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식탁 위로 - 레비-스트로스와 함께하는 기호-요리학
오선민 지음 / 북드라망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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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싸가 되고 싶다면 『신화의 식탁 위로』를 읽자!
분위기 파악을 못한다는 것은 모든 만물을 내 위주로 해석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결국 나를 소외시키는 일이 된다. 사람들 속에서 전체 맥락과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아무말 대잔치를 하면 귀신이 지나간 것처럼 싸~~해지는 것을 경험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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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민 지음 / 북드라망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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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귀신을 부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싸라고 할 수 있다. 인싸가 되기 위해서는 인디언의 신화처럼 전체를 조망하고 그 속에서 나의 위치를 잘 찾아야 한다. 꺼져가는 분위기의 불씨를 살리고 살리고, 타자와 관계에서 매력적인 인싸가 되고 싶다면 『신화의 식탁 위로』가 단연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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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식탁 위로 - 레비-스트로스와 함께하는 기호-요리학
오선민 지음 / 북드라망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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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음미하며 대칭을 살아 내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순서를 잘 찾기란, 자연 전체의 계절적 배치를 읽는 가운데 그 한 부분으로 자기를 밀어 넣는 일입니다."(오선민, 『신화의 식탁 위로』(북드라망), 125쪽)


'신화'라고는 단군신화만 알았던 내가 처음 야생의 인디언을 공부하며 여러 번 의미를 찾았던 기억이 난다. 야만의 원시 부족 삶에 대해 왜 알아야 하지? 열등한 사람들의 사고가 지금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이지? 오선민 작가의 이전 책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과 인류학 공부를 통해 벌거벗고 아무데서나 누워 잠을 자고, 얼굴에는 이상한 무늬를 그리는 원시 부족들이 나름의 계획과 생각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남루하고 글자도 모르고 무지하다고 생각했던 원시 부족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살았다고 하니 1차 충격과 보여지는 대로 판단한 것에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이후 그들의 사고는 자나 깨나 우주 만물과 '함께' 생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원시 부족민이 삶에 어떻게 감각하는지 가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의 신화이다. 오선민 작가는 이번 책 『신화의 식탁 위로』에서 혼자 읽으면 도저히 해석도 이해도 불가능할 것 같은 인디언 신화를 우리에게 멋스럽게 맛나게 잘 차려 놓으셨다. 잘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물컵까지 셋팅 완료인 느낌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실컷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소화시키는 일이 남았다.


균형을 위한 아침

친구들과 2주 동안 매일 아침 6시에 신화 소화하기 프로젝트가 이루어졌다.  친구들은 이번 책에서 균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당연한 것이 대칭적 사고는 만물 속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을 것인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A와 B는 균형 감각을 키우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했다. '먹기'의 철학이 시대마다 다른 차이가 있을 것 같고, 신화에서 타자들이 누구의 무엇으로 사는 존재임을 보게 되어 스스로도 그런 의미로 자신을 보고 싶다고 했다. C은 수예를 잘 짜는 사람처럼 부지런히 능력을 가꾸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D는 전체의 질서를 조망하는 능력이 청소와 관계있음에 관심을 보였고, E는 책 전체에서 말하는 균형적 사고가 결국에는 풍요로운 사회처럼 보인다고 했다. 오늘날 '풍요'의 의미와 완전히 다른 야생의 '풍요'는 균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F는 아침 낭송에 참여하고 별도로 마을 지인들과 한 번 더 읽을 계획이라고 했다. 아침 낭송의 기운이 좋은 방법으로 순환되는 것 같아서 내심 기쁘기도 했다. F는 식사와 청소 그리고 치히로의 예禮를 다한 인사에서 모두 타자를 보고 가는 관계의 철학임을 배웠고, 일상에서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했다. 친구들은 아침 낭송이 각자의 삶에서 균형 감각을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차이'를 생각하는 밤

일요일 밤에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신화의 식탁 위로』 읽고 후기를 나누었다. 원시 부족들은 자기와 타자가 서로 차이가 있음을 끊임없이 사고했고 심지어는 싸움해서라도 그것을 지켜냈다. 식인도 같은 이유에서 행해졌다. 차이를 생각한다는 것은 존재의 고유함을 인정하는 일이고, 모든 만물을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를 화나게 하는 타인에 대해 그렇게 마음 쓸 필요가 뭐있을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그도 자기 세계에서 나름의 방법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는 공동체의 균형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질문했는데, 너무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것에 대해 친구들은 공동체의 조화를 위해 만물의 동등성을 이야기하는데 그 동등성이라는 것이 그때그때 위계가 달라진다고 이야기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짖는 평등은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되곤 한다. 하지만 야생의 사고에서는 그런 평등은 없다. 만물이 역동하는 질서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속에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에서는 근대인의 고정된 '자기'와 다르게 그때그때에 맞는 자기가 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선민 작가가 해석한 신화 속 사냥꾼은 상황마다 다른 옷을 입고 벗으며 타자가 되기를 노력했던 것 같다. 유능한 사냥꾼은 다름을 인식하고 때에 맞게 장소에 맞게 변신하는 사람이었다.


세계를 한 발 확장하는 공부

야생의 사고를 배우는 것은 큰 쓰나미를 맞은 것처럼 충격적이어서 생각의 전환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감동했던 것은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인류학 공부는 정보를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선민 작가의 책처럼 이건가? 저건가? 정답인지 아닌지 모를 그 길을 계속 탐구하고 나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간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아마 이 말도 예전의 나였다면 이상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정답이 얼마나 좋은가! 정해진 길을 찾아가는 일은 안정되고 성공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정답을 누가 정하느냐이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답지에 따라 살아가는 일은 인류학 공부에서는 없는 일이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를 신화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나의 자리, 전체의 상황과 조건 속에서 그 정답이 계속 달라진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선민 작가의 『신화의 식탁 위로』가 어렵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 책을 다 읽고 친구들과 세미나를 하고 보니 그 알기 어려운 신화를 더이상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의 사고는 자기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들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라진 것들이 사라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사고에) 다른 것들이 가득 차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45억년이라는 나이를 가진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하나의 존재로 살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내 삶에서 대칭적인 사고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거리를 한뭉탱이 던져주신 인류학자 작가님께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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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의 생각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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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문공간 세종)

 

나에게 종교는 모태신앙으로 선택의 여지 없이 무조건 믿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어린시절 우리집 TV 옆에는 성스러운 십자가와 성모마리아, 예수님상이 밤이고 낮이고 우리를 지켜주는 듯했다. 초등학교 4학년으로 기억하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종교에 자유가 있다고 하셔서 무척 놀랐다. 매주 성당을 가는 일이 싫었기에 집에 가자마자 종교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다가 등짝 스매싱이 날라왔다. 토요일 주일학교를 가기 위해 집에서 나서는 순간부터 죄책감은 늘 짝꿍처럼 붙어다녔다. 가기 싫은 불온한 마음을 분명 신께서 아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고백성사는 어딘가에서 저지른 나의 죄를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숙제를 안겨주었다. ‘내가 죄를 지었던가? 그날 그 행동은 죄라고 할 수 있나? ! 모르겠다. 할 말이 없으니까 일단 죄라고 치고 고백하자.’ 이 이상한 상황의 연속에도 성당에 착실히 나가고, 신부님께 죄사함을 받으면 전지전능한 신은 언제나 나를 굽어살펴 주시리라는 믿음을 오랫동안 의심해 보지 못했다.

오강남 선생님은 우리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다고 주야장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하며 무릎을 꿇고 빌며 죄책과 두려움에 살아야 하는가라며 질문하신다. 물개 박수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선생님은 종교의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루는데 여기서 근본주의는 성경에서 하라는 대로,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정도에 그치느라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따져보지 않고,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맹꽁이 청개구리의 후손을 자처하는 것이라고 하니 그동안 맹꽁이로 좀 살았으니 선생님의 책을 읽고 우물을 벗어날 때도 된 것 같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동안 생각해오던 ’, ‘신앙’, ‘종교인’, ‘기도등 종교에 대해 다시 이해하고 싶어졌다.

선생님은 참된 의미의 종교란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뛰어나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고 아하!’하고 놀라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사물의 실상, 혹은 실재(Reality)의 보이지 않던 다른 면, 혹은 다른 차원을 발견하여 새로운 변화를 체험하고, 이 결과 옛 사고방식이나 가치체계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138)이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깊은 종교심을 지녔었다고 소개하며 그의 글을 인용한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경험은 신비스러움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의 진지한 노력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심층에 깔린 기본 원리다.‘(145) 책에 따르면 신비주의는 신을 체험적으로 인식하기’(180)이다. 그것은 하느님, 절대자, 궁극실재를 몸소 아는 것이다. 영적으로 눈이 열릴 때, 내면의 깨달음을 얻을 때, 우리는 변화를 직접적으로 겪으며 체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종교가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라면 매일 보는 책이,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보자. 선생님은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모두가 하나이며 우리는 그것의 일부임을 아는 것이 종교의 핵심’(147)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먹는 밥이 있기 위해서는 벼가 있어야 하고 벼가 크기 위해서는 땅도, 물도, 공기도, 해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쌀 한 톨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쌀 한 톨 속에 우주가 다 있다면 내 속에도 우주가 다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종교는 절대적인 하늘 신을 모시는 일이 아니라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일이다. 중세에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은 신앙의 목표를 신이 되는 것으로 삼았는데, 그 의미는 신에게 맞서는 오만이나 신성모독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없어지고 내 속에 거하는 신이 바로 나의 본래적 나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겸손’(153)이었다.

심층 차원의 기독교는 하느님의 나라가 정말로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다고 한다. 도마복음에 따르면 계속해서 내 속에, 그리고 내 이웃의 속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임재를 깨달으라한다. 이것은 하늘과 나와 내 이웃이 하나되는 경험을 할 수 있고 진정한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 이웃이, 그리고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나도 분담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일이다. ‘불쌍히 여긴다는 의미의 영어 단어 ‘sympathy’ 혹은 ‘compassion’은 문자 그대로 아픔을 함께한다는 뜻이다.’(126)

오강남 선생님은 참된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감사만 하고 앉아 있을것이 아니라 자비를 실천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신의 임재를 실천하는 것으로, 초월을 끌어안는 행동, 그리고 살아있음, 사랑함, 존재함의 선물들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를 훈련하는 것’(102)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책에서 그동안 생각해오던 종교와는 완전하게 다른 면을 본 듯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겉으로만 하느님의 자녀를 흉내 냈다. 아쉬울 때는 종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며 제발 이번만 봐달라고 그러면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다거나 다른 이유를 대며 거래하듯 기도했다. 이제 기도를 다르게 해보자. 내가 이익을 얻겠다는 성취를 위한 기도가 아닌 온 우주 덕분에 내가 존재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기도로. 내 안에 그리스도를 찾고 싶다. 좋은 방법이 따로 없다. 어제와 다른 나로 끊임없이 책 읽고 생각하고 쓰는 수밖에. 자의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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