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러시아 1891~1991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래 옮김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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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소련이라는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은 공산주의를 이상향으로 생각한 이들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나역시 형편없는 지식 수준에서나마 소위 맑시즘을 다룬 책을 읽고 자본주의보다 공산주의에 대한 호감이 컷기에 소련의 몰락을 공산주의 자체의 실패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즉 나는 레닌이라는 지도자가 이끈 사회주의 혁명과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독재정권을 분리시켰다. 러시아 혁명은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해 주도되었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고 스탈린이라는 독재자가 이를 변질시켰던 거라 믿고 싶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러시아 혁명의 시기를 더 폭넓게, 1891년 제정 러시아의 대기근(먹고 사는 문제는 역시 중요하다)을 계기로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분노가 광범위하게 번졌던 시기부터 1991년 소련의 붕괴까지를 연속성있는 러시아 혁명 시기로 다루며 이러한 인위적인 분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탈린과 그가 주도한 독재정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악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혁명 초기부터 그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 과정 내내 맨셰비키와 볼셰비키의 주도권 다툼에서 인민은 소외되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의 협력과 반목 과정에서 알 수 있듯 소련의 권력자들을 움직인 것은 이념과 가치보다는 권력의지였다.

사실 이런 혁명의 씁쓸한 진실은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모든 혁명이 감당하고 극복해야 하는 뒷모습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패하고 무능력한 로마노프 왕조를 처단하고 우유부단한 맨셰비키를 몰아냈듯이 러시아 민중들은 때로는 과감하고 위대했다. 그러나 그들으 독재자들의 독주를 막아내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은 시작부터 인민을 개조 대상으로 보았고 결국은 인간의 자유와 욕망을 철저하게 관리하려 했기에 실패했다. 이들의 유토피아에는 인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인민은 국가가 요구한 속박들 받아들였고 지금은 자발적으로 자신들 위에 엄한 아버지같이 군림할 독재자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그들의 이데올로기와는 별개로 나찌와 같은 전체주의로 나아갈 위험성을 늘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데올로기를 허상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어느 체제가 어떤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지는 중요한 문제다. 노동를 사회의 작동원리 끌어올린 마르크스주의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믿는다. 이미 유럽의 많은 나라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시킨 정책을 펴고 있다. 순수한 자본주의, 순수한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도구에 가깝다. 그리고 어떤 이데올로기든 인간을 배제한 이데올로기는 전체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왕조를 무너뜨리고 개방과 개혁을 향한 열망으로 소련 체제를 붕괴시켰던 러이사아 과거의 초강대국 시절을 그리워하며 독재자를 지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떤 체제든 진정으로 인민이 주도권을 잡는 세상이 과연 올까? 레닌의 위대한 점은 "그가 맑스주의에 의해 혁명가가 된 것이 아니라 그가 맑스주의를 혁명적으로 만든 점" 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한 상상력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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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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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란 직업이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뭘까? 주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과 모든 골치아픈 일을 은밀하게 그러나 완벽하게 처리하는 능력. 그는 우렁각시이자 슈퍼맨이다.이 소설의 주인공 스티븐슨 역시 그런 집사이며 그 사실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 그는 훌룡한 집사로 평가받는 덕목을 "품위"라고 표현하며 품위란 자신의 사적 실존과 공적 실존을 분리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엄밀하게 말해 집사라는 전문가의 사적 실존은 없다. 누군가의 집사가 되어 주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순간부터 집사는 주인에 대해 옳고 그름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주인의 결정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오직 주인의 목적 달성에 이바지하는데 자신을 바친다. 사적 실존을 포기했기에 고뇌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니었음을 변명하듯 스티븐슨은 심지어 주인이 행한 결과에 대해 함께 책임지지도 않는다. 이는 상사의 부당한 지시는 거부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규범에도 어긋난다. 영혼없는 충성을 품위라고 보는 견해가 영국적인 것인지 일본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대착오적인 의식임은 확실해 보인다.
낡은 과거의 미덕에 집착하는 스티븐슨의 반대편에 케턴양이 있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주인의 잘못을 지적할 줄 알고 하지만 현실에 떠밀려 주인의 잘못된 결정에 굴복하면서 자괴감을 느끼는 그녀는 스티븐슨과 달리 입체적이고 성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사적 삶에서도 그녀는 섣불리 결혼을 결심하고 후회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자신이 스스로 내린 결정임을 받아들이고 개선시켜 나간다. 다행히 그녀가 스티븐슨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남아있는 나날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가 변화하려는 의지를 갖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변화를 위한 첫번째 실천인 농담을 배우겠다는 결심이 그의 새 미국인 주인을 만족시키겠다는 포부로 귀결되는 결말이 실소를 자아내긴 하지만. 주인공의 답답하고 비겁한 언행이 짜증나긴 해도 이 소설이 내가 집사에 대해 갖고 있던 판타지를 어는 정도 제거해 주었다는 사실은 고마운 일이다. 음 혹시 저자의 의도도 이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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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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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권위도 없는 개인이 예술작품에 대해 끄적거리는 감상도 결국은 그 작품에 대한 "평가"이다. 한 작품을 분류화하고 등급을 매기는 평가를 내리기가 가장 어려운 분야가 내게는 동시대 예술이다. 고전은 그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찬사를 보내도 된다는 보증서를 갖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허나 동시대 예술은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할 지 애매하고 세간의 평가가 정당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것이 내가 동시대 작가의 소설보다 보증된 고전을 선호하는 비겁한 취향을 갖게 된 이유이다. 그래도 동시대 작가 중에 신뢰가 가는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김영하 작가이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느낀 점은 크게 두 가지인데 새롭고 도발적이나 선을 넘지 않는다는 점과 전혀 재미있지 않을 것 같은 소재로 재미있는 소설을 쓴다는 점이다. <오직 두 사람>이라는 소설집에 대해 가장 먼저 들은 정보는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들이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너무 감상적이거나 무겁지 않을까 하는 편견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나 이 소설집에 그 전에 인상깊게 읽은 <옥수수와 나>가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주저없이 집어들었다.
작가는 이 책이 상실, 그리고 그 이후 남겨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라 하지만 내게는 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이야기들로 보인다. 굳이 내 식으로 이 소설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찾는다면 "뜻밖의 상황"에 부딪힌 이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뜻밖의 상황은 얼핏 불가항력으로 보이나 그 이면에는 자신이 예견했던, 혹은 은근히 바래왔던 상황도 있다. 어느 쪽이었던 간에 그것이 벌어진 이후의 상황은 개인이 손 쓸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다. 이 청천벽력 앞에서 누군가는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적응해 가기도 하고 냉소적으로 외면하며 애써 거리를 두려 하기도 한다.
김영하 작가는 '상실'을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며 그 일을 겪은 사람은 좌절하고 슬퍼하기에 위로받아야 한다고 말하기엔 불온하고 의심이 많은 작가이다. 아이를 유괴당한 아버지도 온갖 종류(불륜, 미녀의 유혹, 뮤즈의 강림,마피아의 위협)의 작가의 로망을 실현하게 된 허세쩌는 소설가도 사람들의 이해와 위로를 받기에는 불합리하고 심지어 비도덕적인 행태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행태가 쓴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묘한 비애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뜻밖의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은 얼마나 비이성적이 되는가. 자신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이 '뜻밖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무리수를 두어야 하는가. 그 모든 저열하고 비겁한 자기방어를 누가 어디까지 단죄할 수 있는가.
'뜻밖의 상황'에서 이들이 벌이는 행태는 이들이 악자라서가 아니라 약자이기에 일어난다. 이들은 용감하고 정의로운 영웅이기는 커녕 찌질한 옥수수 소시민에 불과하나 옥수수는 심지어 닭에게조차 해를 끼치지 못하고 도망다니는 왜소한 존재이다. 그나마 이 옥수수들이 희망을 보이는 순간은 누군가와 교감하고 이어질 때이다. 편지를 쓸 누군가가 있을 때, 가출해버린 아들의 손주를 떠맡을 때, 일면식도 없던 아버지의 슈트를 받아올 때 부조리하고 구질구질하며 불행의 연타에 너덜너덜해진 삶도 조금씩 그 구김을 편다.
되풀이하자면 김영하 작가는 불온하고 의심이 많은 작가이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때로 허무맹랑하고 난잡한 이야기로 치닫다가도 독창적이라고 추앙받다가 그 독창성의 늪에 빠져버린 여타의 작가들과는 달리 곧 그 폭주를 위트있게 비틀어버릴 수 있는 미덕이 거기에서 나온다. 밸런스를 맞춘다는 것, '뜻밖의 상황' 앞에서도 밸런스를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또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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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얼음 - 경계인 송두율의 자전적 에세이
송두율 지음 / 후마니타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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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경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 경계의 자유를 얻기 위해 그는 무엇을 버리고 또 얼마나 큰 고독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유신헌법 시절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한국 입국이 금지되었다가 2003년 참여정부 시절 '해외 민주인사 한마당'에 초청되어 고국 땅을 밟았으나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의 회고록이다. 다행히 9개월의 옥고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나긴 했으나 몇십년간 귀국하지 못한 채 해외에서 민주화 운동과 철학연구에 매진하던저명한 교수를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처 넣었다는 사실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송두율 교수의 방문이 거론되던 시점부터 흥미가 생겨 그의 저서 몇 권을 찾아 읽었으나 사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하버마스에게 사사받았다는 그의 철학은 내게 너무 어렵다. 결국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할아버지 시절부터 유랑민처럼 떠도는 운명이 지워진 듯한 그의 삶일 것이다.
송 교수가 정서적으로 호소했다면 이념을 떠나 인간적인 동정심을 사고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그가 한국에서 그 고초를 겪고도 여전히 학문적 소신을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경계인의 삶을 택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여전히 북한을 방문하고 싶어하고 통일을 염원하며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교류하기를 바란다. 이는 평생을 그 목표에 바쳐 이제 포기할 수도 없는 구 운동권 인사의 빛바랜 염원이라기보다는 학문으로 남북을 연구한 학자의 고집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가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 해도 이후의 상황은 2003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극우세력과 보수언론은 그를 난도질할 것이고 진보세력은 그를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더구나 지금 남한의 우리는 통일에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젊은 세대는 거꾸로 보수화되었다. 통일은 이제 우리의 소원이 아니다. 오히려 분단이 더 자연스러운 지금의 상황에서 남과 북 그 어디도 선택하지 않고 경계선 위에 머무르겠다고 하는 송 교수는 구세대의 유물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남과 북이든 진보와 보수든 남성과 여성이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거나 또는 속하기를 거부하는 경계인은 있을 수 있다. 그 경계인을 얼마나 용인할 수 있는지가 그 사회의 수준을 말해줄 것이다.
희망을 갖되 그 희망이 객관적이고 냉철한 상황판단 위에 놓아야 한다는, 자신은 그것을 불타는 얼음이라 부른다는 송두율 교수가 다시 그토록 그리워했던 제주와 통영을 방문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때는 한국 사회가 조금더 자제력을 가지고 그를 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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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팟캐스트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제3세계 작가들은 일종의 비주류라는 편견에도 시달려야 한다고 한다. 한 예로 오르한 파묵같은 터키 작가라면 그가 쓰는 소설이 터키인의 민족정신을 대변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아무 제약없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사유해야 하는 창작자들에겐 자신을 옭아매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터인데 이런 편견은 제3세계와 같은 지역뿐만이 아니라 성별과 인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성이며 흑인작가인 토니 모리슨 역시 이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 [자비]는 처음 접해보는 토니 모리슨의 책으로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가 느낀 당혹감과 낯설음 역시 그런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연히 흑인 여성이 미국 사회에서 겪는 인종적, 성적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예상하며 책을 펼쳤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억압과 차별은 특정 인종에 국한되지 않고 너무나 다양했다.

흑인 노예인 프랜시스와 그 어머니는 물론이거니와 인디언 출신인 리나, 혼혈아인 소로뿐만 아니라 백인 지주인 제이콥 바크와 아내 레베카까지도 모멸섞인 대우를 감당해내야 했고

공정하고 너그러운 편이었던 바크의 농장 구성원 사이에서도 서로에 대한 차별과 격리는 존재하고 있었다.

심지어 같은 백인 사이에서도 어린 소녀를 마녀로 몰아 단죄하려 드는 나와 다른상대에 대한 증오와 폭력은 읽는 이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미국 건국 초기나 지금 한국이나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분리주의가 사회 분위기를 좌우하고 있다는 사실은 뭐가 다를까?

등장인물들간의 갈등은 결말에 가서도 해소되기는커녕 더 깊어진다.

공동체는 깨지고 소녀는 버림받고 고용주와 고용인과의 유대감은 사라져 버린다.

폐허가 되어버린 바크의 새 저택처럼 참담하게 무너져 버린 이들의 공동체에 프랜시스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가 희망이 되어줄 수 있을까.

프랜시스의 어머니는 기적은 신이 내리는 것이지만 자비는 인간이 베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타인에게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주지 않는 것이 바로 자비라고 말이다.

누구에게도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넘겨주지 않으려면 신에게도 남자에게도 기대지 말아야 한다.

늘 신발을 신어야 했던 프랜시스는 애인에게 배신당한 후 홀로 일어서고 그녀의 발바닥은 단단해진다.

미국 건국 초, 아직 흑인 노예들이 낯설어 니그로가 아닌 아프리카인으로 불리던 시절에 흑인 노예의 딸로 태어난 소녀가 맨발로 집을 나선다. 우리가 아는 미국 역사대로라면 그녀와 그녀의 후손들 앞에는 더 끔찍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 상대방에게 모든 적의와 저주를 쏟아붓는 일은 참 쉬운 일이다.

쉬운 일이기에 그것은 주인의 철학이 아닌 노예의 철학이다.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타당성 없는 증오에 넘겨주는 것은 절대신이나 권력자에게 의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타인에게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자비를 베푼다는 것, 우리는 과연 그렇게 강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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