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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사람들
살바도르 플라센시아 지음, 송은주 옮김 / 이레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정말 현실일까? 혹시 누군가의 꿈이거나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누구나 한번쯤 해 봤을 만한 생각이고 이미 예전부터 문학이나 예술에서 주요 소재로 쓰여졌던 생각이기도 하다. 이 소설도 어쩌면 이 발상에서 시작되며 저자는 아주 적극적으로 이에 응한다. 즉, 소설의 저자와 등장인물들이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토성(작가)에 맞서는 페데리코와 프로기의 목표는 확고하다. 이들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과 생각까지 들여다 보는 토성의 감시와 독재에 항거하여 자유를 찾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반면에 샐의 전쟁에 임하는 자세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목표의식도 뚜렷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등장인물도 무책임하게 잊어버리고, 소설 때문에 실연당하는가 하면 실연의 상처 때문에 싸움을 포기했다가 다시 떠나버린 연인에 대한 분노를 EMF와의 전쟁을 통해 풀기 위해 돌아오기도 한다. 이런 나약한 작가이니만큼 당연히 전쟁에서 패해야 정상이겠지만 샐의 힘은 약화될 수는 있어도 결코 패배하지는 않는다. 왜? 이 소설의 창조주니까!
사실상 이 애시당초 불가능했던 전쟁에서는 패자도 승자도 없고 강자도 약자도 없다. 마치 메레디스 드 파펠과 그녀의 연인들처럼 그들은 가장 사랑하고 원했던 것에 버림받고 그 슬픔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히 남는다. 자해로도 전쟁으로도 그 슬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과 저자까지도 하나로 묶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마치 온통 슬픔으로 된 막으로 덮인 하나의 행성처럼.
사실과 환상, 텍스트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소설이니만큼 이 안에서는 카미의 말처럼 모든 것이 가능하다. 종이로 만든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죽은 자는 부활하며 사람들은 토성에 침묵으로, 혹은 말의 홍수로 저항한다. 내용만큼이나 구조도 뒤죽박죽이지만 소설은 결코 산만하거나 지루하지는 않다. 떠나간 연인 앞에서는 무력한 샐이지만 작가로서의 재능만은 뛰어났던 것인가.. 그 유머감각의 반만 연인들 앞에서 발휘했어도 그렇게 비참하게 차이지는 않았을 텐데.. 마치 소설 속의 페데리코는 샐 자신의 투영처럼 보이는데 샐은 아마도 페데리코를 아주 비참하게 묘사해서 자신의 열등감과 울분을 해소하고 싶었나 보다. 이런 치사한.. 그러니 페데리코가 전쟁을 결심할 수 밖에.. 토성의 존재를 페데리코가 가장 먼저 눈치챈 것도 우연은 아니다!
텍스트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이런 구조는 이번에 히트를 기록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기존의 작가가 전제군주로 군림했던 소설에서의 이런 이야기 구조는 놀랍고 흥미롭다. 사실상 등장인물들의 저항 자체도 결국은 작가의 머리 속에서 나온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메레디스가 아버지와 함께 소설 밖으로 빠져나가는 결말은 희망적이다. 그들은 탈주에 성공했을까?
아, 하나 더! 하드커버의 책은 보기만 해도 멋지다. 들고 다니기는 무리가 따르지만(어깨 빠지는 줄 알았다) 책장에 꽂아만 놓아도 폼나서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