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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전부가 좋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공감한 부분은 `문학적 건망증` 이었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으면 읽을 수록.. 좋았던 책은 기억하지만, 소위말해 `평타` 정도인 책은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데 그런 내가 정말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할 정도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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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완벽한 문장과 지극히 명확한 사고의 흐름으로 짜여져 있다. 결코 알지 못했던 흥미있는 지식으로 가득 차 있고 굉장한 놀라움이 넘친다.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책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중략)
그런데 이런! <아주 훌륭하다!>라고 긁적거리기 위해 연필을 들이대자, 내가 쓰려는 말이 이미 거기에 적혀 있다. 그리고 기록해 두려고 생각한 요점 역시 앞서 글을 읽은 사람이 벌써 써놓았다. 그것은 내게 아주 친숙한 필체, 바로 내 자신의 필체 였다. 앞서 책을 읽은 사람은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 전에 그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비탄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고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대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모든것이 무(無)로 와해되어 버린다면, 대관절 무엇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한단 말인가? 어쨌든 언젠가는 죽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나는 아름다운 작은 책자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얻어맞은 사람처럼, 실컷 두드려 맞은 사람처럼 슬그머니 서가로 돌아가, 저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런 책이 있다는 것조차 잊혀진 채 꽂혀 있는 수없이 많은 다른 책들 사이에 내려놓는다.
(중략)
그러나 혹시---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본다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직접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 병은 축복, 거의 필수적인 조건일 수 있다. 그것은 위대한 문학 작품이 꼼짝 못하게 불어넣는 경외심 앞에서 그를 지켜주고, 표절의 문제도 복잡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지 않다면 독창적인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깊이에의 강요 中 문학적 건망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