속에서 계속 부활시킨다. 고로, 시대와 불화했던 예술가들을 진정한 작가들이라 손꼽았던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악당들이 아니라, 창조성을 극대화한 예술가들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하는 소소한 창조성의 범인들일 뿐이다. 그런 사람의 하나로서 나는 한국 사회가 더 많은 창조성의 유령들로 득시글대길 바란다. 탱탱한 창조성으로 긴장된 사회!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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