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는 여자들 -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을 만나다
로런 엘킨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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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시에 도착했을때, 첫 소감을 결정하는 것은 뭘까?


나에게는 간판이다. 간판은 차를 타고 있을 때보다 걸어 다닐 때 더 눈에 잘 들어온다. 단언컨대 걸어 다니는 것 만큼, 그 도시와 사랑에 빠지기 쉬운 방법은 없다. 걷는다는 것은 위로이고, 치유이자, 멈춤이기도 하다. 


"내가 파리를 가장 진하게 경험한 것은 문학을 통해서도 음식을 통해서도 박물관을 통해서도, 파리부르스 역 근처 다락방 시절에 영혼에 깊은 상처를 통해서도 아니었다. 수도 없이 걸어서 였다."(19쪽)


저자도 그랬나 보다. 발로 만나는 도시는 뭔가 다르다. 혀에서 느껴지는 맛이 다르고 피부 위, 따끔따끔하게 와닿는 시선이 다르며, 폐로 들이마시는 공기조차 다르다.






프랑스어 중에서는 플라뇌르(flaneur, 산보자)라는 말이 있다.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는 남성적 특권과 여유의 의미를 지녔다. 저자는 이 단어를 여성형으로 바꾸어 말한다. 플라뇌즈(flaneuse) 라고. 하지만 플라뇌즈라는 단어가 등재된 프랑스어 사전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플라뇌즈가 도시 산보의 역사에서 삭제된 까닭은 물론, 플라뇌르의 개념이 확고히 자리잡은 19세기에 여성이 처한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다."(26쪽) 


여기서도 여성은 삭제되어 있다. "여자는 장식용으로 쓰이거나 아니면 이상화된다."(35쪽) 동상이나 여성이 그려진 작품을 본 적이 있는가?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표현된 남성과는 다른 모습이다. 눈을 내리깔고, 정면을 바라보지 않는 시선으로 표현되거나 신체 부위만으로 여성임을 추측하게 하는 것들은 '미술'로 포장되어 여성을 추상화한다. 


도시는 어떤가. 도로와 골목으로 구분되어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다. "공간은 중립적이지 않다."(421쪽) 그렇지만 그 공간에 발자취를 남기는 것으로 내가 다녀갔다는 것을 남길 수 있다. 전복된 여성들의 지성과 문화와 역사를 되짚어 걸으며 주워담고 싶다. 지워지고 잊혀지지 않을 발자국을, 나의 서사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그동안 쌓아올렸던 것들이 한순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몇시간, 몇일, 몇주, 몇달, 심지어 몇 년에 걸쳐 퇴적된 노력이 한 톨의 티끌조차 되지 않고 사라졌을 때.


또는, "너무나 많은 선택지가 있을 때, 그중에서 무얼 어떻게 선택해야 하나? 누군가가 어디로 갈지, 무얼 할지 말해주먼 좋겠다."(199쪽) 싶을 때.


결정을 내리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역할조차 버겁다.


생각이 무거워지면 덩달아 내 몸도 무거워진다. 일어나지 않은 상상에 짓눌려 들숨과 날숨의 경계가 모호해 지면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움직이는 동안 나를 둘러싼 환경들은 나의 내면을 바꾸어 놓는다. 새로운 장소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주친 기쁨은 언젠가 사라진다. 익숙한 장소를 걷는 일이 더 나을 때도 있다.


"어떤 상황도 제자리에 멈추어 있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늘 바뀐다."(356쪽) 







책은 롱아일랜드로 시작해서 파리, 런던, 파리, 베네치아, 도쿄, 파리, 파리, 모든 곳, 뉴욕의 순서로 장소별로 나뉘어 있다. 저자가 밟았을 순서인지는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그녀의 발길이 머물렀던 곳들이다. 장소마다 그곳에서 살았던, 혹은 삶을 잠시 의탁했던 예술가와 시대를 뛰어넘어 만났다.


"나는 몽파르니스 거리를 리스와 함께 걸었다. 집과 학교를 오가며 걸었고 길가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5프랑으로 큼직한 잔에 담긴 커피와 그만큼 큰 스팀밀크 한 잔을 마시며 몇 시간이고 버틸 수 있는 라 쿠폴에 앉아 있었다."(98쪽)


단순히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걷기'는 아니다. 도시 산보자는 그 속에서 발로 지도를 그린다. 인물이 남겼을 발자취나 음식을 쫓기도 한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경험이 되어 나를 도시에 물들게 한다.


그녀가 아직 한국의 도시를 밟지 않았다는 것이 기쁘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내가 걷는 이 도시 위를 걸었을 때 그녀가 마주칠 삶이 궁금하다.





※ 컬처블룸 리뷰단으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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