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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
남재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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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나는 조금 의아했다. 무슨 주제의 책인지,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 책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탓이다. 다만 표지에서 부터 느껴지는 "새빨간 거짓말"의 단면만을 엿본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논제들과 사례, 그것을 뒷바침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주장에 관한 인용 등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그 색다른 접근에 조금 놀라고, 많이 기뻤다.

사람이 말을 하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데, 사람이 뱉어내 세상에 나온 말이 또다시 거짓말을 한다.

우리는 기만의 사회를 살고 있다.

남재일 작가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준다.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목차에서 보듯, 사회 전반 측면의 문제들과 몇몇 논란의 소지가 있는 민감한 문제들(성매매, 사형폐지론, 동성결혼, 양심적 병역거부 등)에 대해 남재일 작가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좀 더 우리 삶에 밀접한 인문학을 접할 수 있다. 현학적인 문장들에 감탄하되, 그것이 곧 삶의 이면을 파고들어 때로는 불편할 정도로 본질을 파헤쳐 보여주는 솜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다양한 화두가 던져지는 만큼 누군가는 거기에 공감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불편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대해 염증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꼭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임에는 틀림이없다.

마치 뇌에 맛있는 성찬을 대접해 사고가 몸집을 불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p.22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현대사회는 권력 작동의 패러다임이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했다고 단언한다. 성과사회는 '온순한 신체'대신 '욕망하는 신체', '복종적 주체'대신 '자발적 주체'를 생산한다. '성과주체'는 자유롭다는 확신 하에 끊임없이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는 존재이다. .......(중략)........ 이런 식으로 성과와 보상 체계를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정시켜, 정형화된 판타지를 생산하는 권력 작동 방식이 '유혹의 정치'이다.

........(중략)....... 자유를 상상할 때조차 그는 성과로 돌아온다. "출퇴근에서 벗어나 해외여행을 다니며 하고 싶은 걸 하려면 역시 돈이 있어야 한다. 더 벌어야 한다." 성과주체는 꿈꾸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성과로 설정된 스타일 속에 감금돼 있다.

p.23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분노하지 않고 짜증낸다. 분노는 적을 향하지만 짜증은 자신의 무능을 향한다. 적대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을 창조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능력에 대한 강박과 무능에 대한 자각으로 지친다. 이 상태가 우울이다. 모든 것이 열려 있는데 능력이 모자라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 우울등이 찾아온다. '허무'가 성취의 방법은 알지만 동기부여가 안 되는 상태라면, '우울'은 동기부여가 과도해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허무가 규율사회의 소수 탈주자가 겪었던 마음 사태라면, 우울은 피로사회의 다수가 직면하는 심리적 현실이다.

이러한 유혹의 정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지배 없는 착취라고 작가는 말한다. 지배자가 지불할 지배 비용조차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완벽한 구조가 아닌가? 이 글을 읽는데 어렸을적 보았던 만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강아지의 목줄에 낚시대 같은걸 걸어서 강아지의 시야 약간 위쪽으로 먹이를 묶어 놓는 장면이다. 강아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먹잇감에 안달을 내며 달려들지만 결국 강아지가 이동한 만큼 먹잇감도 이동하므로 그것은 결코 강아지의 몫이 되지 못한다. 한참을 그렇게 뛰다가 힘에 겨워 땅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다가, 다시 눈 앞에 보이는 먹잇감이 잡힐 것만 같아 다시 추격전을 시작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인간들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무슨 희망고문도 아니고, 차라리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을 아주 작은, 그렇지만 확실히 틈은 있는 가능성을 열어보이고 우리에게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라고 말한다. 더 노력하면 가질 수 있을거라며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욕망하게 하는 어떤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치다가 원하는 것이 잡히지 않고 계속 가능성으로만 머무는 비참한 현실에 결국 비관적이 되어버린다. 가능성이 없다면 외부로 향했을 그 분노가, 가능성은 있었지만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자기반성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반복되면 나는 어느순간부터 나 자신을 '무능한 사람'이라 평가내린다. 그래서 우리들은 슬프다. 우리가 원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때문에. 좀 더 노력하지 않는 자신, 재능없는 자신 때문에.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삶을 천천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게 좋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해왔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모든 것을 결과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내보일만한 결과를 배출하지 못한 우리의 과정들은 괄시받는다. 우리가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얼마나 했는지와는 무관하게. 그러나 우리 자신은 알고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것을 위해 바쳤던 열정과 지불했던 그 무수한 시간들을.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 기준에 맞추어 생각하느라 어느 순간 자기 자신마저 속이며 기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길 바란다. '난 그래도 열심히 했어.' 라는 생각이 '난 정말 열심히 한 걸까? 더 노력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하지만 무슨일에나 '더'라는 생각은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것에 매달리면 늪에 빠진 것처럼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다.

피로사회가 직면한 심리적 현실. 어쩌면 현대의 젊은이들 중 많은 수가 이같은 이유로 그저 백수 백조로 전락해 집에 틀어박힌 것인지도 모른다. 취업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요구 조건은 높아진 동시에 많아졌기 때문이다.

p.76

임금을 대폭 삭감해 얻은 이윤으로 교회의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임금 삭감의 이득은 다수의 이웃에게 고통을 주지만 가치중립적인 '경제적 행위'로 치부되면서 윤리적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반면 이렇게 남은 이득의 일부를 기부하면 선행으로 칭송받으며 단번에 윤리적 영예를 가질 수 있다. 계산에 밝은 인간이라면 어찌 이 방법이 가진 효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지제크는 이런 형태, 다수의 이웃을 괴롭혀 남에게 조금 집어주고 윤리적 행위의 영예는 자신이 갖는 것을 '물질주의적 부인'으로 규정하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만을 윤리적 행동인 것처럼 떠받들면서 이

웃의 진정한 고통은 없는 듯 부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성경에 나오는 말이다. 어떻게 이 글귀를 파고들어 현재 사회의 문제와 하나로 엮어 생각할 수 있었는지. 할수만있다면 작가의 머릿속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다. 얼마나 많은 책과 신문을 읽고 생각하고 고뇌해야 가능한 사고일까.

이 부분은 실제로 사례를 많이 엿볼 수 있는 상황이라 더 공감이 된다. 실제로 기업들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 멀리갈 것도 없이 몇몇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기부를 위한 모금을 요구하고 그것들을 모아 기업이 얼마간의 돈을 더 보탠 후 회사이름으로 기부하곤 한다. 회사는 자연히 인지도가 높아지고,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됨과 동시에 그것을 위한 비용은 절반정도로 해결한 셈이다. 당장 기름값, 식재료값, 아이 분유값등 다양한 물가가 올랐으나 월급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삭감된 직원들의 고단한 삶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참으로 인정머리 없고 이해타산적인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이웃을 사랑하기는 커녕 한 가족안에서도 온갖 불화가 일어나는게 요즘의 사회인 것이다.

p.141

사회구성과 운용의 편리함이라는 실용적 가치를 위해 전체의 이름으로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후순위로 두는 윤리적 폭력이다.

사랑은 남녀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남녀 사이에 존재한다고 혹은 존재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일은 어쩌면 남녀 간 사랑을 내세워 이워지는 결혼에 부족한 것이 사랑밖에 없다는 무의식적 고백일지 모른다. 동성결혼에 대한 낯섦은 이성결혼에 내재한 사랑이 부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적 권력관계가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자의 부정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권력은 반드시 타자에 대한 비교우위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다. 이성결혼이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동성결혼을 부정하지 않고도 존속하리라. 진정으로 이성결혼 제도를 옹호하는 자라면 동성결혼에 손가락질할 시간에 자신의 결혼을 사랑으로 채우는 일에 몰두할 것이다.

동성애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주제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동성결혼에 대해서도 화두를 던지고 있다. 나는 동성애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들이 이성애를 하기에 그것이 좀 더 보편적 관념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 그 자체를 두고 어느 누가 그것의 자연스러움이나 부자연스러움을 입증할 수 있을까. 나는 동성애도 그저 사랑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아동성도착자같은 사람들과 동성애자를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그럼 아동성도착자들의 사랑도 어디한번 사랑이라고 말해보라는 사람들이 꼭 있다. 하지만 아동성도착자같은 질환은 병의 일종이다. 동성애는 병이 아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동성애가 정신적 병이라고 생각되었던 많은 학자들이 억지로 이것을 고쳐보려 했던 여러 사례에서 입증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성도착증 환자와 동성애자를 같은 취급하는 것)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서 동성애자가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이성애자들, 호모포비아들, 동성애자들, 또는 이도저도 아니고 휩쓸려가는 사람들 모두 그들의 입지가 얼마나 좁은지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그들의 권리를 찾아줄 의향은 없는 듯하다. 오히려 인권단체에서 이같은 말이 나오면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역정을 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마치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온갖 죄악을 불러오기라도 할 것 처럼.

그러나 동성애와 이성애를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다면, 이성애를 택하지 않는 동성애자는 몇이나 될까. 괴롭힘 당하고 무시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으니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것 하나는 동성애자가 더럽다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은 그들의 사랑을 오로지 육체적, 그러니까 성적으로 보는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성애자가 이성을 사랑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도 같은 사랑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의 시선때문에 스스로가 동성애자임을 영원히 숨기고 이성과 위장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너무나 안타깝고 믿기 힘든 일이지만 현실에 벌어지는 일이다. 한 번 살고 가는 인생이건만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지도 못하고 거짓된 삶을 살아야하다니. 대체 누가 그들에게 그런 삶을 살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

글쓴이인 남재일 작가의 다른 저서가 궁금해 찾아보다가 누군가가 그의 책에 대한 평에 '밑줄긋기 훈련'을 시키는게 아니냐고 적어놓은 문장을 보았다. 그말대로다. 나는 원래 책을 읽을 때 밑줄을 치지 않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밑줄을 치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밑줄을 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밑줄을 치나 안치나 새책과 구분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였다. (밑줄을 치지 않을 부분이 별로 없으므로)

자본가도 아니면서 자본가의 눈을 가진 외눈박이들을 위한 비평적 에세이


전세계의 부의 90%는 단지 10%에 불과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우리 대다수는 부를 소유한 자본가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지배자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에 만연한 관념들, 현상들, 그것들이 만들어진 이유와 그것이 불러올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끌려간다. 혹은 그속에 자리한 불평등과 어쩔 수 없는 부조리를 느낄지언정 자신은 다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낮은 확률에 매달려 허덕이거나. 자본가는 자본가의 눈을 하고 있는데, 가진게 없는 사람들조차 그것이 정석인냥 그들의 눈을 통해 사회를 바라본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객체화하여 멀찌감치 떨어트려놓고 보이지않는 손처럼 자신을 채찍질하는 무수한 지배자들을 위해 현실에서 고통받는 우리 자신을 와면한다. 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른 이들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한단 말인가? 외눈박이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존재임과 동시에 시야가 좁은 자, 편협한 사고를 가지게 되는 자를 표방하는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남의 생각을 내 생각인 마냥 그대로 읊으며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본다.

우리가 그동안 무심코 받아들였던 정의, 도덕, 문화 그 모든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독서였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가? 좀 더 고민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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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정의 편지
지예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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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장르로 쓰여진 낯선 작가의 책을 만났다.

에로틱 서스펜스라는 장르는 처음이다. 작가가 이 책을 쓰면서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이전부터 존재했던 장르인지는 모르지만 독특한 장르임은 분명하다. 몽정의 편지라는 제목과 표지 디자인 역시 절묘한 분위기로 책의 에로틱함을, 그리고 어딘가모르게 기괴한 느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괜히 제목과 표지때문에 밖으로 들고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집에서만 읽었지만 보면 볼수록 멋진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어떤 디자인이 이 책의 제목과 분위기를 이토록 잘 나타낼 수 있을까? 놀라운 것은 표지의 나온 날씬한 허리의 주인공이 작가 본인이라는 점. 모델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으시던데 역시나, 랄까. 부모님이 예술을 하셨던데 예술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논지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이만 각설하고 책의 이야기를 해보자.

 

나를 거쳐 슬픔의 나라로 들어가거라.

나는 영겁의 고통으로 가는 문

나는 영원히 버림받은 자들에게로 가는 문

......(중략).......

나는 영원토록 남아 있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지어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작가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의 한 구절을 인용했는데, 이 부분이 인상적이다.

책을 읽기 전에 보았을때도 그렇고,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떠올려 생각했을 때 더 그렇다. 이 문장들은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독자인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그야말로 영겁의 고통으로 향하는 지옥으로 빠져버리고 독자인 우리들은 이 책을 통해 지옥과도 같은 그들의 삶을 엿본다. 그로하여금 작가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이야기의 엔딩을 결코 낙관하지 말라고.

<몽정의 편지>는 거의 1년의 시간동안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던 형사가 집 밖으로 나오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의아했다.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보다 미래인 시점에서 시작하기에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아리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롤로그는 짧았고 바로 다음 장부터 나는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보낸 '몽정의 편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 남자가 그 편지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은 물론 아니다. 그 편지를 읽은 다른 사람이 그것에 그 이름을 부여했지만, 아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명칭이 아닌가! 이 편지는 몽정처럼 은밀하고, 에로틱하며, 조금은 파괴적이고, 공개적으로 드러낼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과, 일방향이라는 점까지 빼닮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후에 남긴 것조차 똑같다. 몽정의 열기가 사그라든 후처럼 기묘한 습기와, 찐득한 끈적함, 그와 동시에 지독한 허무가 편지 뒤에 남았다.

 

p.19

당신이 숨 쉬고, 먹고, 자고, 씻고, 가끔은 남자를 끌어들여 사랑을 나누고, 지금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그 공간은 저와 Y가 살아 숨쉬던 공간이었습니다, 저희가 사랑을 나누던 유일한 공간이자, 살아 있음을 느끼던 유일한 공간이었다구요.

 

p.21

사실 Y는 섹스에, 사랑에, 삶에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진지한 여자였어요. 그러나 표현할 줄을 몰랐고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했어요.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안에 뜨거운 불씨를 몰라주고 뭐든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사람인줄 안 거예요. Y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뒤에서는 누구보다 연습을 많이 하고서는 정작, 오디션 장에 가서는 긴장되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배우 지망생 같았어요. 손을 어떻게 쓸 지도, 목소리를 어떻게 낼 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죠. 본인은 정작 심사위원들 앞에서 보여준 게 없으니 떨어져도 속상한 티를 못냈죠. 그래도 나처럼 편한 사람 앞에서는 그 괴로움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는 그게 나만의 특권인 것 같고, 감투라도 쓴 마냥 뿌듯했답니다.

p.28

이럴 땐 당신이 참 밉습니다. 그녀의 냄새와 소리, 모든 것을 문신처럼 새겨둘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못된 당신은 우리가 추억할 공간을 빼앗아버렸습니다. ....(중략)..... Y와 같은 결정을 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혹시나 그런 상황이 생길 것 같다면 본집에 들어가세요. 남은 사람들이 당신을 추억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세요. 급작스럽게 떠나더라도, 추억할 거리 몇 개쯤은 만들어두고 가라는 말입니다.

 

몽정의 편지라 이름붙여진 이 편지는 총 일곱번에 걸쳐 쓰여지고, 같은 횟수로 한 여자의 우편함에 넣어진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D, Y, H 이 셋이다.

편지를 쓰는 인물은 D라는 이름의 남자로, 그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Y를 그리워하며 자신과 Y의 추억이 깃든 반지하방에 새로 이사온 여자인 H에게 이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는 죽은 Y의 흔적과 그들이 함께한 추억을 지워버리는 H에 대한 원망과 Y에 대한 사랑이 녹아들어있다. 자신만 알았던 Y의 이면, Y의 고통, Y의 생각, 그리고 자신의 마음까지.

그 모든 것이 편지에 깊이 배여있었다.

그리고 나는 솔직히 이 장문의 편지들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어떤 점에서 그랬냐고 묻는다면, 글쎄. Y에 대한 그의 사랑? 집착? 이해? 또는 그가 구구절절 내뱉는 그들의 살아온 시간들에 대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음습하고, 어딘가 광기가 잠들어있는 듯 느껴졌던 이 편지들은 바로 그러한 이유때문에 지독하리만치 낭만적인 편지로 여겨졌다.

책 사이사이에 이같은 일러스트가 몇 장 삽입되어 있다. 어지러운 선들의 조합, 그러면서도 강렬한 '이미지'가 책의 분위기와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흰부분이 있으나 빛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직 어두움만이 이곳에 남아있는 것 같다.

p.58

태어난 적도 없던 나의 진짜 욕망이 깨어났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성욕이 아닙니다. 진정한 나의 삶의 이유를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내 모든 것을 파괴해도 좋다고, 너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나 역시도 천천히 파괴되어 가고 있나 봅니다.

나 자신이 망가지더라도 한 사람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겠다는게, 그리고 그것이 결국 Y와의 최종적 결말과 일치한다는 점이 묘하다. <몽정의 편지>라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나도모르게 그들의 이야기에 감명 받았고, 두번째 마주했을 때는 처음과 끝, 그 중간까지 서로 얽혀있는 이 거미줄같은 이야기가 신기해서 감탄했다.

 

D의 심경은 편지를 쓰면서 점점 변화한다. 처음에는 답장 같은걸 바라지 않았지만 점점 자신과 Y의 이야기를 공유하게 된 H에게 코멘트를 요구한다. 요청이 요구가 되고, 요구가 협박이 되며 이야기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린다.

그 뒷 이야기는 생략한다.

하지만 그 파괴적인 결말, 비현실적인 그 마무리가 오히려 너무 당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정말 미안해. 넌 지옥에 오면 안 돼. 앞으로 영영 다시 보지 말자."

이 문장을 읽을 때 느꼈던 짜릿하면서도 섬뜩한, 괜시리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철저하고 완벽하고 훌륭한 희생자'라는 말이 계속 뇌리에 남는다.

결국 모두 세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스스로 버림받은 인물들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 등장한 이들의 사랑은,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그을음을 연상시켰다.

불이나서, 검은 연기를 내며 활활 타들어가다가 마침내 연소가 끝나고 남은 그을음.

사람들은 이 그을음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거기서 맡아지는 매캐한 연기의 잔향을, 타들어간 것들의 괴로움을, 그리고 그것이 남긴 흔적을 오래도록 곱씹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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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와 고블린 네버랜드 클래식 43
조지 맥도널드 지음, 제시 윌콕 스미스 그림, 최순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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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주와 고블린.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또 있을까. 한없이 아름답고 연약한, 동화속에서 무릇 그렇듯 왕자님이 나타나 구해주어야할 것 같은 존재들인 "공주"와 흉측하고 성격이 나쁜 "고블린"의 이야기라니. 사실 책소개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한 공주가 고블린들에게 잡혀가서 왕자님이 모험과 역경을 딛고 구해주는 내용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은이 조지 맥도널드는 그런 클리셰적인 이야기 구조를 깨버렸다. 하긴, 반지의 제왕과 호빗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톨킨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유명한 루이스 캐럴 등 유명 환상소설의 작가들이 조지 맥도널드를 존경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으며 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토로하는 판에, 지금 우리가 클리셰로 알고 있는 많은 부분도 결국 맥도널드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온 경우가 많았을 확률이 높다.

어른이 동화책을 읽다니, 조금 어색한 감이 있을 수 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외로 동화속에는 대대로 칭송받아오는 여러 고전 못지 않은 교훈과 삶이 담겨있다. 통찰력을 발휘한다면 아주 많은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동화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공주와 고블린>을 읽으면서 정말 날 즐겁게 했던 것은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밝힌 작가들의 책을 떠올리면서 '아! 이런 부분에서 영향을 받아서 그 책의 그 장면을 만들어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사랑했던 작품의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되는 것만큼이나 들뜨는 일이었다.

그리고 책에 서두, 1장에서 <왜 나는 공주 이야기를 쓰게 되었나>를 설명하는 조지 맥도널드의 문장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작가님, 작나님은 왜 만날 공주 이야기만 쓰시나요?"

"왜냐하면 어린 소녀는 모두 다 공주거든."


"다만 공주는 자칫하면 자기 신분을 잊은 채 마치 진창에서 자라난 사람처럼 잘못 행동할 염려가 있어. 나는 어린 공주들이 도둑이나 거짓말쟁이 거지의 자식들처럼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 그래서 공주들에게는 자기가 공주라는 걸 일깨워 줘야한단다.그래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쓸 때, 먼저 공주이야기라고 밝히기를 좋아해. 그럼 나는 공주가 지녔으면 하는 모든 아름다운 점들을 주인공인 공주에게 불어넣을 수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술술 잘 풀리거든."


문득 이 문장들을 보는데, <꼬마 니콜라>시리즈와 <얼굴 빨개지는 아이>의 그림작가로 널리 알려진 '장 자끄 상뻬'의 한 인터뷰가 떠올랐다. 상뻬는 행복한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불행을, 슬픔을 모르기에 자기가 지금 행복하다는 사실조차 미처 알지 못하는 그런 행복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이 인터뷰가 떠오른 이유는 현실에서 모든 어린 소녀가 공주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주가 될 수 있는 소녀들이라면 맥도널드의 말처럼 '공주다운' 면모를 가져야 하기에 그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을 알려준다는 점이 좋다.

무엇보다 그의 이야기에서 공주는 누군가에게 구해지는 대신, 직접 광부소년을 구하러 가기도 하고, 스스로 모험을 떠났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이야기가 조금 긴 편이라 초등학교 고학년이상부터 성인까지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이다.

책의 간간이 삽입된 제시 윌콕 스미스의 동화 삽화는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어야 마땅할 작품으로도 보이는데,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그의 그림을 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표지에 그림을 내부에 있는 삽화 중 하나로 대체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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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 - 독방에 갇힌 무기수와 영문학 교수의 10년간의 셰익스피어 수업
로라 베이츠 지음, 박진재 옮김 / 덴스토리(Denstory)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오래도록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전해지는 명작들을 우리는 고전이라 부른다.

하지만 고전은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정작 그 고전을 제대로 읽은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은 한 영문학 교수가 10년간 감옥에 갇힌 죄수들, 그 중에서도 흉악하다 일컬어지는 슈퍼맥스의 죄수들을 상대로 셰익스피어 문학에 대한 수업을 한 실화를 적은 책이다. 책의 저자인 로라 베이츠 교수는 자신이 어릴적 가난하고 위험한 빈민가에 살았다고는 하지만 참 겁도 없지 싶었다. 여성의 몸으로 간수도 동행하지 않은채 죄수들 앞에서 수업을 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날 정말로 놀라게 했던 것은 10대에 저지른 살인으로 가석방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뉴턴이 셰익스피어 수업을 들으면서 그 내용에 대해 말했던 내용들이 때로 너무나 철학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천천히 그의 과거와, 그가 지금 살아가는 환경을 되짚어보면서 오직'생각'만이 그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었음을 깨닫자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고, 너무 다양한 것들의 유혹을 받기에 한가지 일에, 또는 한가지 생각에 온전히 집중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뉴턴같이 오랜 세월을 대화할 사람조차 없이 독방에 갇혀지낸다면 오로지 생각하는 일, 그 자체에 집중할 수 밖에 없을테니 그의 생각이 점점 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혼자하는 생각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뉴턴은 어린시절부터 계속해서 소년원을 들락거리느라 제대로 된 학교 수업도 받지 못했고, 따라서 그가 알고있는 것은 그가 길거리 생활을 하면서 배웠던 것이 전부였을테니 그런 그에게 있어 로라 베이츠 교수를 만난것은 더할나위 없는 행운이며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의 지적욕구를 해소시켜줄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였을 테니 말이다. 물론,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매력적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p.116

"그는 군인으로서 전에는 적을 죽이고 있었을 분인데, 젠장맞을! 이제는 사람들의 창자를 들어내고 있어요. 과거에는 그가 왕을 시해한다는 생각을 못 견뎌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그는 그 생각에 편해졌어요, 살인을 저지르고도 잘 자죠."

그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본성 대 양육이라. 흔한 논쟁거리지."

"그게 여전히 논쟁거리인가요? 제 말은, 모르시겠어요, 정말로?"

그가 물었다.

"어느 쪽이지?"

"당연히 양육이죠, 쌤!

뉴턴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배우면서 그 주인공 멕베스의 심리 변화에 대해서 놀랍도록 통찰력있게 파악한다.. 그러면서 맥베스에게 자신을 대입하여 고전을 그저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아닌 삶, 그 자체로 만든다. 이 책에 내용이 진행되면서 나는 뉴턴과 베이츠 교수가 진행한 무수한 수업들, 그리고 그 수업이 진행되면서 서로 교류하였던 감상과 셰익스피어의 문학에 녹아있는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들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조금 어려운 책이 아닌가 싶었지만 전혀.! 책도 술술 잘 읽히고 우리가 막연히 비인간적이라 생각하는 죄수들에게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는 것, 오히려 그런 면때문에 더 비뚤어진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어 놀랐다. 그들이 인간이라고 그저 생각하는 것과 인간이라는 걸 확인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역시 논쟁거리가 남아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안타까우면서도 해결책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성년자의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처벌이 약한 편이지만, 외국의 경우, 특히 뉴턴이 살인사건을 일으킨 주의 경우 고작 17세의 소년에게 항소의 여지를 주지 않는 가석방없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는 점에서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죄수들은 잘못을 저질러서 벌을 받으려고 교도소에 간 것이니, 그곳에서 어떤 인간적인 대우, 예를들어 교육을 받는다는 등의 대우를 받는 것이 오히려 불합리 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 부분도 영원히 논쟁거리로 남지 않을까? 교육은 사람을 바꾼다. 로라 베이츠 교수와 함께 셰익스피어 수업을 진행하면서 뉴턴이 지난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고, 앞으로의 그의 삶 또한 지금까지와 다른 양상을 띠도록 변한 것 처럼 다른 범죄자들도 교육을 통해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교도소에 간 죄수들의 경우 교도소에서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짊어지고 사회에 나와 더 큰 범죄자가 되는 경우를 여럿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서 비단 뉴턴과 베이츠 교수의 삶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 또한 조금 달라졌다는 걸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고전을 항상 어렵게만 생각하던 사람이 있다면 그 고전들을 만나기전에 이 책을 먼저 만나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책을 읽고나면 셰익스피어의 고전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은 열망에 휩싸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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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기적의 세기

 

 

 

 

 

기적이라는 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기상천외한 일도, 멀게 존재하는 신화같은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기적을 경험한다. 어쩌면 진부한 이야기겠지만, 우리의 첫번째 기적은 탄생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큰 문제없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 배변을 가리고 걸음마를 하고 성장하여 다른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그 모든 것이 기적이다. 평범하고 무난한 삶을 잃어 이탈한 삶의 궤도에서 절망을 맛본 사람만이 그것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잃어버리지 않고도 우리가 기적을 경험하는 시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춘기다. 왜? 혹자는 의문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사춘기는 우리가 변화하는 시기라는 점에서 놀라운 시기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시기에 우리는 너무나 작은 동기, 작은 영향들로 인해 어제의 나와 다른 사람으로 변모한다. 신체가 새로운 성숙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어리숙한 풋사랑을 시작하고,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 대해 스스로의 시각으로 정의를 내리게 되는 시간들. 우리는 체념하고, 때론 타협하고 아픔을 겪고 사랑을 하며 자아를 확립한다. 그 시절에 만들어진 가치관이 우리의 절반, 그 이상을 완성한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때로 우리는 실패하고,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몰고 가기도한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지만 그렇기에 더 아픈 글자로 새겨지는 흔들리는 시간들. 그 시간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번민한다. 사소해보였던 작은 선택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커다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한 개인의 내면에 있어서 그 시기는 기적과도 같은 시간이다.

 

이 책의 주인공 줄리아 또한 이제 막 사춘기를 겪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결코 변할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주변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마주한다. 줄리아는 자신의 내·외면적 변화 뿐만 아니라 살아온 환경마저 뒤틀리는 이변을 겪는다.

 

 

p.11

우리는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느낄 수가 없었다.

매끈한 피부 밑에서 자라나는 종양처럼, 일상적인 하루의 끄트머리에서 조금씩 볼록하게 솟아오르는 별도의 시간을 처음에는 감지하지 못했다.

그 무렵 우리의 관심사는 날씨와 전쟁이었다. 지구의 자전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먼 나라의 도시에서 쉴 새 없이 폭탄이 터졌다. 허리케인이 몰려왔다가 물러났다. 여름이 끝났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시간은 평소처럼 흘렀다. 초가 모여서 분이 되었다. 분이 모여서 시간을 이루었다. 그 시간들이 모여서 언제나 일정한 길이의 하루가 만들어지는 걸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p.13

슈퍼마켓의 물건들은 금세 동이 났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발라먹은 닭 뼈처럼 모든 진열대가 깨끗했다. 고속도로는 이내 꽉 막혔다.....(중략)....갑작스레 불빛에 노출된 작은 동물처럼 그들은 이리저리 허둥거렸다.

물론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구는 연료가 떨어져가는 기차처럼 서서히 그 속도를 늦춘다. 이것이 '슬로잉'이라 불리는 현상의 시작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그 하나의 현상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삶에 크고 작은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 변화들을 미처 체감하기도 전부터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비상식량을 사재기하고 단출한 짐을 싸서 위험을 벗어나려 애쓴다. 하지만 지구전체가 처한 위기에 도망갈 곳은 없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채 속수무책이다. 재밌는 것은 이 소설에서 재난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그 예로, 실제로 2000년대로 접어들기 전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 예언으로 인해 벌어졌던 종말 헤프닝들과 닮아있다.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또 누군가는 애써 평온을 유지하며, 수많은 종교단체들이 각기 다른 태도로 종말을 연상시키는 이 현상을 받아들인다.

 

 

p.49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최초의 며칠은 인간이 느끼는 불안이 예상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했던 날들이었다. 오존층의 구멍, 녹아내리는 빙하,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와 돼지 인플루엔자, 점점 흉포해지는 꿀벌 등의 예를 보면, 우리의 불안은 결국 적중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진짜 재앙은 늘 예상을 빗나간다. 그것은 상상한 적도 없고 그에 맞서 준비할 수도 없는 미지의 이변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만일의 사고를, 최악의 재난을 상상한다. 그것은 무료하고 정적인 삶에서 일탈을 꿈꾸는 탓일수도 있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급격하게 이전과 달라지고있는 환경(꿀벌의 실종, 녹아내리는 빙하등)으로 발현이 예상되는 재앙에 대처하기 위한 보호기작일 수도 있다. 인류는 (지구전체의 역사로 보자면) 짧은 시간에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래서 때로 자만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다가, 마침내 인간이 결코 맞설 수 없는 재앙앞에 무너져내린다. 과연 슬로잉현상을 예상했더라도, 그것을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까?

 

 

p.81

무심결에 내 입에서 기도의 말이 흘러나왔다. 제발, 제발, 아무일 없게 해주세요.

그날 우리는 고대 사람들처럼 하늘의 거대한 힘을 두려워했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일정한 규칙없이 느려지면서 사람들은 그동안 하늘과 천체의 움직임에 대해 너무나 쉽게 예상했던 것들을 더이상 예상할 수 없게 됬음을 깨닫는다. 그 중 하나가 일식이다. 우리는 몇년에 한번 일어나는 일식, 개기일식이 언제 어느지방에서 몇시경에 관측될지 예측한다. 하지만 달라진 지구의 자전 속도 탓에 지구는 마땅히 오리라고 예측되었던 위치에 오지 않는다. 때문에 느닷없이 일식을 마주친 사람들은 그것이 일식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몇 분간 지속된 어둠속에서 지구의 종말을 예감하며 두려움에 떤다. 아주 오래전, 우리가 고대라고 부르는 시절에 사람들은 자연을 신으로 모셨다. 우스운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이 무엇인지 알 때와 알지 못할 때, 동일한 대상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가 천지차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달이 지구의 위성이라는 걸 알 때는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실제로 태양과 달은, 그리고 지구 자전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조수, 계절의 변화 등) 낮과 밤의 변화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의식하며 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안다'는 사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스스로 자만에 빠지고 자신들이 모르는, 비정상적인 것에 대해 병적인 불안을 내비친다. 그 속에서 익숙한 것은 순식간에 낯설은 것이 된다,

 

 

p.121

아는 것이라고는 곧 태양의 움직임에서 벗어난 생활이 시작될 것이라는 점, 빛은 '낮'에서 벗어났고 어둠은 '밤'에서 풀려났다는 점뿐이었다.

 

하루의 시간이 점점 늘어나자 정부는 '클락타임'을 도입한다. '클락타임'은 실제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와 관계없이 그동안의 24시간 체제를 유지하는 제도다. 처음에는 시간이 얼추 맞았지만 점점 시계와 태양의 시간은 어긋나고 한편에서는 클락타임에 반대하는 '리얼타임' 지지자들이 빛의 시간에 의존하는 생활을 고수한다. 대다수의 클락타임 생활자들에게 소수의 리얼타임 지지자들은 처음에는 그 느긋해보이는 삶에 부러움의 대상으로, 그리고 점점 사회의 체제를 따라가지 않는 괴짜들로 비춰진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다수와 다른 소수의 사람들이 언제나 그렇듯 무시받고, 차별받고, 경멸당하며 쫒겨난다. 사람들은 슬로잉현상이라는 환경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스스로의 생활방식을 어쩔 수 없이 바꾸면서도 '변화'를 싫어한다. 그들은 안정과 평안을 바라고 겉으로나마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그 가면과도 같은 생활에 불협화음을 내는 사람은 당연히 거부된다. 결국 리얼타임 지지자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땅에 자신들의 거주지를 만든다.

 

 

p.136

"이제 자려무나. 캄캄할 때 일어나 등교하려면 힘들 텐데."

아빠는 한동안 내 침대 발치에 앉아 창문 너머로 빛나는 푸른하늘을 쳐다보다가 블라인드를 내렸다.

"놀라운 시대야. 우리는 경이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

해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저물었다.

p.138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이 나라에서 매년 삼백육십오 일 치의 일출과 일몰 시간을 그 외의 정보와 함게 명기한 두툼한 연감이 발행되었다는 사실이 지금은 믿기지 않는다. 우리가 하루하루의 명확한 리듬을 잃었을 때, 세상에는 결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공통 인식까지 잃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너무나 당연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 그러니까, 아침에는 해가 뜨고 밤에는 해가 지는, 그런 일련의 일들은 슬로잉 현상을 겪으면서 한때 그런일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믿을 수 없이 놀라운 일이 된다. 일상은 비일상이되고 비정상은 정상이 된다.

 

 

p.147

그 시기를 회상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하나는 우리가 정말 빠르게 적응했다는 사실이다. 한때 익숙했던 것이 점점 낯설어졌다. 우리의 해가 정해진 시간에 뜨고 졌다는 사실이 놀랍게 생각되었다. 내가 한때 외로움도 수줍음도 덜 타는 행복한 소녀였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p.154

우리 모두 나비들이 퍼덕거리며 날아올라 하늘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론 우리는 나비들이 모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들의 삶이 얼마나 짧고 고통스러운지를.

 

재밌다. 

나비의 삶이 고통스러운 걸 아는 것은 '우리 모두' 고통스러운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거나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통. 삶은 때로 아름다워보이지만 그 이면에 얼마나 괴로운 일들로 가득차있는지 아직 모르던 천진한 아이들이 점차 그것을 배우고 있다는 의미이다. 줄리아를 포함한 아이들은 물론 그것을 깨닫기 전에는 알지 못했을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다른 누군가는 알고있었다. 우리 인간들의 삶이 얼마나 짧고 고통스러운지를.

 

 

p.168

"너도 옛날에는 훨씬 용감했는데."

아빠가 시동을 걸며 말했다.

"정말 그랬지. 그런데 이젠 엄마처럼 나약해졌어."

아빠의 말이 옳았다. 나는 크고 작은 재난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는 걱정 많은 소녀로 성장했고, 실망스럽게도 내 눈에는 우리주변의 감추어진 모든 것들이 잘 보였다.

 

사람들은 슬로잉현상 탓에 조금씩 충동적이 된다. 아니, 어쩌면 늘 갑자기 우리에게 불쑥 찾아오곤 하는 충동에게 슬로잉 현상때문이라는 명분을 세워줬는지도 모른다.

아빠는 줄리아를 데리고 해안가의 집으로 향한다. 거기에는 줄리아의 엄마와 결혼하기 전 과거 연인의 집이있다. 그 집에서 아빠는 줄리아에게 과거 그 집에서 있었던 크리스마스 파티, 그 추억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줄리아는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밀물에 불안을 느낀다. 빨리 나가자고 재촉하는 줄리아에게 아빠는 그녀가 변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줄리아는 다른 것 때문에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리아는 이미 아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있었고 아빠가 그녀와 엄마를 떠날까봐, 그래서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된 집에 와 추억을 늘어놓는 것처럼 엄마와 자신이 없는 삶속에서 우리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며 과거로 흘려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느꼈던 게 아닐까. 이 장면은 줄리아의 이런 미묘한 심리와 줄리아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어떤 측면으로든 이전과 달라졌고, 달라지고 있다는 걸 나타낸다. 인간도, 시대도,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그 모든것은 언제나 서서히 변화하고있다.

 

 

p.173

"세상은 변해. 하지만 변하면 안 되는 것도 있어."

엄마가 말했다.

 

변하면 안 되는 것은 있다. 하지만 안 되는 것과 될 수 없는 것은 다르다. 변하면 안 되는 것이 반드시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줄리아 가족의 관계에 있어서 계속 복선처럼 떠올랐다.

 

 

p.196

할아버지는 팔십육 년 생애 가운데 이 년을 알래스카에서 지냈는데, 금광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여러 어선을 타고 다니며 일했다. 하지만 그 이 년은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 스펀지처럼 확대되어 나머지 기간을 압도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누군가에게 들려줄 변변한 일화 하나 없이 수십 년이 흘렀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그것은 실제로 어느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와는 별개로, 그때 그에게 어떤 의미있는 사건들이 있었는지에 따라 다르게 체감된다. 할아버지가 알래스카에서 보낸 몇 년이 캘리포니아에서 보낸 수십년을 압도했던 것처럼. 줄리아가 세스 모레노와 보냈던 그 짧은 시간은 그 이후의 시간을 압도할 것이다. 슬로잉 현상은 상대적 시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쨌거나 슬로잉 현상은 계속 지속되고, 일단 그것에 적응하면 그것은 더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적 시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은 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너무나 짧게 느껴지는 행복한 시간들 뿐이다. 

 

 
p.237
나는 아직도 브래드버리의 단편이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기억한다. 마침내 칠 년이 지나 금성에서 해가 빛나는 날이 오자, 한 남자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부추겨 꼬마 여자아이를 옷장에 가둔다. 해가 뜰 때 다른 아이들은 우르르 밖으로 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굴에 내리쬐는 햇볕을 느낀다. 해가 비치는 시간은 한 시간 뿐이다. 꼬마 여자애는 계속 옷장에 갇혀 있다. 누군가가 옷장에 갇힌 꼬마 아이를 기억해 냈을 무렵 칠 년 후에 나타날 해는 다시 구름 뒤로 숨어 버린다.

줄리아가 학교 숙제로 읽었던 책에 대한 짧은 회상. 브래드버리의 단편에 대한 이 짧은 문단이 나에게 너무나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나는 이 이야기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확한 제목을 모르기 때문에 완벽한 정보를 구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 정발본에 수록된 단편은 아닌듯 하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햇볕이라는 걸 보지 못하다가 7년에 한번, 단 한시간만 그것을 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이 책에서 슬로잉현상이 심화된 후에 줄리아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전율과도 같은 감동, 그 이상의 의미이지 않을까.

 
p.273
"자기장 때문에 고래들이 해변으로 밀려오는 거라고. 고래는 자기장을 이용해 길을 찾거든. 그런데 슬로잉 때문에 자기장에 이상이 생긴거야."
...(중략)....
"고래만 자기장이 필요한 게 아니야."
"우리 인간에게도 필요해."

자기장에 이상이 생기면서 고래들만 죽어나가는게 아니다. 상대적으로 몸집이 큰 고래들의 떼죽음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뿐이다. 작게는 몇몇 곤충, 몇몇 동물들이 제 집을 찾아가지 못할 것이고 인간들이 그동안 사용하던 나침반이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슬로잉현상이 심화되면서 몇몇 사람들은 '슬로잉 증후군'이라 불리는 병을 앓는다. 그것은 실제로 두통이나 메스꺼움을 일으키고 심한 경우 완전히 기력을 잃고 죽어가게 만들지만 본질은 병든 마음에서 비롯된다. 세스에게도 고래에게처럼 길을 찾기 위한 자기장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오랜 병치레 끝에 엄마가 죽고, 일이 바빠 집에는 거의 있지 않은 아빠 사이에서 그는 슬로잉 현상을 맞이한다. 그에게 특별한 친구가 없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하다. 그가 줄리아와 보낸 시간은 어떻게보면 너무나 짧다. 세스는 외로운 아이었다. 그가 매일 방과후에 혼자 남은 빈 집에서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지는 책에서 기술되지 않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세스는 슬로잉 증후군에 걸려버린다. 애써 살리려했던 고래가 이미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됬을 때, 세스는 마침내 무너져내린다. 그의 예민한 감성은 어쩌면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세스를 좋아하는 줄리아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서일까. 나는 어느덧 이 키 큰 꼬마를 사랑하고 있었다.

p.301
"이곳에 있는 우리가 몽상가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야. 우리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아."
"우리는 현실주의자야. 몽상가는 너 같은 애들이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또,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한때 같은 무리에 속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쉽게 다른 사람을 자신과 다른 인격체로 분류하는가.
.

p.360

"패러독스란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가 모두 진실인 경우를 뜻해."

아빠는 그렇게 말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을 잊지마, 알았지? 인생에는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 것도 있어." 

 

사실 이 부분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패러독스.

인간은 모순적이다. 그래서 양 손에 서로 다른 것을 쥐고 둘 모두를 사랑하는 일도 가능하다.

마지막 아빠의 말에는 이 소설의 내용과 그것을 넘어서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져있다. 천천히 그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이야기의 끝 부분에서, 지구는 여전히 매 시간 조금씩 더 느려진다. 일주일 이상의 낮과 일주일 이상의 밤의 시간이 교차한다. 방사선의 위험으로 사람들은 밖이 어두워져야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집집마다 차양막이 드리워지고 많은 수의 동식물이 지구상에서 역사를 마감했으며 인간들은 어쩌면 점점 다가오는 그들의 끝을 기억하기 위해 머나먼 우주로 우리가 한때 이곳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많은 기록들을 쏘아보낸다. 줄리아는 그 뉴스를 보며 오래전 세스와 함께 마르지 않은 아스팔트 위에 적었던 글귀를 추억한다. '우리가 여기에 있었다' 무엇을 적든 아주 오래 남을거라고 했던 세스의 말처럼 그 기록은아주 오랫동안 아스팔트위에,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줄리아의 마음속에 남게될 것이다.

 

소설은 그 이후 그들의 마지막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이대로가면 지구가 언젠가는 멈출거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게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느려졌던 자전은 어느날 또 갑자기 속도를 빨리해 이전과 같은 24시간 체제로 돌아갈수도 있고, 아니면 서서히 속도를 늦추다가 마침내는 멈추고, 그 반대방향으로 서서히 속도를 높혀 자전할 수도 있다. 사실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든 지구 생명체가, 환경이, 사람들이 그 변화에 쉽게 적응하기는 힘들것이다. 그것이 배출하는 결과와는 무관하게 모든 변화에는 성장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져 죽어간 수많은 새들, 자기장의 영향으로 해안가로 몰려와 떼죽음 당한 고래들, 슬로잉의 초반 벌어졌던 클락타임과 리얼타임 지지자들의 대립 등을 대변한다. 결국 이야기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진짜 재난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그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 있다.

 

사춘기와 슬로잉 현상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같다. 하지만 사춘기는 성장하기 위한 발판이라는 점에서 서서히 '멈추는' 슬로잉 현상과 대조된다. 이 책을 읽기 전 내가 기대했던 것은 그 서로 다른 닮은꼴들을 어떤 이야기로 풀어나갔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사춘기의 결과가 그렇듯 이 이야기 속에서 슬로잉 현상을 겪는 사회가 맞이할 결과 역시 '겪어보기 전에는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소설의 끝 부분까지는) 인간은 결국 어느정도의 상처와 아픔을 겪었지만 그 바뀐 삶에 적응함으로서 한 단계 성장했다. 혹자는 인류가 이 슬로잉현상 탓에 퇴보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진보와 퇴보는 종이 한 장 차이고 어찌되었건 인간들은 또다시 살아남았다. 적어도 살아있다면 희망은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많은 철학적인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에 비하면 매우 읽기 쉬운 문체로 되어있다는 점이 놀랍다. 그저 이 책을 시간떼우기 용으로 읽는다면 심심풀이용 책이 될 것이고, 그 내면에 있는 하나하나의 단서를 찾아가며 읽는다면 사유를 위한 책이 될 것이다.

 

문득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사춘기를 겪던 시절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떤 감상을 말했을지 궁금해진다.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들, 이렇다할 사춘기 없이 그 시절을 보내고 어른아이가 되어 뒤늦게 번민하는 시기를 보내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통찰력을 발휘한다면 당신이 찾아헤매던 것을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 약간의 성장통과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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