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 국문학 교수들이 추천한 글누림세계명작선
다니엘 디포 지음, 김경섭 옮김, 한창훈 해설 / 글누림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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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데이(Friday) vs 방드르디(Vendredi)

- 로빈슨 크루소, p562, 글누림 출판사, 서울 : 대니얼 디포, 2011. 12

1709년 2월 2일 칠레 해안에서 650㎞ 떨어진 태평양의 무인도 마사 티에라 섬 근처를 항해하던 영국선적 듀크호 선장은 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그 섬에 상륙한 몇 시간 뒤 선원들은 염소 가죽을 온몸에 두른 맨발의 한 남자를 붙잡아왔다.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개해 보이는 그는 한참 동안 말을 더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람을 본 게 4년 4개월 만이라고...”

1704년 10월, 사략선 (私掠船, privateer 국가로부터 특허장을 받아 개인이 무장시킨 선박) 의 선원이었던 A. 샐커크는 동료들과의 불화로 이 섬에 버려진다. 당시에는 이렇게 외딴 섬에 버려두는 형벌은 흔한 것이었으며, 버려진 이는 굶주림으로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야생 염소와 바다표범, 산딸기로 연명하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1709년 2월 그는 듀크호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 배의 선장 로저스의 《세계 항해 이야기》를 통해 전 영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논픽션(Non-Fiction)이다. 여기에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이 덧붙여져 픽션이 탄생했다. 그 소설(Fiction)이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이다.

소설의 주인공 로빈슨은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원이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었다. 세상을 두루 살펴 견문을 넓히는 게 꿈이었던 그는 마침내 가출을 감행하여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듯 했다. 그러나 그가 승선했던 배는 조난을 당하고 그는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브라질에 안착한다. 그 생활도 잠시 자연의 섭리(사탕수수 농사)에만 성공을 맡기는 것이 분에 차지 않았던 그는 운명처럼 항해의 길로 또 나선다. 그러나 그 항해마저도 또 난파를 당하고 육지에 혼자 도착한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지만, 도착한 곳은 육지가 아니라 사방은 바다로 둘러싸이고 저 멀리 보이는 암초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그만 섬 두 개 외에는 육지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섬이었다.

그는 이어지는 불행의 끝자락에서 왜 신은 당신의 피조물을 이렇듯 무참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타격하시는 건지. 태어난 것조차 뼈저리게 원망할 만큼 구원의 손길조차 닿지 않는, 이렇게 완전히 무시된 구렁텅이 속으로, 처넣어 버리시는 건지. 이건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묻고 또 묻는다. 그러나 살아남는 게 더 급했던 그는 괴로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보고자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즐기자는 심정으로 조금씩 변해간다. 그리고 마침내 필요한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만드는 경지까지 이른다. 무인도에서 외로운 생활로 지치고 아프고 쇠약해지면서 죽음과 양심에 대한 생각으로 자신을 돌아본다.

그렇게 그는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기의 진수를 보여줄 즈음(무인도에 도착한지 25년 즈음) 이방인이 그의 섬을 침범(?)한다. 우여곡절 끝에 야만인을 구출하고, 그 야만인을 노예로 삼는다. 그리고 그를 프라이데이(야만인)라 부르고 교화하여 훌륭한 헬퍼로 만든다. 그 후 외딴 섬에 온 영국 배의 반란을 진압하고 28년 섬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귀환한다. 그렇게 집을 떠난 소년은 35년 만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20세기에 접어들자 서구 근대 문명과 제국주의 경쟁이 인류에게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자 로빈슨 크루소의 신화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에 프랑스의 한 작가가 로빈슨보다 프라이데이를 더 부각시키는 이야기를 새롭게 만든다. (같은 제국주의 국가이면서도) 남의 것을 가져다가 논쟁거리로 만들기 좋아하는 프랑스인의 기질이 잘 반영된 소설이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지어진 이름 프라이데이를 방드르디(프랑스식 프라이데이)로 바꾼다. 그리고는 시간이 흐를수록 로빈슨이 방드르디에게 감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이렇게 <로빈슨 크루소>를 한 방에 뒤엎어버린 프랑스의 작가는 미셀 투르니에(Michel Tournier)이고 소설 제목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다.

현대 소설의 잣대 중 진실성과 균형감은 중요한 요소이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이 소설은 낙제점이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상상력으로 씌여졌고, 제국주의나 중상주의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그 어떤 작품도 이 소설의 대중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강상중 교수도 필독서로 추천 했던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가! 물론, 로빈슨 크루소는 하나의 이론으로 정연하게 설명할 수 없는 대단히 복잡한 분석이 열려 있는 텍스트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으로 윽박지르고(필요하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음) 기독교로 교화하는 서구 제국주의 논리를 우리가 편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16세기, 한 손에는 조총,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찾았던 코쟁이들의 이야기(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P437)가 먼 나라도 아닌 이웃 나라 일본이라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만약, 난파를 당해 울릉도에 상륙한 코쟁이가 우리 조상(원주민, 야만인)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로 창씨 개명하고 자신의 노예로 삼았다면... 분명한 사실은 하나이다. 그러나 해석과 적용은 다양할 수 있다. 디포와 투르니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등장할 수 있다. 노예인 프라이데이가 스승 방드르디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성 금요일이 불타는 금요일이 될 수도 있다. 주체와 객체는 수건돌리기 하듯 끊임없이 자리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즐겨보는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한국에 처음 와본 외국인 친구들이 겪는 문화적 차이나 생경함에 리액션하는 외국인들의 반응이 매우 재미있고 그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그 중에서 영국 편에서 제임스 후퍼와 친구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롭 건틀렛을 기리는 자전거 투어에 나섰다. (그 투어에는 친구, 건틀렛의 아버지 데이비드도 함께 했다.) 제임스 후퍼는 롭 건틀렛에 대해 “11살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로 그 친구 때문에 자전거 동아리에 들어갔다”며 “우리는 북극에서 남극까지 같이 탐험하고 최연소로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같이 갔다”고 설명했다. 이후 두 사람은 2008년 ‘올해의 모험가 상’을 수상해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됐다. 그러나 2009년 롭 건틀렛은 알프스 등반 중 안타까운 사고로 사망했다. 이에 제임스 후퍼는 자선 단체(One Mile Closer)를 통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여 친구의 죽음이 개인의 슬픔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승화시켰다.

굳이 TV프로그램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는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서 아이들에게 상상력과 모험심을 길러준다는 이 소설의 취지에 딴지를 걸고 싶지는 않다.) 로빈슨 크루소의 기본 구조는 인공 낙원의 건설과 야만족의 위협, 그리고 총과 기독교에 의한 배제이다. 그것은 서양과 비서양(非西洋)의 대결이기도 하다. 그리고 300여 년에 걸쳐 끝없이 재생산된 ‘로빈슨 크루소류 문학’, 즉 제국주의 문학의 주제가 됐다. 그 놀라운 생명력은 제국주의 또는 식민지주의를 유지시킨 근원적 허구 중 하나와 결부했기 때문에 얻어진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체적 진실이 아니라 근원적인 허구다. 그래서 “나의 손에... 성경책 한 권... 총을 끼고...”라는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담을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부디 오늘의 세계화와 로빈슨 크루소가 자유롭게 변용되고 재해석되어 ≪불타는 금요일, 태평양의 시작≫이 새롭게 씌여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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