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1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1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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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다. 음악에서 전복과 반전이 일어났던 바로 그 순간을 다룬다.

음악의 역사인가, 역사 속에서 본 음악인가.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음악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면 음악이 독자적으로 생생하게 보이지는 않을 터. 저자는 음악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다. , 음악에서 전복과 반전이 일어났던 이유를 정치, 사회, 경제와 결부시킨다.

사회와 음악의 격변기가 늘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10대가 기성세대에 맞서 재즈와 로큰롤을 통해 문화적 권력을 장악했던 시기 10대들은 자신의 윗세대와는 달리 풍족함을 누리고 있었지만 그 풍족함이 도리어 이들의 문화적 반항을 촉진시켰다. 소련의 젊은 세대들이 전쟁같았던 혁명기가 지난 후 자신들이 할 일이 없음에 좌절했듯이 어려운 시기 이후에 태어났던 미국의 10대들은 자신들이 기성세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반항했고 정치와 경제를 장악한 기성세대에 맞서 문화의 권력을 쟁취했다.

반면에 한국의 통기타 세대는 비록 돈이 없어 밴드대신 통기타를 들긴 했지만 사회의 변화와 때론 거리를 두고 때론 접신하며 새로운 문화를 열어젖혔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박정희 정권이 그토록 집요하고 잔혹하게 창작의 싹을 짓밟지 않았다면 우리의 대중음악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한정된 장르에 싹쓸이의 모습과는 다르지 않을까. 저자가 아침이슬을 해설하는 부분은 이 책의 백미다. “아침이슬이 민주화의 송가가 된 사회적 상황의 생생한 묘사는 물론이고 이 곡의 음악적 해석이 명쾌하게 펼쳐진다. 저자의 해설을 읽다보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 익숙한 노래가 새롭게 들린다.

음악사를 다루는 저자의 해석은 철저히 사회적 상황과 함께 한다. 어떤 위대한 음악도 어떤 불세출의 천재도 시대와 별개로 갑자기 출현하지는 않는다. 클래식의 위인들도 마찬가지다. 궁정사회의 시민음악가 모차르트와 공화주의의 이상을 품은 현실주의자 베토벤의 출현과 부침, 그리고 그들의 음악적 성과는 유럽의 부르주아의 출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종교음악에서 고전주의를 거쳐 낭만주의로 나아가는 음악사나 또는 각 작곡가의 개별적인 생애를 통해서 주로 보아왔던 이 시대의 변화를 저자는 창의적인 시각으로 풀어낸다. 역사가 그렇듯 음악사 역시 필연과 우연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며 펼쳐진다. 멘델스존이 바흐를 다시 발굴해내지 않았다면 바흐는 시대와 함께 잊혀진 다른 수많은 음악가들처럼 그렇게 사라졌을까. 바흐만큼 위대했지만 원통하게도 발견되지 못하고 잊혀져 버린 다른 음악가들은 과연 없을까. 결국 위대하다는 것도 후대에 발견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까. 그렇다면 위대하다는 것도 누군가의 의도로 기획되어질 수 있을까. “사의 찬미목포의 눈물이 일으킨 센세이션이 그 곡 자체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어떤 세력의 의도가 개입했듯이 말이다.

예전부터 강헌 평론가가 꼭 책을 써야할 사람으로 글 좀 쓴다는 이들에게 늘 호출되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 그 평가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때로는 저잣거리의 어투까지 서슴치 않을 정도로 쉽게 쓰면서도 전복의 순간을 궤똟는 깊이가 있다. 음악 뿐 아니라 정치,역사,경제를 넘나드는 광대한 지식의 폭은 또 어떤가. 빽빽이 달려있는 각주가 읽기를 불편하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인물 혹은 사건에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가 궁금해 각주를 읽어보게 된다. 이렇게 글을 잘 쓰고 아는 것도 많은 넘사벽위인의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견해를 그저 세례처럼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민비에 대한 비판에는 백배 공감한다.

사회에 반항하고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것이 음악의 본질이라는 철없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스스로의 견해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 책에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술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읽게 될 2권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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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러시아 1891~1991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래 옮김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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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소련이라는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은 공산주의를 이상향으로 생각한 이들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나역시 형편없는 지식 수준에서나마 소위 맑시즘을 다룬 책을 읽고 자본주의보다 공산주의에 대한 호감이 컷기에 소련의 몰락을 공산주의 자체의 실패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즉 나는 레닌이라는 지도자가 이끈 사회주의 혁명과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독재정권을 분리시켰다. 러시아 혁명은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해 주도되었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고 스탈린이라는 독재자가 이를 변질시켰던 거라 믿고 싶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러시아 혁명의 시기를 더 폭넓게, 1891년 제정 러시아의 대기근(먹고 사는 문제는 역시 중요하다)을 계기로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분노가 광범위하게 번졌던 시기부터 1991년 소련의 붕괴까지를 연속성있는 러시아 혁명 시기로 다루며 이러한 인위적인 분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탈린과 그가 주도한 독재정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악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혁명 초기부터 그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 과정 내내 맨셰비키와 볼셰비키의 주도권 다툼에서 인민은 소외되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의 협력과 반목 과정에서 알 수 있듯 소련의 권력자들을 움직인 것은 이념과 가치보다는 권력의지였다.

사실 이런 혁명의 씁쓸한 진실은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모든 혁명이 감당하고 극복해야 하는 뒷모습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하고 무능력한 로마노프 왕조를 처단하고 우유부단한 맨셰비키를 몰아냈듯이 러시아 민중들은 때로는 과감하고 위대했다. 그러나 그들으 독재자들의 독주를 막아내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은 시작부터 인민을 개조 대상으로 보았고 결국은 인간의 자유와 욕망을 철저하게 관리하려 했기에 실패했다. 이들의 유토피아에는 인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인민은 국가가 요구한 속박들 받아들였고 지금은 자발적으로 자신들 위에 엄한 아버지같이 군림할 독재자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그들의 이데올로기와는 별개로 나찌와 같은 전체주의로 나아갈 위험성을 늘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데올로기를 허상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어느 체제가 어떤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지는 중요한 문제다. 노동를 사회의 작동원리 끌어올린 마르크스주의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믿는다. 이미 유럽의 많은 나라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시킨 정책을 펴고 있다. 순수한 자본주의, 순수한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도구에 가깝다. 그리고 어떤 이데올로기든 인간을 배제한 이데올로기는 전체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왕조를 무너뜨리고 개방과 개혁을 향한 열망으로 소련 체제를 붕괴시켰던 러이사아 과거의 초강대국 시절을 그리워하며 독재자를 지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떤 체제든 진정으로 인민이 주도권을 잡는 세상이 과연 올까? 레닌의 위대한 점은 "그가 맑스주의에 의해 혁명가가 된 것이 아니라 그가 맑스주의를 혁명적으로 만든 점" 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한 상상력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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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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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란 직업이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뭘까? 주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과 모든 골치아픈 일을 은밀하게 그러나 완벽하게 처리하는 능력. 그는 우렁각시이자 슈퍼맨이다.이 소설의 주인공 스티븐슨 역시 그런 집사이며 그 사실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 그는 훌룡한 집사로 평가받는 덕목을 "품위"라고 표현하며 품위란 자신의 사적 실존과 공적 실존을 분리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엄밀하게 말해 집사라는 전문가의 사적 실존은 없다. 누군가의 집사가 되어 주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순간부터 집사는 주인에 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주인의 결정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오직 주인의 목적 달성에 이바지하는데 자신을 바친다. 사적 실존을 포기했기에 고뇌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니었음을 변명하듯 스티븐슨은 심지어 주인이 행한 결과에 대해 함께 책임지지도 않는다. 이는 상사의 부당한 지시는 거부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규범에도 어긋난다. 영혼없는 충성을 품위라고 보는 견해가 영국적인 것인지 일본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대착오적인 의식임은 확실해 보인다.
낡은 과거의 미덕에 집착하는 스티븐슨의 반대편에 케턴양이 있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주인의 잘못을 지적할 줄 알고 하지만 현실에 떠밀려 주인의 잘못된 결정에 굴복하면서 자괴감을 느끼는 그녀는 스티븐슨과 달리 입체적이고 성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사적 삶에서도 그녀는 섣불리 결혼을 결심하고 후회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자신이 스스로 내린 결정임을 받아들이고 개선시켜 나간다. 다행히 그녀가 스티븐슨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남아있는 나날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가 변화하려는 의지를 갖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변화를 위한 첫번째 실천인 농담을 배우겠다는 결심이 그의 새 미국인 주인을 만족시키겠다는 포부로 귀결되는 결말이 실소를 자아내긴 하지만. 주인공의 답답하고 비겁한 언행이 짜증나긴 해도 이 소설이 내가 집사에 대해 갖고 있던 판타지를 어는 정도 제거해 주었다는 사실은 고마운 일이다. 음 혹시 저자의 의도도 이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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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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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무 권위도 없는 개인이 예술작품에 대해 끄적거리는 감상도 결국은 그 작품에 대한 "평가"이다. 한 작품을 분류화하고 등급을 매기는 평가를 내리기가 가장 어려운 분야가 내게는 동시대 예술이다. 고전은 그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찬사를 보내도 된다는 보증서를 갖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허나 동시대 예술은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할 지 애매하고 세간의 평가가 정당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것이 내가 동시대 작가의 소설보다 보증된 고전을 선호하는 비겁한 취향을 갖게 된 이유이다. 그래도 동시대 작가 중에 신뢰가 가는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김영하 작가이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느낀 점은 크게 두 가지인데 새롭고 도발적이나 선을 넘지 않는다는 점과 전혀 재미있지 않을 것 같은 소재로 재미있는 소설을 쓴다는 점이다. <오직 두 사람>이라는 소설집에 대해 가장 먼저 들은 정보는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들이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너무 감상적이거나 무겁지 않을까 하는 편견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나 이 소설집에 그 전에 인상깊게 읽은 <옥수수와 나>가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주저없이 집어들었다.
작가는 이 책이 상실, 그리고 그 이후 남겨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라 하지만 내게는 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이야기들로 보인다. 굳이 내 식으로 이 소설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찾는다면 "뜻밖의 상황"에 부딪힌 이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뜻밖의 상황은 얼핏 불가항력으로 보이나 그 이면에는 자신이 예견했던, 혹은 은근히 바래왔던 상황도 있다. 어느 쪽이었던 간에 그것이 벌어진 이후의 상황은 개인이 손 쓸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다. 이 청천벽력 앞에서 누군가는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적응해 가기도 하고 냉소적으로 외면하며 애써 거리를 두려 하기도 한다.
김영하 작가는 '상실'을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며 그 일을 겪은 사람은 좌절하고 슬퍼하기에 위로받아야 한다고 말하기엔 불온하고 의심이 많은 작가이다. 아이를 유괴당한 아버지도 온갖 종류(불륜, 미녀의 유혹, 뮤즈의 강림,마피아의 위협)의 작가의 로망을 실현하게 된 허세쩌는 소설가도 사람들의 이해와 위로를 받기에는 불합리하고 심지어 비도덕적인 행태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행태가 쓴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묘한 비애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뜻밖의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은 얼마나 비이성적이 되는가. 자신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이 '뜻밖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무리수를 두어야 하는가. 그 모든 저열하고 비겁한 자기방어를 누가 어디까지 단죄할 수 있는가.
'뜻밖의 상황'에서 이들이 벌이는 행태는 이들이 악자라서가 아니라 약자이기에 일어난다. 이들은 용감하고 정의로운 영웅이기는 커녕 찌질한 옥수수 소시민에 불과하나 옥수수는 심지어 닭에게조차 해를 끼치지 못하고 도망다니는 왜소한 존재이다. 그나마 이 옥수수들이 희망을 보이는 순간은 누군가와 교감하고 이어질 때이다. 편지를 쓸 누군가가 있을 때, 가출해버린 아들의 손주를 떠맡을 때, 일면식도 없던 아버지의 슈트를 받아올 때 부조리하고 구질구질하며 불행의 연타에 너덜너덜해진 삶도 조금씩 그 구김을 편다.
되풀이하자면 김영하 작가는 불온하고 의심이 많은 작가이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때로 허무맹랑하고 난잡한 이야기로 치닫다가도 독창적이라고 추앙받다가 그 독창성의 늪에 빠져버린 여타의 작가들과는 달리 곧 그 폭주를 위트있게 비틀어버릴 수 있는 미덕이 거기에서 나온다. 밸런스를 맞춘다는 것, '뜻밖의 상황' 앞에서도 밸런스를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또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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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얼음 - 경계인 송두율의 자전적 에세이
송두율 지음 / 후마니타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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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경계의 자유를 얻기 위해 그는 무엇을 버리고 또 얼마나 큰 고독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유신헌법 시절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한국 입국이 금지되었다가 2003년 참여정부 시절 '해외 민주인사 한마당'에 초청되어 고국 땅을 밟았으나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의 회고록이다. 다행히 9개월의 옥고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나긴 했으나 몇십년간 귀국하지 못한 채 해외에서 민주화 운동과 철학연구에 매진하던저명한 교수를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처 넣었다는 사실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송두율 교수의 방문이 거론되던 시점부터 흥미가 생겨 그의 저서 몇 권을 찾아 읽었으나 사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하버마스에게 사사받았다는 그의 철학은 내게 너무 어렵다. 결국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할아버지 시절부터 유랑민처럼 떠도는 운명이 지워진 듯한 그의 삶일 것이다.
송 교수가 정서적으로 호소했다면 이념을 떠나 인간적인 동정심을 사고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그가 한국에서 그 고초를 겪고도 여전히 학문적 소신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경계인의 삶을 택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여전히 북한을 방문하고 싶어하고 통일을 염원하며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교류하기를 바란다. 이는 평생을 그 목표에 바쳐 이제 포기할 수도 없는 구 운동권 인사의 빛바랜 염원이라기보다는 학문으로 남북을 연구한 학자의 고집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가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 해도 이후의 상황은 2003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극우세력과 보수언론은 그를 난도질할 것이고 진보세력은 그를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더구나 지금 남한의 우리는 통일에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젊은 세대는 거꾸로 보수화되었다. 통일은 이제 우리의 소원이 아니다. 오히려 분단이 더 자연스러운 지금의 상황에서 남과 북 그 어디도 선택하지 않고 경계선 위에 머무르겠다고 하는 송 교수는 구세대의 유물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남과 북이든 진보와 보수든 남성과 여성이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거나 또는 속하기를 거부하는 경계인은 있을 수 있다. 그 경계인을 얼마나 용인할 수 있는지가 그 사회의 수준을 말해줄 것이다.
희망을 갖되 그 희망이 객관적이고 냉철한 상황판단 위에 놓아야 한다는, 자신은 그것을 불타는 얼음이라 부른다는 송두율 교수가 다시 그토록 그리워했던 제주와 통영을 방문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때는 한국 사회가 조금더 자제력을 가지고 그를 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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