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용 -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데이브 히키의 전복적 시선
데이브 히키 지음, 박대정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논쟁 속에 잊혀진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13> 데이브 히키의 『보이지 않는 용』

이진숙 kmedichi@hanmail.net | 제213호 | 20110410 입력 height=0 marginHeight=0 src="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 frameBorder=0 width=0 marginWidth=0 scrolling=no>
1 데이브 히키의 『보이지 않는 용』
책은 1988년 한 공개 토론회장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시작한다. “90년대의 주요 쟁점은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라는 데이브 히키의 발언과 더불어 토론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히키는 상당 기간 비주류 비평가로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하버드대와 예일대 방문교수, 네바다대 교수를 거쳐 지금은 뉴멕시코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적 카우보이’라는 별명처럼 그의 경력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한때 갤러리 디렉터로 작품 판매에도 관여했고, 전시기획자, 단편 작가, 로큰롤 작곡가로도 활동했다.

그를 비주류로 만든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주장이었다. SF물이나 스릴러를 연상시키는 제목 『보이지 않는 용』(2011, 마음산책, 1만6000원)은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93년 첫 출간됐으며 2009년 ‘아름다움과 민주주의’라는 부제가 달린 5장이 추가된 개정 증보판이 나왔다. 20여 년 사이 책 밖에서 일어난 일들이 ‘보이지 않는 용’의 귀환을 환영하게 한다. 책의 본문으로 뛰어들기 전에 옮긴이 박대정의 글과 임근준의 해설을 먼저 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위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80년대 문화전쟁이 고조되던 시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미술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는 과정은 미국 중심의 세계 재편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추상표현주의는 냉전시대에 자유주의 선전 수단으로 이용됐다. 추상과 형식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모더니즘 기반의 주류 비평계는 여기에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했다.

모더니즘의 뒤를 이어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 역시 제도화됨으로써 비판적인 기능을 상실했다. 특정 이론의 전횡과 레이건 대통령 시절 사회 전반의 보수화는 마침내 미국 사회에서 낙태, 총기 소지, 종교와 정치의 분리, 사생활 보호, 동성애, 검열 등의 이슈로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이 충돌하는 문화전쟁을 촉발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89년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전시를 둘러싼 대립이었다. 동성애와 노골적인 성행위 이미지를 담은 메이플소프의 작품 전시를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에 교묘한 양비론을 내세우며 히키가 주장한 것은 아름다움의 중요성이었다.

2 카라바조의 ‘성 토마스의 불신’(1601),캔버스에 유채, 피렌체 베키아 포스터 궁
잊혀졌던 카라바조의 그림을 루벤스가 직접 구입하거나 구매를 권했던 것도 그 작품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아름다움은 이미지가 교회나 국가를 통하지 않고 곧장 개인에게 가는 유일한 직행 통로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미지에서 구경꾼에게 가는 통로는 표면상 교회나 국가와는 다른 대안적인 기관을 거쳐 우회한다”고 일갈했다. 제도화된 비평계와 미술관을 포함한 각종 미술기관 등을 ‘마취 전문가’와 ‘치료 기관’이라 비아냥거리며 비판한다. 전시를 반대하건 찬성하건 미적 담론을 독식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개정 증보판이 나온 2009년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효력을 다한 것처럼 보이는 시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이론에 미술비평이 기대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움’에 관한 논의는 잊혀졌다. 그뿐만 아니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 예술작품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도 잊혀진 듯했다. 이론의 부적절한 적용과 남용은 안타까운 상황을 연출했다. 미술작가는 유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 맞추어 작품을 만들고 미술비평가는 그 작품을 상찬하는 무의미한 동어반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히키의 표현에 따르면 “언어의 벽이 미술작품을 수많은 말로 두르고 작품들의 수명을 단축”했다. 인용문으로 뒤덮인 미술 비평은 읽을 수 없는 글이 되어 버렸다. 현대미술 작품이 난해하다고는 하지만, 작품을 해석한 비평은 더 난해했다. 후손들이 번창한다고 해서 모두 기뻐할 일이 아닌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중 열성인자를 유전한 못난 후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면, 그 종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자기 점검과 반성이 필요해진 시점에 도달했다고 본다.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을 토론의 중심에서 추방한 제도화된 이론의 세력이 약화된 것은 이런 내적 발전의 결과만은 아니다. 90년대 초반 새로운 변수가 미술계에 그 실체를 드러낸다. 바로 시장이다. “이제는 모두 아트 페어에 다닌다!”는 감탄문으로 히키는 상황을 요약한다. 그러나 변화된 상황과 아름다움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아직 없다.

임근준의 지적대로 “이리저리 우회하며 산보하는 용은 불을 뿜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안이 될 수 있는 아름다움의 구체적인 전략이 제시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메이플소프의 예에서처럼 아름다움은 상당한 위력을 가질 수 있다고 히키는 거듭 주장한다. 아름다움이 가진 직접적인 호소력은 기존 관념에 위배되는 새로운 생각을 전파하는 데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히키는 도덕적 책무로부터 미술작품을 해방시키려고 하지만 전복적인 힘을 가진 아름다운 예술은 기존의 도덕적 관념과 충돌하며 수정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변화하는 사회에서 더 많은 사회 구성원을 포용하고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도덕 자체도 부단히 개선되어야 한다. 개선의 중심에는 인본주의에 대한 끊이지 않는 성찰이 놓여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럴 때만이 히키가 주장하는 ‘아름다움과 민주주의’는 의미 있는 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파란 하늘과 탁 트인 고속도로”라고 히키는 말한다. 이 말은 미술 이론적 표현이라기보다 미국 서부지역을 자동차로 여행했던 쾌감의 표현처럼 들린다. 그는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것으로 쉽게 규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무정부주의는 특정 정부를 해체시키는 무기는 될 수 있다. 장례식장에서 시체를 염하면서 조산원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내는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낡은 흐름의 조종을 울리는 일이, 어떤 사람은 새로운 흐름의 탄생을 알리는 일이 역사적 사명이 된다.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기가 맡은 시체가 관을 열고 나와 거리를 횡행하는 좀비가 되지 않도록 마무리를 잘하는 게 중요한 법이다. 데이브 히키는 장례식장의 호객꾼 정도로 자기를 보여준다. 구제해야 될 것은 잠시 잃어버렸던 가치다.

히키의 말대로 아름다움은 죽지 않는다. “왕조는 소멸하며 국가는 붕괴한다. 학설은 효력을 상실하며 기관은 영락한다. 그러나 작품은 살아남는다.” 이 불멸의 비밀을 풀 새로운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지점에서, 이 책은 ‘보이지 않는 용’의 귀환을 촉구하는 기원제로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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