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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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냄새는 영화 기생충에서 중요한 모티프이다. 박 사장이 기택의 냄새에 대해 가끔 지하철 타다 보면 나는 냄새 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박 사장의 아들이 기택 가족에게 같은 냄새가 난다고 하는 장면 등을 통해 냄새가 교묘한 가면 속에 감추지 못한 본모습이자 가난의 표식임을 드러낸다. 이렇듯 냄새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소설 향수는 냄새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그르누이의 일대기를 그린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고 무정한 유모의 손을 거쳐 무두장이의 일꾼으로 살아가던 그르누이는 매혹적인 향기를 지닌 소녀와 조우하고, 그 체취를 소유하기 위해 그녀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이후 향기의 보존법을 익히기 위해 향수 제조인의 도제로 지내며 기술을 익힌다. 중간에 사람의 인적냄새를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향기의 기억을 더듬으며 정신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던 그르누이는 문득 자신에게는 냄새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그리고 최고의 향수를 만드는데 열과 성을 다한다.

1부에서 작가는 그르누이의 심리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다른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은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그르누이에 대해서만은 최소한으로만 보여주며 그의 냉혈한적인 면모를 강조한다. 2부로 넘어가 동굴에서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대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르누이의 내면을 심도 있게 묘사해 그에게도 풍부한 감정과 생각이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의 관심은 타인도 자신도 아닌 냄새뿐이라는 사실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르누이에게 세상만사 모든 판단의 기준은 재화도 도덕도 아닌 냄새. 먼 곳에서 살랑이는 한줄기의 냄새도 모두 구분하고 기억한다. 그토록 냄새에 민감한 그이지만 태어난 지 25년이 지나서야 자신에게 체취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그르누이는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판단할 것인가? 그는 잠시 충격을 느끼나 고뇌에 빠지는 대신 인간의 냄새를 모방한 향수를 만들어 상황에 따라 골라 뿌리며 원하는 효과를 누린다.

궁극의 향수를 위해 격무를 견뎌내고 살인도 서슴지 않은 그르누이. 그러나 향수를 완성시킬 마지막 소녀를 살인한 순간조차, 완성된 향수를 이용해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조차 그는 기뻐하지 않는다. 평생을 바친 원대한 목표를 완수했음에도 만족을 느끼기는커녕 깊은 절망을 느낀다. 완벽한 향수이기에 오히려 사람들은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궁극의 향수조차 그르누이에게만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대중의 숭배가 자신이라는 존재 때문이 아니라 향수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전까지 그르누이는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해 궁극의 향수를 만들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처형장에 모인 만여 명의 사람 앞에서 향수의 위력을 내보이는 모습이나 향수의 위력을 아무도 알지 못해 증오를 느끼는 모습을 보면 그는 타인에게 인식되기를, 사랑받기를 바라왔던 것이 아닐까? 그르누이는 태어나자마자 버림받고, 체취가 없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배척받고, 잘해봐야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겨지며 살아왔다. 그는 인간 냄새를 모방한 향수, 나아가 궁극의 향수를 통해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었으나 결국 그들이 사랑한 것은 그르누이라는 사람이 아닌 그 향기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향수로, 겉치레로, 지위로 자신을 규정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과연 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의 전부인가. 외부 요인이 아니라 스스로 정립한 기준으로 단단하게 자아를 확립하지 않으면 언젠가 그르누이가 그랬듯, 존재의 위기가 찾아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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