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만에 가슴이 떨린다. 마치 섹스의 강렬함에 처음으로 압도된 노처녀처럼 말이다. ㅋㅋㅋ. 섹스 후에 조차도 멈출 수 없는 후희를 즐기는 중이다. 그 뜨거움이 사라지기 전에 우선 고맙다는 말부터 먼저 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필님.

 

 

 

"글을 쓰는 행위는 아마도 애초에 익사하지 않으려고 매달린 나무토막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고립되기 위한 핑계, 각성과 그로 인한 감시와 타인의 관심에서 벗어나려는 속임수였을 것이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선수 친 그가 얄밉기만 하다.

 

 

 

파스칼 키냐르

1948년생.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 내가 좋아하는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 이력도 화려하다.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1993년)

문학 창조에 관한 동화와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삶의 철학과 도덕,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충돌하며 발산시키는 슬픔과, 기쁨 절망과 환희를 환상적으로 조율해 놓은 작품이란다.

본문은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장은 '아이슬랜드의 혹한'에서 언어를 기억하지 못해 일어나게 되는 사건을 다룬 어떤 동화를 쓰게 된 경위를 말한다. 두 번째에서는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라는 동화의 내용이다. 세 번째 '무데사에 관한 소론'에서는 언어, 침묵과 관련된 작가의 유년기에 대해 들려준다. 이어서 이 동화에 자신이 16세 때 또 다시 자폐증에 걸렸던 비밀이 들어 있다고 전제 한 뒤, 다시 총 5부로 나누어 키냐르 자신의 시론과 삶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글쓰기, 그것은 잃어버린 목소리 듣기이다. 수수께끼의 답을 찾아내어 그것을 알아맞힐 시간 갖기이다. 잃어버린 언어 안에서 언어를 탐색하기다. 거짓말 혹은 대체물과 알 수 없는 지시 대상의 불투명성 사이에 벌어진 틈새를 끊임없이 편력하기다. "

 

 

 

"글쓰기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작가가 책을 저술하는 바로 그 순간 추구하는 바는 결코 글을 이입해서 생겨날 작품이 아니라 허탈일 것이다. 그것은 글을 쓰는 바로 그 순간 나 자신에 의한 나 자신에 대한 일체의 반성적 사로잡힘에서 나 자신이 이탈 할 수 있는 가능설이다. 내가 만들어진 곳에 이를 때까지 이탈하는 것이다. 마치 연어가 산란을 위해, 즉 죽기위해 일생 동안 필사적으로 거슬러 오르는 모천이다. 모천에 다다르면 산란하고 죽는다. 글쓰기는 산란하기이다. 산란과도 같은 빈칸이다. 쾌락에서 흘러나온 정액 방울 같은 빈칸이다."

 

 

 

"언어는 하나의 화면이다. 의지는 시야에 생긴 얼룩이다. 의식은 위성 중계하는 악마이다. 이 모두가 살인과 죽음에 봉사한다. 통찰력과 이성, 현재 통용되는 언어는 무한한 정성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끊임없이 고사하는 관목들이다. 우리 내부에서 어떤 토양도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바람 속에서 한결같이 서로에게 매달린다. 우리는 사막에서 쉬지 않고 뿌리를 더듬는다. 끊임없이 어둠과 침묵에 합류한다. 마치 물이 도랑으로 흘러들 듯이..."

 

 

 

그렇다. 도랑으로 흘러드는 물은 결국 바다에 이른다. 가없는 언어의 바다에서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생물들로 넘쳐난다. 누군가는 그 언어의 바다에서 오늘도 낚싯대를 드리우며 월척을 낚는다. 이 시간의 나처럼 말이다.

 

 

 

두 번째 장의 동화까지를 읽을 때는 넘 시시해 우째 이 책을 읽으라 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난 의심이 많은 인간이니깐, 더더군다나 말이다.

 

 

 

죄송혀요, 필님.

 

 

 

오랫동안 내 안에 무정형 상태로 아우성쳐대는 언어의 욕망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익사할 지도 모르는 내 현실에 글쓰기는 단연코 하늘이 내려주신 밧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내 언어를 하나하나 고르게 되었다. 누군가 말했다. 그것은 마치 자신내부의 달빛 건지기와 비슷한 것이라고. 달빛을 건질 수 있는 내가 되어 행복한 시간이다. 아마도 오랫동안 나도 키냐르와 함께 허탈을 경험할 것이고 종내는 어떤 단어가 어떤 문장이 내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순간을 지나 수태의 순간이나 융합의 장소로 이동하는 순간을 경험할 것을 믿는다.

 

"키냐르의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다른 책 1000권을 읽는 것과 다름없다."

 

그를 만나기 위한 다음 여행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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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벽이 되는 과정은 가히 상상도 하기 싫은 만큼 폭력적이다.

벽 앞에서 본능 적으로 절망하나 생존하기 위해 자신 또한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벽이 되어 버리고 마는 인간의 실존,

나 또한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

 

정용준 소설집 가나 중에 ‘벽’을 만났다.

 

 

 

공원 벤치에 누워만 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그저 누워만 있었다. 어느 날, 남자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단정한 하늘색 투피스차림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핑크색 립스틱을 칠한 사십대 여자, 그저 누워 있는 남자를 향해 ‘선생님’이라는 경어를 붙이며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이웃을 사랑하는 시민연대> 총무 한 연주, 남자의 눈에 유독 ‘이웃’‘사랑’이라는 단어가 도드라졌다. 남자는 그녀에게 신분증과 명의를 빌려 주는 댓가로 국가에서 주는 첫 번째 지원금 오십 만원을 받는다. 그것의 결과로 <한국신용협회> 소속의 과장 박종식에 의해 염전이 있는 굴도로 끌려간다. 그리고 오직 숫자 21이 된다. 숫자 1,2,3....염전의 증발지에 속한 사람들의 주민등록증... 그곳에서 상상하기 싫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폭력과 마주친다. 햇볕 아래서 하루 종일 쌓여만 가는 소금을 긁어모으느라 쉬지 못하지만, 그 마저도 능률이 오르지 않으면 무차별 적인 폭력으로 흔적 없이 죽어 나가거나, 초점 없는 눈을 뜨고만 있는 벽이 되고 만다. 그리고 오직 숫자 21이 된다. 숫자 1,2,3....염전의 증발지에 속한 사람들의 주민등록증... 그곳에서 상상하기 싫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폭력과 마주친다.

 

 

 

극단의 폭력과 모멸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앗아간다. 죽음이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곳에서는 죽는다는 것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염전에서의 죽음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죽음이 너무도 사소하고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능은 다르다. 때리면 맞지 않으려고 몸을 웅크린다. 본능은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가장 정직한 반응 중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본능을 일으키는 지속적인 자극은 노력으로 이어진다. 몰아붙일수록 삶의 포기는 선명해지고 생존 본능은 강해진다는 원리는 사내의 생각 중 가장 창의적인 것이었다. 염전은 생존 본능이라는 에너지를 동력 삼아 움직이는 낡은 기계와 같다. 탈출의 욕망보다는 잡힐 것이라는 두려움이, 불만보다는 지금의 상태라도 유지하고 싶은 무력감이 지배하는 땅, 모든 곳이 벽으로 막혀 움직일 수 없는 염전에 실꾼들이 숨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그들이 함께 모여 웅크리고 자는 막사뿐인 곳이다.

 

 

 

염전의 구성원인 9에 대한 서술이다.

 

 

 

“9는 더 이상 염전 너머를 보지 않는다. 보게 되면, 보고 싶은 것이 생긴다. 보고 싶은 것이 생기면,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없는 현실이 괴로운 법이다. 충분히 괴로운 상황이다. 이 상황에 결핍감을 보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떤 이에게 희망이 살아갈 힘을 줄지 모르지만 이곳에서의 희망은 마약과도 같다. 희망은 거짓 기대와 헛된 욕망을 만든다. 기대와 욕망은 몸에 열을 공급한다. 배출되지 않고 누적되는 열은 결국 자멸에 이르게 한다. 자멸은 곧 벽이다. 염전에서의 희망은 벽 앞에서 늘 산산이 부서져왔다. 9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그 어떤 것도 희망하지 않는 무감한 마음을 갖는 것이었다.”

 

 

 

눈물이 났다. 나에게 남아있던 유일한 희망, 그 어떤 것도 희망하지 않는 무감한 마음을 갖는 것, 그런 내 한 시절이 스쳐갔다. 내가 마주칠 수 있는, 우리가 바라다 볼 수밖에 없는 벽은 도처에 있다. 다만 벽의 색깔과 강도만 다를 뿐. 벽은 곧 한계의 결정판이 되고 나, 우리의 나약성은 벽 앞에서 처절하게 드러나고 만다. 무감한 마음을 갖는 것으로.

 

 

 

그들이 모여 함께 웅크리고 자는 막사, 절망 속에서도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쓰면서 절제가 쉽지 않다. 감정의 결핍과 과잉을 조절하는 것이 내 글쓰기의 관건임을 느끼는 즈음이다. 치밀하지만 거리두기를 완벽히 구현해 낸 작가가 참으로 부럽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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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헨릭은 어느 날, 쌍둥이 형제처럼 지낸 절친한 친구와 사랑하는 아내에게 기만당한 것을 안다. 존재를 뿌리까지 송두리째 뒤흔드는 이 갑작스러운 사건은 결국 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한다. 친구 콘라드는 말 한마디 없이 세상의 다른 끝으로 정적을 감추고, 삶의 양지 쪽에서 부족함 없는 삶을 영위하던 헨릭은 배신감과 절망에 휩쓸려 고독으로 칩거한다. 그리고 한 집에 살면서도 가혹하게 팔 년 동안 침묵을 지키는 남편과 비겁하게 도주하는 연인 사이에서 헨릭의 아름다운 부인은 결국 죽음을 택한다. 그러나, 헨릭, 노 장군은 사랑서 친구를 기다린다. 오로지 이 기다림 때문에 그는 분노와 절망, 고독 속에서도 오랜 세월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그는 보이는 현실 이면에 숨어 잇는 진실, 즉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마침내 죽음을 앞둔 인생의 황혼에서 콘라드가 돌아오고, 헨릭의 독백이나 다름없는 대화를 통해 사십일 년 전 서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겼던 세 사람을 파괴한 드라마가 서서히 우리 앞에 펼쳐진다. 마라이는 오모하게 결합한 수정의 한 면 한 면을 보여주듯이, 짧고 응축된 언어로 비밀에 덮여 있던 지난 사건을 불러낸다. 동시에 그는 사랑과 정열, 우정과 신의, 진실과 거짓, 자긍심에 대한 문제를 냉정하고 단호하게 끝까지 파고든다. 성찰과 사건은 서로 맞물려 긴장을 고조시키고 사건의 깊이를 더하면서 사랑과 증오, 배반과 분노의 교향곡을 엮어낸다. 이와 같이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끝까지 추적하면서도 극적 긴장을 유지하고 독자를 사로잡는 뛰어나 기교에서 마라이의 높은 예술성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왜 그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런 비극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과연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작가 마라이는 사랑과 우정이 빚어낸 비극의 원인과 비극 앞에 선 인간의 혼란과 갈등을 파헤치기 위해서 인간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여러 가지 존재론적인 문제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예와 신의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고 현실의 삶에 충실한 부류와, 현실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정신과 예술을 좇는, 삶의 다른 기슭에 선 부류, 두 부류로 인류를 가르는 인간 존재의 이원성, 운명과 삶과의 관계, 타고나 본성이나 성격이 삶에서 하는 역할의 문제 등이 집약적으로 전개된다. 결국 마라이는 우리 인간들은 살면서 부딪히는 중요한 문제들에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 생애로 대답한다고 결론짓는다.

 

 

 

긴 밤을 지새면서 지난 일 을 돌이킨 다음 새벽 녘, 일흔다섯 살의 노장군은 말한다. .“어느날 우리의 심장, 영혼, 육신으로 뚫고 들어와서 꺼질 줄 모르고 영원히 불타오르는 정열에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고 자네도 생각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헛산 것이 아니겠지?” 목숨을 바칠 정도로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죽게 내버려둔 그의 회한어린 이런 고백에서 우리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성과 이 본성에서 비롯되는 운명에 대한 깊은 인식이 깔려 있다.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잘 모를 뿐 아니라, 안다 해도 대부분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동한다.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나머지 인생을 보내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다는, 죽음을 앞 둔 노인의 고백 앞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소설 <열정>이 발표된 지 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 다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소설의 외면적인 구성은 간단하다. 어린 시절부터 24년 동안 거의 언제나 형제처럼 붙어 지냈던 두 친구가 헤어진 지 사십일 년 만에 만나 하룻밤 동안에 나누는 대화가 소설의 내용을 이룬다. 그러나 이 간단해 보이는 소설의 배후에는 삶과 운명, 사랑과 진실에 대한 마라이의 깊은 인식과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존재의 심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심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묘사한 문학은 예로부터 시공의 제약을 뛰어 넘어 많은 이의 마음을 사로잡고 힘을 발휘했다.

 

 

 

작가 마라이는 인물과 사건을 가차 없이 냉정하고 정밀하게 해부하고, 의식적으로 정확하게 언어를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언어는 수식이 없이 간결하면서도 낱말이나 문장 하나 하나에 깊은 뜻이 응축되어 있다. 이 시적인 깊이로 인해서 그의 문장들은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지면서 한 편의 시와도 같이 독자를 빨아들인다. 감동적인 선율이 인간의 마음을 울리고 긴 여운을 남기듯이, 그의 글은 마음 깊이 파고들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과연 우리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삶이 많은 장벽을 뛰어넘어 사랑과 우정의 법칙에 충실했는가?

 

 

 

이 글들은 책 뒷면의 옮긴이의 글을 재구성한 것이다. 내 글쓰기의 방향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한다.

 

이런 주인공 하나 쯤 만들고 싶은 이 욕구는?

 

 

 

 

여기 이야기속의 한 주인공인 크리스티나를 묘사한 헨릭이 말이 있다.

 

그녀의 혈관에는 여러 종류의 피가 흘렀어.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게다가 아버지쪽 친척의 폴란드 피 한 방울...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말로 규정하거나 확정짓기는 매우 어려웠네. 어떤 민족, 어떤 사회 계층도 그녀를 완전히 싸안을 수 없었어. 계급이나 혈통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를 자연이 한 번 창조하고자 시도한 것 같았지. 그녀는 마치 동물 같았네. 정성 어린 양육, 기숙사 학교, 아버지의 교양과 애정은 크리스티나의 행동거지만을 바로 잡았지. 그녀의 내면은 길들이지 않은 야성 그대로였어. 내가 줄 수 있었던 모든 것, 재산과 사회적 신분은 사실 그녀에게 별 가치가 없었네. 이 내적인 자유분방함, 그녀의 본질을 이루는 자유에의 충동 때문에, 내가 그녀를 인도한 세계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 그녀의 자부심은 신분, 혈통, 재산, 사회적 지위나 특별한 개인적인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는 달랐어. 크리스티나는 그녀의 심장과 신경 속에 독소처럼 깃들여 있는 고귀한 야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 이 여인은 내적으로 구속이라는 것을 몰랐네. 오늘날 그런 사람을 보기가 어려워. 구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아주 드물지. 분명히 그것은 혈통이나 사회적 신분의 문제가 아닐세. 그녀는 모욕이라는 것을 몰랐네.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설 줄 몰랐고, 제한이라는 것을 참지 못했지. 게다가 그녀에게는 여자들에게서 보기 드문 점이 있었네. 그녀는 자신의 내적인 품위를 책임질 줄 알았지. 자네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나? 자네도 틀림없이 기억할 게야. 그녀 아버지의 악보가 커다란 책상에 널려 있던 방에서였지. 크리스티나가 들어오자 작은 방 안이 온통 밝은 빛으로 채워졌네. 그녀가 가져온 것은 젊음만이 아닐세. 아니, 그녀는 정열과 오만, 조건 없는 감정을 좇는 자유로운 자의식을 가져왔지. 그 이후로 나는 세상과 삶이 선사하는 모든 것에 그렇게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네. 음악, 숲에서의 새벽 산책, 꽃의 색깔과 향기. 예지에 찬 말 한 마디, 우아한 천이나 동물을 크리스티나처럼 어루만질 수 있는 사람은 없네. 나는 삶이 주는 소박한 선물에 이 여자처럼 기뻐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어. 사람과 동물, 별과 책, 그녀는 모든 것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지. 그러나 잘난 척하거나 전문 지식에 사로잡힌 고루한 사람들과는 달랐네. 삶이 보여주고 선사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애정을 가지고 인생을 즐기는 사람의 선입견 없는 기쁨이었지. 이 세상 모든 현상이 그녀의 개인적인 일인 듯이. 이 선입견 없는 친밀함에는 겸손, 삶이 커다란 은총이라는 인식이 배어 있었네.

 

 

보통은 이야기 줄거리를 본류를 해서 소설을 구성해 나가지만 그녀, 크리스티나의 묘사를 읽어 내려가면서 느낀 생각은 소설속의 인물 설정을 먼저 한 후에 그 인물을 중심으로 소설을 구성해나가는 방법으로의 글쓰기를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깊어가는 새벽에 나는 크리스티나 적인 인물을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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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안내문은 그게 일시적인 문제라고 했다."

그렇게 소설은 시작한다. 쇼바와 슈쿠마라는 삼십대의 젊은 부부는 삼년 동안의 결혼생활에서 얻은 아이를 유산하게 된 전, 후의 일들을 담담히 써내려간다.

점점 그들 사이에 일시적인 문제처럼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을 메꾸려 진실게임 같은 것을 하지만...

"슈쿠마는 쇼바의 잔에 다시 와인을 따랐다. 그녀가 고맙다고 했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이제 그는 그녀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를 하려고 무척 애써야 했다. 그녀가 음식 접시에서, 아니 교정지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게 하는 이야기를 하려면 말이다. 결국 그녀를 즐겁게 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는 침묵에 개의치 않는 법을 배웠다." <30/일시적인 문제>

"그동안 아파트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하나 찾았어."

쇼바가 그의 왼쪽 어깨 너머의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려는 듯 군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어, 말을 이었다. 우린 고통을 겪을 만큼 겪었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독 했다. <42>

쇼바가 전등을 끈 것이다. 그녀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앉았고, 잠시 뒤 슈쿠마도 쇼바와 자리를 같이 했다. 두 사람은 이제 자신들이 알게 된 사실 때문에 함께 울었다.<45>

 

 

비로소 부부는 그들 사이의 균열을 메울 말하지 않았던 말들을 뱉어내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함께 울게 된다.

 

 

잠깐 소설가 정이현씨의 말을 들어보자.

 

 

어떤 책에는 길고 장황한 헌사가 필요치 않다. 세상엔 한 문장의 설명만으로도 짧은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책이 존재한다. 『축복받은 집』은 줌파 라히리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라히리는 미국에 거주하는 40대 중반의 여성작가이며, 오 헨리 문학상과 펜/헤밍웨이 문학상, 퓰리처상 등을 수상했고 올해 맨부커상의 강력한 후보였다. 그가 동시대에서 소설을 가장 잘 쓰는 현재진행형의 작가들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처음 그의 소설을 읽었을 때가 생생하다. 책을 가만히 덮고서 나는 읊조렸다.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플롯은 정교했으며, 문장은 건조하고 정확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이 내 영혼의 어딘가를 관통했다는 것을.

 

 

 그 뒤 우리나라의 작가들이 라히리에 대한 애정을 수줍게 고백하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좋더라. 좋지? 우리끼리는 그런 함축적인 대화면 충분했다.

 

 

 작가들이란 웬만해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입 밖에 내어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재능을 내심 부러워하거나 선망하기는 해도 여간해서 탄복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라히리는 ‘작가들의 작가’이며, 특별히 빛나는 그의 단편선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새로운 고전의 지위를 확보해 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재번역된 『축복받은 집』에는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맨 앞에 수록된 ‘일시적인 문제’의 주인공은 젊은 부부다. ‘안내문은 그게 일시적인 문제라고 했다. 닷새 동안 오후 여덟 시부터 한 시간 동안 단전이 된다는 것이다.’(15쪽) 아이를 사산하는 사건을 겪고 난 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로를 미워하던 남녀는 매일 강제되는 한 시간의 어둠 속에서 의외로 편안함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 그들의 마음은 차츰차츰 풀어지고 암흑은 역설적으로 상대의 눈을 마주보게 한다.

 

 

 독자는 궁금해진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는 회복되고 다시금 행복해졌을까. 작가는 현실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마법은 없다고, 그걸 몰랐느냐고 냉정히 되묻는다. ‘두 사람은 이제 자신들이 알게 된 사실 때문에 함께 울었다.’(45쪽) 비로소 독자는 우리의 삶이란 일시적인 문제의 총합이자 거대한 전체의 한 부분일 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라히리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닿을 듯 말 듯한 진심에 대하여, 한 순간 닿았다고 믿었지만 실은 결코 닿은 적 없었던 관계의 아슬아슬한 비밀에 대하여 날카롭게 포착하여 서늘하게 묘파해 낸다. 칼날을 숨긴 채 예리하고 깊은 자상을 남긴다. 그가 ‘경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인도이민가정에서 성장한 인도계 미국인 2세이고 작품 속에 미국에 거주하는 인도계 미국인 가족을 즐겨 등장시키는 까닭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호명은 적확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다. 모든 좋은 문학은 결국 경계의 문학, 혹은 이민자 문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를 떠나온 사람들이고, 또 어딘가로 떠나가는 사람들이니까.

 

 

흔들려도 선뜻 떠날 수 없는 계절, 이 소설을 조용히 권하고 싶은 이유다.

 

 

 

 

 

 

 

 

 

 

 

 

 

 

 

 

 

편혜영의 <몬순>

 

단전은 두 시간 동안이라고 했다.

단전이 될 아파트의 주민인 태오와 유진. 부부인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위기감이 도사린다. 이직한 사실을 아내에게 제대로 말하지 못한 태오, 단전이 되는 날 불 꺼진 어두운 집에 그대로 남아 있겠다는 유진.

"우진 씨한테 물어도 믿을 만한 얘기는 별로 말해주지 않았어요. 바람은 부는 방향이 바뀐 후에야 정확한 풍향을 알 수 있다고만 했어요. 내가 다시 물어보니까 등압선을 보면 풍향을 짐작할 수는 있다고 얘기해줬어요. 확신할 수 없지만 짐작할 수는 있다고 말입니다. 그저 최선을 다해 짐작할 뿐이라고요” <29/몬순>

그저 최선을 다해 짐작할 뿐인 우리 삶의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그로 인하여 우리 삶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리에 짙게 깃들어 있는 불안이 적절히 비유되어 있는 문장과 상황을 그린다.

 

 

정전 그리고 아이를 잃은 부부라는 설정이 줌파 라히리의 단편 <일시적인 문제>와 자꾸 오버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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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리의 죽음

 

 

6페이지에 해당하는 엽편소설이랄까...

 

  어느 멋진 저녁, 이에 못지않게 멋진 회계원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뱌코프는 객석 두 번째 줄에 앉아서 오페라글라스로 '코르네빌의 종'을 보고 있었다. 공연을 보면서 그는 행복의 절정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눈을 희번덕거리며 숨을 멈추었다. 그는 오페라글라스에서 눈을 떼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에취!!! 보다시피 재채기를 한 것이다. 그 누구라도, 그 어디에서라도 재채기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농부도 경찰 서장도, 때로는 심지어 국장님도 재채기를 한다. 누구나 재채기를 한다. 체르뱌코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다음 예절 바른 사람답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재채기 때문에 남에게 폐를 끼친 건 아닐까?  한데 저런, 당황스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는 앞의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던 노인이 자신의 대머리와 목을 장갑으로 열심히 닦으며 뭐라 투덜거리는 것을 보았다. 체르뱌코프는 그 노인이 운수성에 근무하는 브리잘로프 장군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중략...

 

  "각하, 저는 어제 와서 폐를 끼친 사람입니다만"

  장군이 그를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자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건 각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놀리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만 재채기를 하고 침을 튀긴 것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려던 것이었지, 놀리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감히 각하를 놀리겠습니까? 만약에 제가 웃었다면 그건 높으신 어른에 대한 존경심 때문입죠. 제가 설마..."

  "꺼져!!"

  장군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빽 질렀다.

  "뭐라고요?"

  체프뱌코프는 두려움에 질려서 속삭이듯 물었다.

  "꺼지라니까!!"

  장군이 발을 구르며 되풀이 말했다.

  체르뱌코프는 뱃속에서 무언가가 터져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로 그는 문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흐느적흐느적 밖으로  걸어나갔다.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기며 집에 돌아온 그는 관복을 벗지도 않은 체로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죽었다.

 

 

 

인생이란 그처럼 예기치 못한 일로 가득 차 있으니까!

 

 

예기치 못한 재채기를 하고 예기치 못한  상대에게 재채기에 대한 사과를 하기 위해  계속 상대를 찾아가 하소연을 하는 주인공.

"꺼져"라는 말을 듣고 두려움에 질려 결국 뱃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죽은 인물...

이건 블랙 코메디인가?

갑자기 머리속이 복잡해져 온다.

 

그는 왜 죽었을까?

 

2. 공포

 

  나는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의 농장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해 한번 가면 이 삼 일 정도 묵곤 했다.  나는 그의 집과 정원을, 넓은 과수원과 개울을, 그리고 다소 나른하고 현학적이지만 명쾌한 면도 있는 그의 철학을 좋아했다. 그 사람 자체를 좋아했다고 말할기는 좀 어려운데, 그건 아직까지도 당시의 내 감정을 정확히 해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똑똑하고 친절하고 흥미로웠으며 또한 진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내밀한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우리의 관계를 진정한 우정이라고 말했을 때, 내가 웬지 꺼림칙하고 부담스러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에 대한 그의 호감 속에는 무언가 거북한 압력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로 지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그의 아내 마리야  세르게예브나가 너무도 너무도 내 마음에 들었다는 점에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과 눈, 목소리와 걸음걸이를 좋아했으며 한동안 못 보면 그녀가 그리워졌다.

  어느 칠월의 일요일, 나와 드미트리 페트로비치는 소일 거리 삼아 클루쉬노라는 큰 마을로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갔다. 그곳에서 <40명의 순교자>란 이상한 별명으로 통하는 가브랄라 세베로프를 만난다. 가브랄라는 한동안 나의 하인이었고 드리트리 페트로비치의 집에서도 일한 적이 있었는데 지독한 술꾼이었고 술과 방탕에 절어 산 인물이었다. 가브랄라의 아버지는 신부였고 어머니는 귀족이었던 출신상 특권층에 속했지만 신학교를 다니다 담배를 피운 일 때문에 퇴학을 당하고 주교청 직속 성가대에서 노래를 했으며 수도원에서 2년 정도 살다 쫒겨나기도 하다 결국 우리 군에 눌러앉아 하인, 산지기, 사냥개지기, 교회 수위 노릇을 닥치는 대로 하다가 바람난 과부 요리사와 결혼했다가 아내가 종적도 없이 사라진 인물이었다.

  "저는 오로지 한 가지 원인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죠. 그게 무엇인지는 하나님께 여쭤봐야 할 일이지만 말입니다."

  뇌까리며 구걸을 하는 가브랄라의 말을 무시하는 드미트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말 좀 해보시오. 친구. 무시무시하거나 비밀스럽거나 환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어째서 실제의 인생으로 부터가 아니라 꼭 유령이나 저승 세계에서 소재를 취하는 것일까? 당신은 저승 세계보다 인생을 더 잘 이해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인생이나 저승 세계나 매한가지로 불가해하고 무섭습니다. 유령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나도, 저 불빛들도, 그리고 저 하늘도 두려워해야 마땅하지. 왜냐하면 이 모두가 잘 생각해보면 저승의 망령들만큼이나 불가해 하고 환상적이니까.

중략...

  나는 삶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두려워해요. 어쩌면 나는 환자이거나 어딘가 잘못된 인간인지도 모르지. 정상적이고 건강한 인간은 자기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여길 테니까. 하지만 나는 이 <어느 정도>라는 느낌을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 공포에 중독되고 있어요.<광장공포>라는 병이 있지만, 나의 병은 삶에 대한 공포지요. 풀밭에 누워서, 어제 막 태어나서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딱정벌레를 한참 동안 보고 있으면 그 벌레의 삶이 끔찍한 일로 가득 찬 것 같고 그 미물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중략...

  만약에 인생의 목적이 쾌락에 있다면 저들은 불필요한 여분의  인간들입니다. 만약에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난과 저대적인 무지 속에 있는 것이라면 이런 가혹한 심판이 누구룰 위해서 필요한 일인지 모르겠지요. 나는 아무도,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라고 말하며 자신의 결혼생활이 가장 큰 불행이자 공포라고 고백을 한다.

  드미트리의 아내를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진 나는 혼란에 빠진다. 드미트리가 삶이 무섭다는 말을 한 것에 <그렇다면 삶에 대해 격식을 차리지 말라고. 삶이 나를 짓누르기 전에 네가 먼저 삶을 부숴버려. 삶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취하란 말이야.>라고 생각을 하며 드미트리의 아내 마리야 세르게예브나를  취한다.

  하나 드미트리가 나와 자신의 아내의 불륜을 짐작하고

  "나는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놈이었던 모양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이해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에게 축하를 드리지요. 내 눈에는 사방이 컴컴해보여요."

  말하며 손을 떨고 두렵고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간다.

  나는 곧 밖으로 나가다 <40명의 순교자>가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야!"라고 외치며 주정을 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드미트리의 공포가 나에게도 옮겨졌다. 벌어진 일을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갈까마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들아 날아다닌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두렵게 느껴졌다.

  "나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나는 자괴감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째서 꼭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되었을까? 다른 방식은 없었나?"

  그날 나는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시는 드미트리와 그의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

 

공포의 등장 인물 모두는 삶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두렵다고 하며 혼란스러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계속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 말로는 그들이(드미트리와 그의 부인) 지금도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럼,

 

계속될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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