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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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불안에서 메워진 결핍의 완성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할 때 옆에 있는 누군가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보고 배우며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은 그만큼의 영향력을 갖는다(그게 친부모이든 아니든.) 그런 역할적 존재가 없는 아이를 ‘고아’라고 부른다. 그것이 행적적인 표현이든 정신적인 부재의 상징이든 ‘없다’ 또는 ‘외롭다’는 결핍의 내용물을 담고 있는 이 단어는 누군가가 해야 할 부모의 역할을 스스로 하거나 찾아야하는 운명을 지니게 된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그래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속할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갑자기 부모가 실종되고 졸지에 고아가 된 주인공 크리스토퍼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곧바로 영국에 있는 이모에게 보내진 이 미성숙한 존재에게 이모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단순보호자에 머문다. 소년 크리스토퍼는 이 결핍의 구멍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않고 스스로 메우고자 한다. 그것이 그가 탐정이라는 직업을 갖게 된 배경이다. 결핍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원인을 찾아야하는데 이 직업만큼 자유로우면서 적절한 직업도 없다. 게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찾겠다는 내면의 의지는 고아에서 하나의 성숙한 존재로 성장하는 긴 시간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직업이다.

 

 

주인공이 조금씩 구멍을 메운다면, 그가 무의식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여인, 세라는 그 구멍을 가리는데 치중한다. 그러니까 결핍을 지워나가는 방식은 메우거나 가리는 두 가지가 있겠다. 메우는 방식은 힘이 든다. 그러나 조금씩 메워나가는 모습에 그의 존재는 점차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후에 어떤 모양으로 메워지고 형태로 나타나든 말이다.

 

 

그에 반해 세라가 가리는 방식은 손쉽고 빠르다. 어떤 포장으로든 가릴 수 있어 자신 외에 그 구멍의 존재와 깊이를 알 수 없다. 게다가 한 장으로 가리는 것이 불안해 그 위에 끊임없이 포장지를 덮어둔다. 한 번 만들어진 구멍은 메우지 않는 한 점점 깊어질 수밖에 없다. 신체적 나이에 따른 자의식의 성숙이 불안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결핍은 깊어지지만 자신이 내면의 포장지로 끊임없이 덮어두었기에 구멍을 메웠다는 기억 속의 오류를 조장할 수도 있다. 그렇게 가린 포장지 위를 누군가가 건드리거나 스스로가 밟았을 때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영혼은 결핍을 외면하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세라는 이 불안한 포장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개인을 넘어선 거대서사를 끌어들인다. 그것이 바로 ‘세계평화’라는 담론이다. 주인공의 구애를 알면서도 그녀의 선택은 불안한 포장지를 굳건히 할 수 있는 명망 있고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불안을 해소하고 자신을 완성하려 한다. 개인의 결핍과 불안을 세계평화라는 큰 담론으로 치환해 메우려는 이러한 행동은, 개인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을 주고, 세계평화라는 거대서사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작품의 배경인 1930년대의 전쟁 모습이다. 물론 그녀의 행동이 전쟁에 끼치는 영향은 전혀 없다. 작가가 이 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건 아마도 개인이나 세계의 평화가 얼마나 깨지기 쉽고 불안정하며 가리기 쉬운지를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닌가 싶다. 상하이의 불안한 정세를 본격적으로 알기 전, 영국 사교계에서 허망할 정도로 세계평화를 거론하는 부분이 그렇다. 그녀의 이런 행동들은 작품을 굳건히 하는 토양으로 작용한다.

 

 

1인칭 시점으로 쓰인 이 작품은 오로지 화자의 기억과 생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작품에서 또 다른 불안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이를테면 부모가 실종된 실재적 사건 속에서 ‘고아’로서의 존재적 불안이 작품을 끌어간다면, 기억의 불확실성은 결핍을 채우는 내용물의 성분을 뒤흔들어 그것이 올바른 작업방식인지를 끊임없이 환기, 확인시킨다. 주인공이 상하이로 돌아가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불확실한 기억의 오류를 바로 잡아나가려는 행동. 그것은 곧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겠다는 의지인데, 그 의지를 끊임없이 뒤흔드는 역할이 바로 세라다. 결핍을 메우는, 사건의 실체에 점점 다가가는, 기억의 오류를 잡아나가는 과정 속에서 불안은 점점 더 커지고 그의 의지를 시험한다. 그것이 급박한 상하이의 정세를 세라와 함께 탈출하려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세라가 주인공을 놔둔 채 혼자 상하이를 탈출한 반면, 주인공은 끝내 사건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데 이 두 모습은 결핍을 메워나갔던 두 사람의 방식과 닮았다.

 

 

부모가 실종된 사건의 실체를, 자신이 고아가 된 원인을 알게 된 주인공. 자, 이제 무엇이 남았을까? 결핍은 완전히 메워지지 않았다. 주인공이 그동안 메웠던 작업은 어떤 성분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덮어야하는지를 알아내는 내면의 설계도면이다. 그 도면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그가 취할 수 있는, 취해야 하는 방식은 외적인 행동이다. 주인공은 어렴풋이, 아니면 직감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외적인 행동의 실마리를 영국에 남겨두고 왔다. 제니퍼라는 소녀를 입양한 것. 역할적 부모의 존재가 없었던 자신의 결핍을 메우는 동시에 한 아이의 결핍을 메워주고자 하는 주인공의 행동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평화라는 담론을 완성시킨다. 그것이 21년 후, 다시 만나게 되는 어머니와의 재회다.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보낸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평화롭게 지낸다. 21년이란 시간동안 전쟁은 끝나있고 주인공은 제니퍼와 믿고 의지하는 가족이 되었으며 그토록 찾았던 어머니와의 재회는 그에게 또 다른 안도와 안식을 준다. 결국 개인의 평화가 세계평화라는 담론을 완성하니, 곧 결핍과 불안에 그 원인이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이 ‘우리가 고아였을 때’인 이유가 바로 이점이 아닌가 싶다. 역할적 존재의 부재, 그로 인한 불안의 형성은 고아였을 때 일어나며 그것이 한 인격체의 완성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며 결핍을 메워 완성된 모습은 또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개인의 사건이 거대서사와 맞물려 돌아가는 이 작품은 반전과 더불어 스릴러적 묘미를 준다.

 

 

첨언. 결핍을 메우는 두 가지 방식에서 옳고 그름을 나눌 수는 없다. 때론 원인을 찾아 해체하고 메우는 방식이 당사자에게는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상하이에서 세라와 그대로 떠났다면 주인공과 세라, 제니퍼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다만 유추할 수 있는 건 두 사람의 두 가지 방식이 상충되기에 그리 좋은 가정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듯싶다. 그리고 중요한 건 결국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누구보다 스스로를 자신이 잘 알고 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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