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때 같은 성에 살았고
김희재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으며, 솔직한 감상을 담았습니다 ***

《우리는 한때 같은 성에 살았고》는 폭력, 기억, 침묵, 망각, 생존이라는 키워드로 읽히는 깊고도 서늘한 연작소설이다. 서로 다른 시간과 삶을 살아가는 네 여자의 이야기가 하나의 상처로 연결되며, 독자는 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의 감옥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천천히 마주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성’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가두게 되는 심리적 구조처럼 느껴졌다. 안전하기에 머물고 싶지만 동시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장소라는 점에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이 소설이 폭력을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희재 작가는 사건 자체보다 그 이후를 바라본다.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서 사람이 어떻게 무너지고, 또 어떻게든 살아가려 하는지를 아주 담담하고 조용한 문장으로 따라간다.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끝내 ‘이소’라는 이름만은 놓지 않는 신영의 모습은 읽는 내내 먹먹했고, 흐릿한 기억을 예술로 재구성하며 자신의 존재를 붙잡으려는 이소의 삶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성희는 돌보는 삶을 통해 죄책감을 견디고, 주연은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자신의 감옥을 부수려 한다. 네 사람은 모두 다르게 살아남지만, 결국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는 존재들이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연작소설이라는 형식 덕분이기도 하다. 각각의 이야기가 따로 존재하는 듯하면서도 어느 순간 서로의 균열과 상처가 이어지고 겹쳐지며 하나의 거대한 기억이 된다. 누군가의 고백이 다른 누군가의 상처와 섞이고, 한 사람의 침묵이 또 다른 사람의 생존 방식으로 이어지는 구성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김희재는 폭력과 트라우마를 단순한 비극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끌어안고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조용히 응시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절망의 이야기라기보다, 끝내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읽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오래 저릿하다. 누구나 자기만의 ‘성’ 속에 갇혀 살아가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일에는 거창한 용기보다 누군가의 이해와 아주 작은 다정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가만히 일깨워준다. 상처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어도, 그것을 품은 채 살아갈 수는 있다는 문장이 책 전체를 흐르는 듯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