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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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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어런스 플랜(clearance plan)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죽여도 될까?

여기서 중요한 건 '왜?'가 되겠다. 그 이유에 따라 정당성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물론 법적인 정당성은 어떠한 이유로도 성립될 수 없다(전쟁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그렇기에 감정의 정당성이다. 죽어도 싼 놈, 죽여도 괜찮을 정도의 나쁜 놈이어야 동정을 얻을 수 있다(자신과 타인에게.) 그것이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해 범죄를 합리화시킨다(스스로의 합리화와 타인의 동정적인 면에서.) 그렇지 않다면 '사이코'와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죽어도 될 사람'이 얼마나 나쁜 놈인가에 달려있다.

 

 

'매 맞는 아내'가 있다면 그 옆에는 가해자인 '폭력남편'이 있다. 그 정도가 심해 언제 자신이 맞아죽을지 모를 지경이라면, 벗어나고 싶은데 법적인 방식으로 불가능하다면,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후환을 오래도록 두려워해야 한다면 자살하지 않는 이상 매 맞는 아내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 폭력남편을 죽이는 것뿐이다. 어차피 모든 살인은 법적으로 성립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살인은 명백한 범법, 그것도 법정최고형을 받을 행위다. 그러나 이미 위의 세 조건을 충족했으므로 감정의 정당성을 획득했다.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다. 범죄를 은폐하는 것. 완전범죄를 실현해 잡히지 않는 것.

 

 

나오미 이야기

나오미가 친한 친구 가나코에게 그녀의 폭력남편 다쓰로를 죽이자고 먼저 제안하고 주도적으로 움직인 이유는 자신의 부모님도 똑같은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 폭력의 현장에 있었고 온몸으로 그 심각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자라서 도쿄로 도망을 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 무기력함, 어머니를 돕지 못하고 외면했던 트라우마가 나오미의 가슴 밑바닥에 박혀 있었고, 이제 둘도 없을 친한 친구가 그러한 상황을 겪고 있다. 성인이 된 나오미는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일처럼 함께 맞서 싸우기로 한다. 친한 친구를 돕는다는 이유 이전에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것이 범법행위라고 해도 상관없다. 감정의 정당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가나코 이야기

매 맞는 아내이기에 폭력남편이 죽기를, 스스로 죽이는 상상을 수없이 해봤을 가나코다. 그랬기에 나오미가 죽이자는 제안을 했을 때 별로 놀라지 않았고 그리 큰 고민 없이 동참한 것이다. 그녀의 진짜 고민은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와 그에 따른 죄책감이 아니라, 폭력남편을 '제거'하고 난 후 어떻게 하면 범죄를 은폐시킬 수 있는가, 그 후에 자신이 정상적인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는가에 있다. 성격이 여린 탓에 당하고만 있던 가나코는 동기부여와 함께 조력자를 얻게 되면서 점점 적극적이 되어간다. 제거를 실행한 후에는 범죄 은폐를 위해 주도적으로 상황을 이끌어간다.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자신임을, 자신이 상황을 정리하고 끝을 맺어야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첫 발을 떼기가 어려웠지만 그녀는 감정의 정당성을 바탕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시작한다. 폭력남편에게 말 한 마디조차 못했던 그녀가 포위망을 좁혀오는 사회를 뚫고 나가기위해 스스로를 재무장한다. 우리가 범법행위를 저지른 나오미와 가나코를 감정적으로 응원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결과론적인 행위 이전에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방어본능이 감정의 정당성과 함께 범죄의 합리화를 동정으로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클리어런스 플랜(제거 + 은폐)은 성공인가?

3인칭 시점이지만 이 작품의 화자는 나오미와 가나코다. 오직 두 사람의 행동과 결과, 생각과 느낌만이 작품 내내 흐르고 있다. 그건 제 3자의 시선을 차단한다는 뜻이다. 그녀들의 행위를 외부시선으로 평가하지 말라는 작가의 의도다. 작품 내 누구도 그녀들의 행위를 평가할 수 없다는 의미고, 독자 또한 오직 두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걸 보자고 말하는 거다. 그렇다면 폭력남편을 제거한 후의 그녀들의 대처방식은, 은폐작전은 어떠한가? 그녀들이 세웠던 클리어런스 플랜(제거 + 은폐)은 성공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전문가도 아닌 일반 여성 두 명이 폭력남편을 제거하고 은폐하기 위해 이 정도 계획을 짜고 움직였다면 자신들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어설픈 계획이었다는 건 결과론적인 얘기다. 그렇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상의 어떤 계획도 완벽할 수 없다.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그 계획이 최대한 맞물려 돌아가 성공할 때 결과론적으로 완벽한 계획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 계획이 운에 어느 정도 좌우가 돼도 말이다. 곧, 결과론적인 운도 그러한 행위를 했기에 운이 작용한 것으로 일정부분 평가를 받는다는 거다. 이 작품에서 막판 그녀들의 모습이 CCTV 영상으로 찍힌 건 운이 없다고 봐야한다. 두 사람은 CCTV를 염두하고 있었다. 비록 매순간 CCTV를 의식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들은 전문가가 아니다. 평범한 일반 여성이다. 작품에서 이 정도로 대처를 했다는 건, 운도 따랐다는 건 그녀들의 계획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계획이었고 행위였음을 뜻한다. 결과론적으로도 그녀들의 클리어런스 플랜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성공했다. 끝까지 잡히지 않은 것!

 

 

위에서 오직 두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걸 보자고 적었다. 작가의 의도를 필자는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계획의 평가도 두 사람의 입장에서 봐야한다고 본다. 두 사람의 입장에서 클리어런스 계획의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나오미라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면서 기계부속품처럼 돌아가는 일상을 탈출하는 것이겠고, 가나코의 입장이라면 폭력남편에게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겠다. 결과론적으로 두 사람은 작품 내에서 행위의 목적을 이뤘고 새로운 꿈의 가능성을 안은 채 잡히지 않고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성공한 게 아닌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범인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생겼고, 대놓고 도주를 해 진범임을 자인하는 꼴이 되었으니 실패한 계획, 범죄가 아닌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두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 만약 두 사람의 알리바이가 완벽해 누구도 그녀들을 의심하지 않는, 법적으로 자유로운 상황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녀들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까? 나오미는 여전히 백화점 외판부 직원으로 기계부속품처럼 살아갈 것이다. 트라우마를 간직한 채 말이다. 가나코는 폭력남편에게는 벗어났지만 미심쩍어 하는 시댁의 감시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이다. 동네에 소문이 났으니 어딘가로 이사를 가야하지만 그래봤자 일본의 어디다. 언제 들통 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가끔 만나는 친정 부모님을 대하는 것도 곤혹스러울 것이다. 이게 진정 그녀들이 원하는 삶일까? 물론 두 사람의 처음 계획은 법적으로 완벽한 알리바이였다. 그러나 그 알리바이가 깨질 확률이 높아지자 그녀들은 주저 없이 도주를 얘기하고 선뜻 동의한다. 이건 두 사람의 내면에 무의식적으로 잠재해 있는 욕망이 동기부여를 받았다는 뜻이다. 그 욕망이 위에서 얘기한 현재의 처지에서의 탈출이다. 그러니 CCTV에 찍혀 궁지에 몰린 건 불운이 아니라 결과론적으로 행운이다. 원래 계획에서 어긋났지만 자신들이 무의식적으로 원하는 상황으로 흘러가 일단은 잡히지 않았으니 법적인 자유로움보다 이게 훨씬 최선의 결과라고 본다. 그녀들의 입장에서도 말이다. 그러므로 이 범죄는 완전범죄(법적인 자유로움)는 아니지만 성공한 클리어런스 계획이라고 할 수 있고, 두 사람은 이 사건을 '미션 클리어' 했다고 본다. 우리가 이 작품에서 통쾌함을 느끼는 건 단순히 잡히지 않고 떠났다기보다, 그녀들의 내면에 자리한 욕망이 실현될 가능성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상하이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펼칠 그녀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장면이 떠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결말을 어떻게 할지 작가도 마지막까지 망설인 소설"이라는 책 소개 구절이 있다. 필자는 이러한 결말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만약 범죄를 저질렀기에 그 대가로 잡혀야한다는, 영화 '델마와 루이스'처럼 비장하게 끝을 맺었다면 이 작품의 내용은, 전개방식은 좀 달랐어야 했다. 즉, 제 3자의 시선이 자유롭게 드나들어 그녀들의 행위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하며, 살인이라는 행위에 대한 두 사람의 고뇌와 주저가 확연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범법행위의 끝에는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결말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작부터 끝까지 행위에 대한 감정의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으며, 살인에 대한 고뇌와 죄책감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러한 결말은 당연하면서도 최선이라 할 수 있다.

 

 

첨언. 살인이라는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끝난다는 점에서 혹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을 논하는 내용이 아니라, 평범한 일반 여성 두 명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맞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긴박하게 오락적으로 보여주는, 일탈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불편할 필요는 전혀 없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독자 여러분도 주인공들과 함께 조마조마, 두근두근, 즐겨"주면 된다. 그리고 책장을 덮으며 재밌게 잘 봤네, 하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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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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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불안에서 메워진 결핍의 완성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할 때 옆에 있는 누군가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보고 배우며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은 그만큼의 영향력을 갖는다(그게 친부모이든 아니든.) 그런 역할적 존재가 없는 아이를 ‘고아’라고 부른다. 그것이 행적적인 표현이든 정신적인 부재의 상징이든 ‘없다’ 또는 ‘외롭다’는 결핍의 내용물을 담고 있는 이 단어는 누군가가 해야 할 부모의 역할을 스스로 하거나 찾아야하는 운명을 지니게 된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그래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속할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갑자기 부모가 실종되고 졸지에 고아가 된 주인공 크리스토퍼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곧바로 영국에 있는 이모에게 보내진 이 미성숙한 존재에게 이모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단순보호자에 머문다. 소년 크리스토퍼는 이 결핍의 구멍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않고 스스로 메우고자 한다. 그것이 그가 탐정이라는 직업을 갖게 된 배경이다. 결핍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원인을 찾아야하는데 이 직업만큼 자유로우면서 적절한 직업도 없다. 게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찾겠다는 내면의 의지는 고아에서 하나의 성숙한 존재로 성장하는 긴 시간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직업이다.

 

 

주인공이 조금씩 구멍을 메운다면, 그가 무의식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여인, 세라는 그 구멍을 가리는데 치중한다. 그러니까 결핍을 지워나가는 방식은 메우거나 가리는 두 가지가 있겠다. 메우는 방식은 힘이 든다. 그러나 조금씩 메워나가는 모습에 그의 존재는 점차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후에 어떤 모양으로 메워지고 형태로 나타나든 말이다.

 

 

그에 반해 세라가 가리는 방식은 손쉽고 빠르다. 어떤 포장으로든 가릴 수 있어 자신 외에 그 구멍의 존재와 깊이를 알 수 없다. 게다가 한 장으로 가리는 것이 불안해 그 위에 끊임없이 포장지를 덮어둔다. 한 번 만들어진 구멍은 메우지 않는 한 점점 깊어질 수밖에 없다. 신체적 나이에 따른 자의식의 성숙이 불안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결핍은 깊어지지만 자신이 내면의 포장지로 끊임없이 덮어두었기에 구멍을 메웠다는 기억 속의 오류를 조장할 수도 있다. 그렇게 가린 포장지 위를 누군가가 건드리거나 스스로가 밟았을 때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영혼은 결핍을 외면하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세라는 이 불안한 포장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개인을 넘어선 거대서사를 끌어들인다. 그것이 바로 ‘세계평화’라는 담론이다. 주인공의 구애를 알면서도 그녀의 선택은 불안한 포장지를 굳건히 할 수 있는 명망 있고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불안을 해소하고 자신을 완성하려 한다. 개인의 결핍과 불안을 세계평화라는 큰 담론으로 치환해 메우려는 이러한 행동은, 개인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을 주고, 세계평화라는 거대서사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작품의 배경인 1930년대의 전쟁 모습이다. 물론 그녀의 행동이 전쟁에 끼치는 영향은 전혀 없다. 작가가 이 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건 아마도 개인이나 세계의 평화가 얼마나 깨지기 쉽고 불안정하며 가리기 쉬운지를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닌가 싶다. 상하이의 불안한 정세를 본격적으로 알기 전, 영국 사교계에서 허망할 정도로 세계평화를 거론하는 부분이 그렇다. 그녀의 이런 행동들은 작품을 굳건히 하는 토양으로 작용한다.

 

 

1인칭 시점으로 쓰인 이 작품은 오로지 화자의 기억과 생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작품에서 또 다른 불안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이를테면 부모가 실종된 실재적 사건 속에서 ‘고아’로서의 존재적 불안이 작품을 끌어간다면, 기억의 불확실성은 결핍을 채우는 내용물의 성분을 뒤흔들어 그것이 올바른 작업방식인지를 끊임없이 환기, 확인시킨다. 주인공이 상하이로 돌아가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불확실한 기억의 오류를 바로 잡아나가려는 행동. 그것은 곧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겠다는 의지인데, 그 의지를 끊임없이 뒤흔드는 역할이 바로 세라다. 결핍을 메우는, 사건의 실체에 점점 다가가는, 기억의 오류를 잡아나가는 과정 속에서 불안은 점점 더 커지고 그의 의지를 시험한다. 그것이 급박한 상하이의 정세를 세라와 함께 탈출하려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세라가 주인공을 놔둔 채 혼자 상하이를 탈출한 반면, 주인공은 끝내 사건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데 이 두 모습은 결핍을 메워나갔던 두 사람의 방식과 닮았다.

 

 

부모가 실종된 사건의 실체를, 자신이 고아가 된 원인을 알게 된 주인공. 자, 이제 무엇이 남았을까? 결핍은 완전히 메워지지 않았다. 주인공이 그동안 메웠던 작업은 어떤 성분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덮어야하는지를 알아내는 내면의 설계도면이다. 그 도면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그가 취할 수 있는, 취해야 하는 방식은 외적인 행동이다. 주인공은 어렴풋이, 아니면 직감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외적인 행동의 실마리를 영국에 남겨두고 왔다. 제니퍼라는 소녀를 입양한 것. 역할적 부모의 존재가 없었던 자신의 결핍을 메우는 동시에 한 아이의 결핍을 메워주고자 하는 주인공의 행동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평화라는 담론을 완성시킨다. 그것이 21년 후, 다시 만나게 되는 어머니와의 재회다.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보낸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지낸다. 21년이란 시간동안 전쟁은 끝나있고 주인공은 제니퍼와 믿고 의지하는 가족이 되었으며 그토록 찾았던 어머니와의 재회는 그에게 또 다른 안도와 안식을 준다. 결국 개인의 평화가 세계평화라는 담론을 완성하니, 곧 결핍과 불안에 그 원인이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우리가 고아였을 때’인 이유가 바로 이점이 아닌가 싶다. 역할적 존재의 부재, 그로 인한 불안의 형성은 고아였을 때 일어나며 그것이 한 인격체의 완성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며 결핍을 메워 완성된 모습은 또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개인의 사건이 거대서사와 맞물려 돌아가는 이 작품은 반전과 더불어 스릴러적 묘미를 준다.

 

 

첨언. 결핍을 메우는 두 가지 방식에서 옳고 그름을 나눌 수는 없다. 때론 원인을 찾아 해체하고 메우는 방식이 당사자에게는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상하이에서 세라와 그대로 떠났다면 주인공과 세라, 제니퍼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다만 유추할 수 있는 건 두 사람의 두 가지 방식이 상충되기에 그리 좋은 가정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듯싶다. 그리고 중요한 건 결국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누구보다 스스로를 자신이 잘 알고 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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