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할 권리 책고래숲 8
최준영 지음 / 책고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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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걷다 지인을 만난다. 어디 가니? 그 순간 걷는 일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치부되고 빛을 잃는다. 걷는 행위는 그 자체로 목적과 의도가 될 순 없을까? 걷는 일이 우리 삶의 궁극적 목표가 된다면 우리가 보는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다를 것이다.

나는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끊임없이 변하고, 목적하고 의도하는 바에 따라 고무공처럼 튀어 다닌다. 고무공이 부딪혀 낸 흔적의 합이 나일 터, 나는 순수를 바라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순수는 부모의 자식 사랑 말고는 문학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치부하고 그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촛불을 밝히듯 자신을 태워버리는 사랑, 자신 없다.

한 곳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리는 어디 가냐고 묻지 않는다. 다른 목적이나 의도 없이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심을 느낀다. 순수와 진심이라는 싹을 키워내는 토대로 사랑 말고 나는 아는 것이 없다. 안고 안기면서 사랑은 넓어진다. 최준영은 이 단순한 이치를 증명하려고 25년 동안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걸었던가. 묵묵히 쌓인 걸음이 증거하는 사랑을 나는 믿지 않을 수 없다.

생명에는 높고 낮음이라는 계층적 사다리가 없다.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 받기 위해서는 계층적 사고가 아니라 관계망식 사고가 필요하다. 최준영은 명예나 부귀 같은 욕망의 중력을 거부한다. 늘 낮은 곳을 찾아 관계망을 짓고 다닌다. 사람과 사람이 지은 작은 관계망이, 들고 나는 나눔이 그리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관계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겐 모든 것일 수 있다. 관계를 맺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가 된다. 부적합자라는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는 중요한 존재다. 계층적인 시선으로 보면 알 수 없지만, 관계망이 수 놓은 수많은 공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피를 돌게 하는 존재다.

거리의 삶을 살았던 김씨, 대학 진학을 꿈꾸는 탈학교 청소년 윤수, 보육원 꼬마시인, 자활 여성 가장, 인문학을 알고 나서 16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에게 사랑한다말했던 노숙인 임씨, 자신을 찾기 위해 전국 노숙인지원센터를 뒤졌던 딸을 둔 아버지, 키가 엄마보다 커지면서 어머니라고 불렀다던 수형인, 이 나이도 꿈이 있기에 강의에 오신 어르신들, 그리고 평생 눈에 밟힐 미혼모와 아기들.

책에 나오는 익명의 사람들은 어디쯤에서 다시 흩어지고 단절된다. 그리고 또 어디쯤에서 다시 이어진다. 단절과 연속의 반복이다. 최준영은 관계망의 완성을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소중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든 새로운 관계망을 펼쳐간다. 최준영이라는 점에서 시작된 관계망이 곳곳으로 퍼져 다시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장으로 물결치는 풍경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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