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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
김초엽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야심 차게 나온 sf 앤솔러지 <팬데믹> !
감사하게도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먼저 받아볼 수 있었다.
총 여섯 개의 단편 소설이 담겨 있고 세 가지의 소재로 묶여 있다.
'끝과 시작'에서는 특히 김초엽이 쓴 <최후의 라이오니>를 읽으며 문장마다 가장 오래 머물렀다. 로봇이라고 하면 차가운 금속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차가운 금속과 따뜻한 온도가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든 작가에게 감탄을 했다. 문득, 뒤돌아보면 행성 3420ED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만 같다. 어딘가 존재할 라이오니와 셀을 위하여.
"어떤 죽음은 다른 삶을 지탱하는 것이다." p.20
"내가 목격해온 폐허의 적막과 고요는 어디까지나 살아서 그것을 목격하는 이들의 것이었다." p.29
듀나의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을 읽으면서는 이 소설이 우리가 사는 지구에 대한 총체적인 은유라고 느꼈다. 멀리서 보면 인류는 바이러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작가의 말처럼, 바이러스가 또 다른 바이러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은 우리에게 또 다른 시사점을 주지 않을까.
"나는 뭐든지 믿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p.53
"고래들에게 우린 전염병이었을지도 몰라요." p.66
'전염의 충격'에서는 앞선 '전염'이 문제인지, 뒤따르는 '충격'이 원인인지 모르겠는 상실에 대해 담고 있다. 전염병의 대유행이 진행될수록 우리는 가만해진다. 김이 나는 상태로 올려두어도 금세 온도를 빼앗겨 버리는 컵에 담긴 물처럼, 그렇게 가만히 무력한 존재처럼.
정소연의 <미정의 상자>는 되돌리고 싶은 시간 속에 사는 미정과 유경, 김이환의 <그 상자>는 또 다른 팬데믹 시대에 살아가는 민준과 석현, 인공지능인 장웨이와 존의 이야기다. 이 두 소설은 딱 현재와 같았다. 손에 쥐고 있었는데 사라져 버리는 지금 이 시간 같아서 마음이 허했다.
'다시 만난 세계'는 팬데믹 이후의 또 다른 팬데믹으로 새롭게 마주한 세계에 대해 전하고 있다.
<차카타파의 열망으로>를 읽으면서는 처음 보는 이 형식 파괴적인 신선함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 처음엔 오탈자 한두 개가 거슬리는 정도라고 생각했다가 점점 거센소리, 된소리가 아예 표기되지 않았길래 흐름을 살펴보니 이유가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파본으로 나가야 할 책이 잘못 배송 온 줄 알고 한참을 웃었다. 거센소리, 된소리가 없는 세상은 어떨까? 먼 미래는 통쾌함 없이 사는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았다. 먼 미래에서 2020년을 내려다보니 신기했다. 소설 끝에서 드디어 모든 말을 제대로 발음했을 때의 쾌감이란. 발로 짓밟혀 여기저기 으깨지고 녹아내린 버터에서, 시원하고 톡 터지는 기포가 가득한 탄산음료를 마주한 기분.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격리된 시간의 손을 붙잡고 뛰고 싶은 욕심이 든다.
"근대인들에게 2020년은 혐오를 재발견하는 시기였다." p.149
<벌레 폭풍>을 읽으면서, 마음이 불안하면서도 간질간질했다. 벌레 폭풍이라는 상상하기 끔찍했던 배경 속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불안했고, 시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 덕분에 마음이 간지러웠다. 변하지 않는 마음들에 관해 쓴 작가의 진심이 전해져서일까. 포포와 무이의 사랑에서 다정한 위로를 얻었다.
"포포는 유령도시에 사는 기분을 느끼다가 점심이나 저녁 시간에 음식 배달원들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걸 보며 위안을 얻는다. 종일 혼자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어떤 고독한 사람이 식사 때가 되어서 음식을 주문하고, 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배달원에게 따뜻한 음식을 받아 어디든 편한 자리에 앉아 그날의 끼니를 먹는 상상을 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p.165
상상보다 더 상상 같은 현실에서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팬데믹에 관한 짧은 소설은 어떤 해결책이나 탈출구가 아니라 마치 현실과 같은 막막하고 답답한 터널 속에 공존하는 '평행세계'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가 아닌 희망을, 혼자가 아닌 '함께', '우리'라는 이름을 견디는 사람들이 있어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었다.
터널 속에서 여섯 개의 세계를 통과하는 동안 외로움에 대한 면역이 생긴 듯하다.
이 무겁지 않은 면역이 터널을 벗어나 한 줌의 빛을 만날 때까지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