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 세계사 시인선 61
김언희 지음 / 세계사 / 199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트렁크'라는 제목에서부터 무언가 범상치 않은 흡입력을 안겨 주는 이 시집은 한마디로 쇼킹 그 자체다. 파격적인 시어는 낯설고도 야릇한 정신세계로 인도한다. 어떻게 이렇게 시를 쓸 수 있을까 하며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무한한 욕망을 사물에 빗대어 나타내는 그녀만의 독특한 상상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여러모로 그간 읽어 왔던 시와는 차별화 된, 그야말로 정신세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켜 주는 시가 아닐 수 없다.

남자가 아닌 여자의 입장에서 쓴 욕망에 관한 리얼하고 짜릿한 시어들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자신의 욕망을 바깥으로 표출하는데 있어 한치의 주저함도 없는 당당함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자칫 폭력적이고 외설적일 수도 있을 만한 시어들의 조합은 불안정해 보이면서 잘 짜여진 옷감의 직조처럼 잘 맞물려 내 안의 욕망을 자극한다. 한 소절 한 소절 읽 때마다 내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이 방향을 잃고 사방으로 분출되었다.
욕망이라는 것은 무궁무진하고 지속적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배설의 욕구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욕망이 생기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욕망을 해결하려고 하는 또 다른 욕망이 항상 우리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다. 욕망이 해결되지 않았을 때의 파국은 엽기적이고 기괴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그녀의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욕망을 해결하려 할 때에는 아무 것도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감전사 같은 것은 오히려 부수적인 차원이며 오직 욕망만이 주위의 모든 공기를 감싸 안는다.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 속에 욕망이라는 알갱이가 들어 있는 게 아닐까 싶게.

생물학적으로 우리 몸의 대부분이 물로 구성되어 있다면 '욕망'은 우리의 정신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리라. 모든 예술 장르에서 욕망을 제외하면 인간의 행위 자체도 이해될 수 없으며 본질을 잃을 것이다. 이 시집을 읽으며 내내 실재한다 믿었던 내가, 나 자신이 아닌 상상의 존재는 아닐까 하는 물음과 동시에 실재하는 나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혼돈을 경험하게 된다.욕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과 일상의 권태를 잊고자 하는 이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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