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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 앙드레 지드 젊은날의 자서전
앙드레 지드 지음, 권은미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평점 :
“모든 중재자들과 예술가들이 배출되는 건 이중교배의 산물들, 즉 그 안에 서로 대립되는 요구들이 공존한 채 서서히 중화되는 가운데 성장해가는 그런 산물들 속에서이다.”
앙드레 지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번역본이 나와 있는 프랑스 작가 중 한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도서관에서 지드의 이름을 검색해 보면 대부분이 「좁은 문」의 여러 판본이고 간간히 「전원교향악」이 섞여있을 뿐, 「배덕자」나 「지상의 양식」등 그의 다른 작품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좁은 문」과 「전원교향악」의 경우 그 종교적이고 금욕적인 분위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건강한 작품으로 지목되어 청소년 교양도서 등으로 널리 읽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지드의 작품들이 그의 말을 빌자면 〈이중교배의 산물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지드의 반쪽만 읽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즐겨 읽는 지드의 소설에서 종교적 주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지드가 종교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천착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지드의 소설을 기독교적 윤리가 아닌 새로운 윤리관, 신이 떠난 뒤의 신이 없는 율법을 구현하기 위한 작업이라고까지 말한다. 실제로 늘 ‘성서에서 도덕적 양식과 충고를 끌어’냈던 지드가 천상이 아닌 지상에서, 아프리카의 태양과 아무 ‘저의도 회한도 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 속에서 새로운 양식을 찾아냈을 때 이 〈지상의 양식〉은 새로운 사회, 새로운 윤리를 갈망하던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어떤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이상의 이름으로, 당신들은 내가 나의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금지한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고스란히 내 본성을 따른다면 그 본성은 도대체 날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작가였지만 사후 그의 대부분의 소설이 바티칸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은 지드의 소설이 종교적 금욕주의에 입각하거나 기존의 윤리도덕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와는 오히려 반대의 입장에 있음을 보여준다.이 책은 그러한 지드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두가지 중심축, 종교적 경건함과 본성에 충실한 삶의 추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지드 자신의 육성으로 들려주고 있다.
지드가 60여세에 집필한 이 자서전은 그의 일대기를 다룬 것은 아니다. 대신 어둡고 불행했던 유년기와 학창시절을 거쳐 인생의 전환점이 된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와 사촌누이와 결혼하기까지 지드의 젊은 날까지만 다루고 있다. 지드가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회고하기보다 자신의 두가지 상반된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볼 때 그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는 이미 이 시기에 모두 일어났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잘 표현되어 있듯이 보통 우리의 사회는 본능에 충실한 세상과 예의와 규범으로 위장한 세상, 둘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는 매일같이 이 두 세상을 오가면서 살지만 그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이 대조되는 두 세상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끼는 이들은 다른 세상으로 건너갈 때 재빨리 가면을 바꿔쓰지 못하고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민감한 인간들이 부조리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글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소설 속에서는 우리가 당연한 듯 지나쳤던 두 세상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묘사되곤 한다. 지드 역시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라는 대립되는 두 세상의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그는 이를 신의 선조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모슨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늘 상반되는 두 세상의 충돌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그의 삶을 분리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이미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다소 과대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이 지드의 정신과 육체를 사로잡고 있는데 이는 그를 극도의 신경과민에 시달리게 하는 동시에 자신은 ‘남과는 다른’ 인간, 무언가를 구현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부여해 그가 작가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어 준다.
“의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런 획일성이란 자연이 거부한다. 각 존재는, 아니면 적어도 선택받은 자들은 이 지상에서 어떤 역할을,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바로 그 자신의 역할을 해야한다. 어떤 공통된 규율에 순종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배반이다.”
지드의 삶에서는 늘 두가지 상반되는 사건, 배경, 요소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데 그 중에서도 그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큰 두가지 사건은 사촌누이 마들렌에 대한 사랑과 아프리카 여행에서 얻은 쾌락의 경험들이다. 지드의 병적인 예민함은 자주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가곤 하는데 이 두가지 사건에 대한 그의 반응 또한 그렇다. 조숙하고 침착한,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사촌누이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은 그들의 결혼생활에서 육체관계를 거세시키고 아이러니하게도 파국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사랑과 분리된 지드의 육체적 욕망은 아프리카의 젊고 뜨거운 야성으로 향한다. 종교와 제도권의 윤리체계에 억눌려 있던 지드가 아프리카에서 발견한 것은 여행에서 돌아오면 잊어버릴 단순한 쾌락이 아니다. 그는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과 위장하지 않은 본능의 발산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다시 태어난다.
“이제야 나는 정상적인 내 상태를 찾았다. 여긴 더 이상 강요도, 서두름도, 의심쩍은 것도 없다. 내가 간직한 기억 속에는 더 이상 잿빛나는 것도 없다. 나의 기쁨은 한없이 컸으며 사랑이 같이 어우러졌다 하더라도 그보다 더 충만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거기다 사랑을 언급한단 말인가? 어떻게 내 육체적 욕망이 내 마음을 좌지우지하게 내버려둔단 말인가? 나의 쾌락은 아무런 저의도 없었으며 또 어떤 회한도 남기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야성적이고 불같이 뜨거운, 관능적이고도 음험한 그 작고 완벽한 육체를 벌거벗은 내 가슴에 껴안았을 때의 그 황홀경은 그렇다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 것인가?”
이때부터 그는 의례적으로 주어지던 윤리체계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드는 단순히 기존에 주어지던 것을 거부하거나 반발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덕을 구현하려 한다.
“내 속에서 새로운 내 율법의 서판을 막 발견하던 그 순간에 말이다. 규율로부터 나 자신이 해방되는 것으론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열광을 합법화하고자, 내 광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나섰던 것이다.”
인간은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이 아닌 자기의 본성을 찾아나서야 하며 그래서 인간은 안주가 아닌 방황과 탐색에서 삶의 의의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드는 ‘더이상 내가 그것에 대해 대항해 무장하지 않게 되었기에 더 이상 유혹이라 부르지도 않게 된 그것에 대해 저항했던 내 태도 속에 감춰져 있던 모든 오만함을’ 고백하고 던져 버린다.
주위 사람들이 출간을 만류했을 정도로 이 자서전은 지드 자신의 충격적이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수도 있는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를 질투심과 분노로 자신의 편지를 태워버린 아내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유치한 일이다. 아마 지드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숨기고 싶었을 치부들에 의해 자신의 작품과 사상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소설작품에 작가가 투영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드의 경우 그의 작품 자체가 삶이고 그의 삶 자체가 작품이라고 할 정도로 지드의 소설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이었고 지드 스스로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진흙탕에서 연꽆이 피듯 한 인간이 글을 쓰는데는 치욕과 좌절, 상처가 선행되어야 한다. 행복한 인간은 글을 쓰지 않는다. 치유와 탈출구가 필요한 이들만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