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란 무엇인가 - 문화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천재 예술가들
베레나 크리거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고독한 천재 예술가’ 는 낭만주의가 낳은 고정 관념

이진숙의 ART BOOK 깊이읽기: 예술가에 대하여 <1> 베레나 크리거의 『예술가란 무엇인가?』

이진숙 kmedichi@hanmail.net | 제184호 | 20100919 입력 height=0 marginHeight=0 src="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 frameBorder=0 width=0 marginWidth=0 scrolling=no>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자화상’(1908)
예술가란 어떤 사람들인가? 창조의 권능을 행사하는 ‘제2의 신’인가? ‘반사회적인 고독한 천재’인가? ‘세상의 구원자’인가? 사기꾼인가? 아니면 신종 유망사업에 종사하는 비즈니스맨인가?

고흐, 렘브란트, 이중섭…. 진정한 예술가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름들이다. 천재적인 재능과 예술에 대한 열정, 당대의 몰이해, 불행하고 고독한 삶이란 단어들이 묶음으로 함께 떠오른다. 열정과 재능은 부럽지만, 누구도 이들처럼 불행하게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불행은 권장할 일도 아니거니와 다른 길을 걸어온 예술가도 분명히 있다. 루벤스, 피카소, 앤디 워홀 같은 작가들은 생전에 부와 명예를 누렸고 사후에도 그 영광을 반복하고 있다. 드러내놓고 말은 못해도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두 번째 작가들을 희망 모델로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여전히 고흐 류의 작가를 위대하다 할 것이다. 우리는 남(예술가들)의 불행을 즐기는 악당인가? 도대체 예술가들의 불행을 당연시 여기는 이 끈질긴 생각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베레나 크리거의 책 『예술가란 무엇인가?』(조이한 역·휴머니스트·2010·1만8000원)는 이런 예술가상의 유래와 역사를 담고 있다. 예술가는 누구(who)냐가 아니라 무엇(what)이냐고 물음으로써 질문은 ‘예술가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영역을 넘어 ‘예술적 창조성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영역으로 확장된다. 책은 예술가라는 개념을 통해서 본 미술사라는 구조로 질문에 충실하게 답한다.

조형 예술에 종사하던 장인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창조자’의 지위로까지 격상된다. 예술가의 지위가 신적인 위치로까지 상승되면서 예술품의 ‘비합리적인 가격 정책’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즉 예술가의 명성만이 예술품 가격 결정에 있어서 ‘결정적이고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관념이 이때부터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예술가 숭배가 정점에 이른 것은 낭만주의시대인데 예술가에 대한 통념은 이때 대부분 형성됐다. 내면세계로의 탐닉, 반시민적인 태도, 부족한 사회적 인정, 가난·고독으로 인한 고통이 ‘천재’인 예술가들의 중요한 특성으로 묘사된다.

특히 예술가의 ‘반시민적 태도’는 여러 미학자들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칸트는 예술은 상품이 아니며 예술적 활동은 돈을 벌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배고픈 예술가가 철학으로 세례를 받는 순간이다. 경제활동의 의무가 제외되는 대신 더 큰 의무가 부가된다. 예술가는 “더 높은 것, 즉 아름다움과 진실을 통찰하기 위해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는 예술가들에게 더 큰 책임과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한다. 이제 예술은 인류의 보다 보편적인 해방을 구현해내는 매체로 봉사해야 한다. 생시몽은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를 ‘아방가르드(선두부대)’란 군사 용어로 설명했다. 사회의 아방가르드로서 예술가는 자신의 행동을 정치적 행동과 결부시키며 세상의 구원자를 자처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 아방가르드들의 경우처럼 정치가와 예술가가 동등해진다는 것은 매우 유토피아적인 순진한 생각이었음을 미술사는 쓸쓸히 회고한다.

획일화된 대량 상품생산 사회에 이르러서는 아방가르드로서의 예술가의 특수한 역할이 포기된 것처럼 보이고 개성이 배제된 작품들이 미술관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작가의 죽음”이 선언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순간에 다른 유형의 예술가가 등장한다. 바로 앤디 워홀이다. “최고의 예술은 비즈니스다”라는 자신의 말대로 그는 예술(비즈니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은 인기와 부를 쌓았다.

예술가는 이제 반시민적 태도를 버리고 자본주의의 상품 유통 구조에 편입되어 “자신이 계획한 것에 따라서 일하는 날품팔이 노동자”에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좀 더 낫게 표현해도 예술가들은 이제 “독립적이지만 사회 보장 없는 활동을 하는 ‘일인회사’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실 ‘날품팔이 노동자’는 봉건적 압박에서 벗어난 순간 대부분의 사람이 처한 상황이었다. 20세기 중반에 예술가들이 이런 처지가 되었다는 뒤늦은 확인은 결국 예술과 예술가를 둘러싼 모든 환상이 깨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환상이 깨진 자리엔 또 다른 신화가 만들어진다. 데미언 허스트(1965년생)는 2009년 단독 경매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단 하루 만에 1470억원어치의 작품을 팔아치웠다. ‘일인회사의 대표’가 보여준 최고로 현란한 쇼의 한 대목이자 21세기적 예술가 신화의 단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술가들은 실제로 작품의 생산과 판매를 위해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활동해야 한다. 조세의 의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품팔이 노동자’ 혹은 ‘일인회사의 대표’들도 ‘시대와 불화하는 예술’이라는 보편적인 규정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창조성’은 언제나 예술의 제일 덕목이기 때문이다. 예술적 창조성은 “가치 창출에 대한 직접적인 압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가장 잘 발화한다. 소위 ‘고객의 니즈’에 맞추어 만드는 것은 상품이지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미술작품이 고객의 니즈를 배신하면 할수록 결국에는 더 위대해지고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해왔다. 아방가르드로서 기존의 통념에 대해 거부하는 것은 예술적 창조의 제1 원천이다.

시대와 불화하는 예술가들이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저자는 “창조성은 가벼운 정신적 불안정의 상태에서 가장 강하게 형성되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창조성이 극대화되는 ‘가벼운 정신적 불안정 상태’에 있는 예술가들은 더러 사회에 부적응한 괴짜들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괴짜’들이 더 괴짜다울수록, 더 많은 괴짜들이 존재할수록 사회 전체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힘은 커진다.

저자의 말대로 예술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쉽게 죽지 않는 “끈질기게 이승으로 돌아오는 유령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 유령들을 끊임없이 불러내는 영매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요셉 보이스의 말대로, 창조를 향한 충동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창조를 향한 충동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예술가라는 유령들을 찬탄과 비난의 말 속에서 계속 부활시킨다. 고로, 시대와 불화했던 예술가들을 진정한 작가들이라 손꼽았던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악당들이 아니라, 창조성을 극대화한 예술가들을 통해서 대리만족을 하는 소소한 창조성의 범인들일 뿐이다. 그런 사람의 하나로서 나는 한국 사회가 더 많은 창조성의 유령들로 득시글대길 바란다. 탱탱한 창조성으로 긴장된 사회!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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