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상징
칼 융 외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1996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의 인생에서는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 있는 것 같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군대 시절 강원도 전방의 추위이다. 또한 그 시기 자주 들어야 했던 155미리의 포탄은 부대 이전 때문에 수없이 들어 옮겼음에도 제대하는 시기까지 익숙해지지가 않는 무게였다. 그런데 이렇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은 물리적-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존재하는 것 같다.

 

  마치 시간제한 없는 바둑을 두듯, 신중히 고심하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과 판단을 하여 인생의 선택지를 결정했음에도 마음의 불안과 부조화가 익숙해지지 않고 떠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도 그렇고, 여러가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고려해 보면 분명 그 선택지가 맞다. 하지만 마음이 편안하지가 않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은 속일 수가 없다. 의식과 무의식의 부조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시기에 이 책을 만났다. 분명히 나아가야 하는 시기인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마음을 나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꺼려질 정도였다. 책을 읽으며 내내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예전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인생을 살아가며 진짜 중요한 결정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 하게 된다."라는 멘트.

 

  인간과 상징을 읽으며 그 진실 속에서 마음이 날것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거추장스러운 것을 벗어내고 날것이 된 마음 앞에서 주어지는 질문 또한 다시 근본적인 것들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제일 하고 싶은 일은? 내가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것은? 지금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질문은 다소 진부하지만 이 책이 주는 수많은 상징과 통찰들로 인해 이번에는 스스로에게 더 솔직하고 진실된 답변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용기가 생긴다.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 가장 감탄스럽고 강렬했던 책이다. 앞으로 이런 책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지금 시점에서 인생의 책을 꼽는다면 인간과 상징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의 심리학은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향을 추구하고, 그 이외의 것은 잘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인 것 같다. 때문에 개론서는 물론이고 전공서적에서도 대부분 칼 융과 같은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학파에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학적 검증이 불가능한 그들의 이론이 아직까지 살아남고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의 상징적인 이야기가 인생의 진실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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