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 걷어 내기
우종학 지음 / IVP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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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따진다고 할 때는...
-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를 읽고

우종학, 260쪽, 초판 2009.04.07(개정판 2014.10.30, 개정판 3쇄 2015..11.20), IVP, 서울시 마포구

과학은 오류와 미신으로부터 종교를 정화할 수 있으며, 종교는 맹목적 숭배와 잘못된 절대성으로부터 과학을 정화시킬 수 있다. 과학과 종교는 각각 서로가 더 번역할 수 있는 더 넓은 세계로 서로를 끌어당길 수 있다. (106쪽)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우리는 과학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적이지 않으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일 수 밖에 없는 시대이다. 그래서 모든 용어 뒤에‘과학’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구체적 데이터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객관성을 담보한 것으로 알고 대체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그래서‘과학’은 우리 사회 전반에 중요한 잣대가 되었고 개인의 영역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성경을 과학이라는 잣대로 들여다보는 시도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창조에 관한 크리스천 과학자들의 입장을, 소위 ‘창조 과학회’가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신학적 견해가 병행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조 기사에 관한 분분한 학적(學的) 해석들을 무.크.따.는 진화와 창조에 관한 논증을 통해 비교적 쉽게 잘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과 신학의 특히, 창조와 진화에 대한 지적 흥미를 가진 사람들의 입문서 역할을 하기에 적절하다. 갈릴레오 재판을 종교 재판으로 보지 않는 내용도 새로웠고, 과학에서 과학적 입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깨닫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흥미 있는 두 단어가 눈에 띈다. 책 제목에서의 ‘따지다’와 저자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사람 대신에 주로 쓴‘인간’이라는 단어이다.‘따진다’는 것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캐묻고 분명한 답을 요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보기 주기 위하여 그것에 맞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책에서는 그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의 사례들이 나열되고 설명이 덧붙어져 있다. 교수, 선생님과 기자 제자 사이의 대담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어쩌면 학생의 무지를 깨우치게 해야 하는 선생님의 도리를 통해 학문 세계는 넓고 배울 건 많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책에서는 사람이라는 단어보다는 인간이라는 단어를 주로 쓴다. 인간(人間)의‘간(間)’이 틈새에 끼인 사람들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신(성경)과 자연 사이에 끼이고, 신학과 과학 사이에 끼인 그 틈새에서 고민하는 모습이랄까? -물론, ‘틈새의 하나님’의 개념과는 무관하게- 하여튼, 인간은 틈새에서 제 갈 길과 방향을 잘 잡고 살아야 만 한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자신이 신인지 자연인지 그것도 아닌 그 중간자인지를 알아야하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따지기 위해서, 방향을 잘 잡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배워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제대로’알기(배우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제대로 배워서(알아서) 더 다양하고 넓은 시각을 가져야 한다.“어떤 면에서 나의 공부는 아직도 계속 진행 중이고 이 공부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은 이를 증명하려는 듯 보인다. 이 책은 창조론과 진화론은 서로 대척점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두 주장은 굳이 상호 모순될 필요가 없다는 열린 시각을 제공한다.

그리고 서로가 가진 주장을 활발하게 토론하고 논증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각자가 한 견해를 선택한 후 분명히 기억할 점은 다른 기독교 견해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의견을 가진 크리스천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생각은 존중받아야 한다.
창조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는‘성경’이라는 신앙심과 과거의 교과서 게재(창조론)를 위한 법적인 노력들은 존중한다. 그리고 로버트 클라크의 사례를 교훈삼아 반증을 위한 반증보다는 더 수학적이고 정량적인 논증을 통해‘과학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들이 과학적 논증을 통해 과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기도 응원한다. 그러나 저자의 우려대로 과학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창조 과학 때문에 기독교 신앙 자체도 마치 과학 앞에 비웃음을 사야하는 책임을 창조과학이 져야할지도 모른다.

오랜 지구론에 의하면 우주 나이는 140억년, 지구 나이는 40~50억년이 되었다고 한다. 굳이“우리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이나‘평범성의 원리’를 차용하지 않더라도 시공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그 인과 관계를 밝히는 과학적 방법은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 왜냐하면 현재까지는 우주의 신비를 밝힐,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잣대만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우주보다 큰 하나님의 세계를 과학이라는 도구로 증명해보이지 못한다고, 신이 있다! 없다!를 단정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하다. 바꾸어 말하면 무신론 과학자들이 스스로 과학교를 맹신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받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사실 믿음이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고 믿는 것도 믿는다고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이해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이 상황에 따라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별개의 영역에 가깝지만.

신의 특별 계시인 성경일지라도 결국 인간의 언어로 쓰였다. 인간의 언어로 쓰였다는 말은 성경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회적 도구로서의 언어는 그 시대와 문화 그리고 그 사회의 발달 수준을 나타낸다. 재미난 예를 들어 하나 들어보자. 우리나라 개화기, 서양의‘캐첩’을 처음 들여와 서양 선교사가 캐첩을 조선 사람에게 먹어보라고 권하는 장면을 연상해보자. 캐첩을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조선인에게 캐첩을‘서양고추장’이라고 설명했다고 하자. 전달하는 사람은 처음 경험하는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적절한 비유법이라고 썼지만 거기에는 왜곡과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비유는 아무리 잘 표현되어도 캐첩이 고추장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쓴 창조 기사 역시, 고대근동지역의 그 시대 세계관을 드러낸다는 말은 유효하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해석의 문제’는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자신들이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따라 정해놓은 결론을 가지고 사실을 왜곡하여 짜맞추기하지는 말자. 그리하여 과학과 신앙에 얽힌 해묵은 편견을 떠나보내고 과학과 신앙이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또 만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과학이 신학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자연의 사실과 성경 말씀중 하나도 거부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자연의 사실과 성경 말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점검 해봐야 한다. 그 이유는 건전한 과학과 건전한 성경 해석은 항상 조화롭기 때문이다." (106쪽)
- 휴 로스(천문학자이자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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