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평점 :
오늘 아침, 욕실에서 또 울었습니다. 이를 닦다가 칫솔 머리의 참으로 딱딱한 부분이 잇몸을 강타했고, 한 동안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고통스러웠지요. 한 달쯤 전에도 그래 놓고 데자뷔처럼 반복되는 상황 속에 <고통에 관하여>에 나오는 완벽한 진통제 NSTRA-14가 생각나더군요. 이 순간에 그 진통제 덕에 내가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행복일까 불행일까... 이 소설의 문법대로 말해보자면, 고통이 사라진 삶은 과연 구원받는 길일 수 있을까.
'고통'이란 주제는 이렇게 매우 광범위하고 보편적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SF 스릴러라는 대중적인 소설의 틀 안에서 과연 고통이란 게 무엇인지 그 철학적 실체를 추적하고 있는 정보라 작가의 내밀한 해부와 탐구가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특히 많은 독자들을 단박에 '정보라 빠'로 만들고 마는 정 작가 특유의 서늘한 문체가, 처음 써냈다는 스릴러에서도 그 위력을 여실히 발휘하더군요.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말이지요.
정 작가에 의하면 몇 해 전 미국에서 열린 행사에서 통증과 진통제에 관한 얘기를 듣다가 <고통에 관하여>의 최초 아이디어를 얻었다는데, 여기에다 사이비종교의 특성과 인간군상에 대한 천착, 탐사보도적 기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더해, 책을 펼쳐든 순간부터 한 순간도 손에서 떼지 못하는 흡인력 있는 스릴러 소설로 빚어낸 정 작가의 솜씨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끝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 느꼈던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만일 정보라 작가가 미지의 세상을 손에 잡힐 듯 실감나게 다루는 걸로만 끝내는 작가였다면 '인기작'에 그칠 뿐 '문제작'으로 인정받진 못했겠지요. 우리의 상상 속 저 너머의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과 촘촘하게 연결하는 정 작가의 치밀한 설계는 이번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가정 폭력이라든지 아동 학대, 사이비종교 등과 같은 '접점' 또는 ‘문’들을 통해 그곳과 이곳을 이어주고 있달까요. 소설 곳곳에 타임 워프의 구멍처럼 포진하고 있는 그 문들을 통과하면서 시공을 초월한 흥미진진한 여행에 나서보시길, 올 가을을 책과 함께 보내고 싶어 하는 알라딘 독자 여러분께 강력히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