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대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우연히 문학동네 카페에 들어갔다가 이 책의 추천글을 읽었다. 노벨 문학상 작품은 어렵기 때문에 나와는 맞지 않다, 그 작품들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인정받는 것들이기 때문에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으로 그동안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던 분야의 도서들이었다. 하지만 그 추천글을 읽고는 바로 장바구니로 쏙 넣어버린 책. 바로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가 그러했다. 추천글에는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녀의 문체를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어려운 글을 찾아다니며 혼자 많은 생각을 하기를 바랬던 나에게 딱 좋은 도서가 아닐까 싶었다.


서정성과 죽음이 어울리는 조합일 수 있을까. 독일계 루마니아 소수민족 작가 그룹을 뜻하는 '제5독일문학'으로 분류되는 헤르타 뮐러. 그녀는 200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녀가 성장해온 '독일 이주민들이 사는 루마니아 바나트지방'의 보수적인 가정. 이 책은 그 마을의 전경을 서정적이면서도 어둡고 난해하게 그려낸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토록 난해하게 그려낸 이유는 무엇일지 찾아보았다. 이는 출판당시의 검열과 억압이 심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초현실적이고 서정적인 문장과 표현력으로 정권의 탄압을 빗겨갈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저지대>는 단편집이다. 하지만 하나의 마을에 살고 있는 서민들의 모습을 그려내었다는 점에서는 각각의 이야기와 분위기가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에 짧은 단편글 안에서도 문장들 하나하나가 제각각 움직이며 초현실적인 묘사를 해나가는 것을 보면 서사성은 없어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이 머리 속에 쌓이다보면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다양한 책들, 소설들을 읽어보았지만 이처럼 신비한 감상은 처음이다. 그녀의 장편소설도 이러할까? 단편집 <저지대>만 이렇게 독특할까. 그녀의 장편으로 유명한 <숨그네>를 필독해보고 싶어진다.


게다가 그녀의 표현과 묘사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신세계였다. 읽는 내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혹은 '나와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이렇게 표현해낼 수 있다니'와 같은 감탄을 쉴 새 없이 내뱉었다. 처음에는 멋진 표현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다가, 이 책의 99%가 그러한 표현임을 깨닫고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 번 읽고 치워놓을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상징성이 있는 존재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데 그녀가 살았던 배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깨닫기가 불가능했다. 조금 더 공부하고 나서, 그리고 그녀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고 나서, 이 책을 다시 펼쳐보아야 할 것 같다.


A 라는 책은 B라는 상황 속, C라는 장소, D라는 나의 감정이 모두 어우러졌을 때 그 감상과 감동이 배가된다. 이 책은 그러한 조건들을 갖추고 읽기에 참 까다롭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지하철에서 쉽게 쉽게 넘길 수 있는 책이 아니었고, 바쁜 일상 속에서 스토리에 대한 이해와 감동이 쉽게 와닿는 책도 아니었고, 짧게 주어진 쉬는 시간에 읽을만한 단편도 아니었다. 옆에 커피 한 잔을 준비하여 적어도 1시간은 여유가 주어졌을 때, 그리고 그녀가 그려내는 어둡고 암울한 마을에 초대받을 감정이 잡혀있을 때 읽어야 그나마 그 어려운 문장들이 내 것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읽고 나면 한참은 그 여운 속에 빠져서 잠이 들 때까지 읽었던 이미지들을 떠올려야 했다. 그만큼 매력적이고 마성을 품고 있는 작가와, 작가의 책이었다.


내가 완벽한 독일어를 할 수 있게 되어 원작을 읽게 된다면 얼마나 더 감탄하게 될까. 아마 독일어 원작에서 번역이 되면서도 달라진 부분들이 있겠지. 우리나라 문학작품들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그 맛을 살리지 못하는 것처럼.


책을 읽다가 감탄을 자아낸 문장들 중 어렵게 선정해본다.


나무들이 하늘에 투명하고 앙상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p44

어느새 밤이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소리 없이 밤이 되는지 나는 결코 알지 못했다 -p68

나는 낮잠이 정말 싫다. 낮잠에 진저리를 치며 침대에 눕는다. 할머니는 방 안을 어둡게 하고 문들을 전부 차례로 닫는다. 방문, 곁문, 현관문, 두 시간 동안 그 어둠 속에서 나가서는 안 된다. 나는 잠이 들까봐 무섭다. 할머니는 나에게 마법을 걸려고 한다. 할머니가 양귀비 씨앗을 먹고 곯아떨어졌던 깊은 잠에 나는 저항한다. 깊은 잠을 자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죽은 것이다. 잠이 방 안을 떠돌며 이미 내 살갗을 스친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점점 깊어진다. 머리 위 찬장에 물거품이 부글부글 인다. 새떼가 물을 가른다. 새들의 부리에서 굻주림이 번득인다. 새들은 나를 덮쳐 내 살갗을 쪼아 먹을 것이다. 나더러 껍질뿐인 비겁한 인간이라고 외칠 것이다. 나는 감정 없이, 두려움 없이 깨어날 것이다. 잠이 내 얼굴에 토시를 덮어 씌운다. 토시에서 할머니의 치마냄새, 양귀비 냄새, 죽음의 냄새가 난다. 잠은 할머니의 잠이고 할머니의 독이다. 잠은 죽음이다.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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