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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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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이래로 어떻게 하면 내가 읽고 싶은 그 많은 책들을 빠른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늘 고민거리였다. 처음 접한 독서법에 관한 책은 안상헌의 ‘어느 독서광의 생산적 책읽기 50’이었다. 이 책으로부터 삶에 대한 훌륭한 조언과 통찰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정작 독서법에 관한 내용은 부실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고 내 나름의 독서 방법을 만들어 시도해 왔지만 항상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은 쓸데없는 군더더기는 다 빼고 진짜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매일 매일 서점에는 신간이 쏟아져 나오고, 선현들이 써놓은 고전들은 산더미 같으며, 지적 요구 때문에 혹은 호기심 때문에 읽고 싶고, 읽어야만 하는 책들은 자꾸만 쌓여간다. 그러다 보니 점점 ‘양’의 독서에 집착을 하게 된다. 이 책의 핵심은 슬로 리딩 즉, 책을 천천히 읽으라는 것이다. 저자는 ‘양’의 독서에서 ‘질’의 독서로 전환을 요구한다. 저자는 속독에 대해서 ‘속독은 내일을 위한 독서’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경고한다. 속독을 하게 되면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피상적인 정보만을 보충하게 되며 오독의 가능성 또한 높다. 반면에 슬로 리딩은 오년 후, 십년 후를 위한 독서이며,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일, 시험, 면접에도 도움이 되고 한 사람의 인간성의 깊이를 더해준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양’의 독서와 ‘질’의 독서. 피상적인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서라면 양의 독서가 더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질’의 독서가 필요하다. 나는 지난 독서 경험에서 속독과 슬로 리딩의 차이를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속독을 한 경우에는 단지 며칠만 지나도 그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가 하면 내 삶과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내용들은 거의 없었다. 반면에 슬로 리딩을 한 경우에는 내용이 쉽게 잊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삶의 국면에서 문득 슬로 리딩한 내용들이 떠올라 내 삶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오래전에 읽은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에서 보상과 처벌에 관한 내용이 짧게 언급 되는데, 나는 그 문제를 가지고 꽤나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바로 슬로 리딩을 했던 것이다. 그런 슬로 리딩을 한 보상과 처벌에 관한 내용은 내 머릿속에 깊이 박히게 되었고 사람과의 관계 문제나 혼자서 공부를 할 때 문득 그 내용이 떠올라 그 방법이 이용되곤 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러한 슬로 리딩에 대한 적용이 이 책에는 문학작품, 특히 소설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분명 문학작품은 슬로 리딩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비문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비문학 작품의 경우에도 이러한 독서법을 적용해서 읽어야 할까? 일본의 지성이라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법을 보면 이 책의 저자와는 반대로 속독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학 작품은 슬로 리딩, 비문학 작품은 속독을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해볼 문제다.
 

 책읽기는 평생 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내용들이 정답을 아닐지라도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똑같은 책을 읽었더라도 사람마다 그 책에 대한 이해도 다를 것이고 책에 대한 느낌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깊이 있는 독서를 할 것인지 가벼운 독서를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이왕 책 읽기를 시작했다면 즐거움과 삶의 질을 높여주는 깊이 있는 독서를 선택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책에서 말하는 독서란, 단순히 피상적인 지식으로 인간을 꾸며주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그 사람을 바꾸어 사려 깊고 현명하게 만들며 인간성에 깊이를 더해주는 것을 뜻한다.

슬로 리딩은 인생을 오늘 지금 이 순간보다 더 풍요롭고 개성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독서이다.

차이란 항상 미묘하고 섬세한 것이다.

독자가 책을 선택하듯 책 또한 독자를 선택한다.

독서에는 시기가 있다. 책과의 절묘한 만남을 위해서는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젊은 시절의 기억에 석연치 않은 무언가를 각인시킬 뿐인, 삼진 혹은 파울 같은 독서법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법이다.

외관의 변화는 사진이나 동영상 보존이 해준다. 그러나 내면의 변화를 실감나게 해주는 것은 책이다.

소설을 읽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상을 과신하지 않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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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
허련순 지음 / 인간과자연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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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내 옆집에 사는 아저씨는 조선족 아저씨다. 문득 이 소설에 나오는 조선족들처럼 그 아저씨도 배를 타고 밀항 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주변에서 조선족들을 많이 보게 된다. 내 옆집 아저씨도 그렇고 식당에 가도 말씨가 조금 어눌한 조선족들을 많이 보게 된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들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삶은 어떻고 왜 밀항까지 하면서 한국에 와서 돈을 벌려고 하는지에 대해 나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한민족이면서도 다른 사람으로 취급하는 조선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이 책을 몰입해가며 읽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사건들에 대한 개연성 부족 때문이었다. 내가 어떤 소설을 보고 그 소설을 평가하는 기준 중에 하나가 바로 인과성, 사건들에 대한 유기적인 연결 관계이다. 헌데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점들이 부족해 보였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들이 설명되지 않은 채 일들이 발생해 버린다. 어쩌면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는 주인공 ‘세희’가 자식들을 남겨두고 왜 떠나는가에 대한 설명이 책에는 나와 있지 않다. 그저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사건에 대한 필연성이 적으니 글을 읽는데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소설의 중간 중간 작가의 생각이 들어나는 부분에서 식상함, 촌스러움, 낯간지러움 같은 것들이 느껴졌다. 예를 들어 319p에 나오는 책장 묘사에서 죄와 벌, 노인과 바다, 그리스 로마 신화, 신곡 같은 것들을 일일이 언급하는 부분이 그렇다.

이 책에는 ‘나비’가 많이 등장한다. 책의 제목에도 나비가 들어가 있고, 용이와 동일시 된 애완견 이름도 나비이다. 그리고 후반부에도 배 안으로 들어오는 나비가 등장한다. 나비란 무엇인가. 이 책의 제목은 왜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인가. 책에 나오는 바처럼 나비에게는 집이 없다. 그래서 나비는 날아가 앉는 곳이면 다 집인 줄 안다. 이것은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는 조선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족을 한국인으로 봐야 될까, 중국인으로 봐야 될까. 그들은 한국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다. 분명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고 중국에 살지만 조선의 피를 물려받은 조선족이라고 소외당하고, 같은 조상으로부터 피를 물려받았지만 한국에 오면 지금껏 우리와 다른 곳에 살아왔다는 이유로 한국인으로부터도 소외당한다. 조선족들은 그들 자신이 누구일까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집이 없다. 중국의 연변도, 한국도 그들에게 진정한 집이 아니다. 그저 자신들의 집이 그 곳이라고 믿고 살 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에서는 나비를 핵심 키워드로 쓴 것이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라는 물음은 ‘나비의 집은 없다’는 대답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작가는 조선족의 정체성에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환상에 속는 것은 속을 수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속고 싶어서이다. 20p

 

인간은 인간다운 환경에서만 체면이 유지되는 것이다. 27p

 

죽음의 한순간에 비하면 삶이란 너무 지루한 것 같기도 했다. 84p

 

사람이란 언젠가는 죽어야 하오. 그러니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지... 147P

 

사내란 한 번 결정하면 뒤돌아봐선 안 돼. 198p

 

여자와 남자 사이의 감정이란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244p

 

내가 사는 이유도 모르는데.... 327p

 

삶과 죽음이란 원래 그렇게 함께 있는 것인지 모른다. 3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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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팡세 생각하는 갈대
박철수 편역 / 예찬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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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팡세의 완역이 아니라 박철수 목사가 편역을 하여 출판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적 색체가 강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파스칼이라는 인물은 수학자로 볼 수도 있고, 물리학자라고 볼 수도 있고, 철학자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 책에서는 <팡세>의 내용을 중심으로 파스칼의 종교사상가적인 측면만을 집중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파스칼이라는 인물을 한마디로 말하면 천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9세의 나이에 요절하였지만 그의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들이었다. 파스칼의 원리, 적분법 창안등 과학사에 길이 남을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그의 그러한 업적 뒤에 생(生)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것은 독실한 신앙생활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변증론>을 집필하기 위하여, 단편적인 초고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병고로 인하여 완성하지 못한 채, 39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 초고가 바로 <팡세>다.

 

이 책에서 느껴지는 것은 파스칼이 인간이란 존재를 참으로 나약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심지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독교는 별나다. 기독교는 인간이 비열하고 가증스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면서도 하나님과 같이 되도록 명한다.>229p 그는 인간에 대한 불완전성과 원죄에 대해서 거듭 강조하고 있다. 유일신이 존재하고 인간은 참회하고 회개하여야 한다는 입장은 중세를 지배했던 이념이다. 인간의 이성, 육체, 감정을 부정하고 오직 신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파스칼과 동시대에 살았던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을 강조함으로써 근대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19세기의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며, 당시까지 서구사회를 지배하고 기독교적 문화와 가치체계를 송두리째 부정했다. 신 중심의 기독교적 문화가 인간 중심적인 문화로 전환되어야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이후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근대가 탄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파스칼은 중세의 기독교적 가치를 추구한 마지막 세력 중에 하나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인간을 한계 속에 가두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것 때문에 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자기 자신을 가두는 행위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 중심의 시대였던 중세를 인간의 암흑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살았기 때문에 중세시대에는 인간 문명의 크나큰 발전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신 중심의 세계관을 깨고 나서야 인간의 문명은 근대로 진입이 가능해 진 것이다. 근대 이후로는 인간을 한계 속에 가두어 놓지 않는다. 인간 자신이 신이 되려고 한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 세계관은 신을 모방한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인간이 종교를 믿는 것은 어쩌면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가 싶다. 유한한 삶이 주어진 인간들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밖에 없고 모든 것들이 불확실한 것들이다. 그런 필연적 죽음과 불확실성 속에서 의지할 곳을 찾게 되는데 그 안식처가 바로 종교인 것이다. 종교를 통하여 인간은 비로써 안심을 하게 된다. 죽음 이후에 대한 확신 같은 것들로 말이다.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심적으로 굉장히 나약해 졌을 때 주로 종교를 찾게 된다. 예를들어, 나 같은 경우에는 심적인 스트레스가 굉장한 군대라는 곳에서 열성적인 종교인이었다. 종교라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근원의 안정을 주는 종교 때문일 것이다. 파스칼이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이 어쩌면 종교적인 안정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스칼이 분명 위대한 업적을 후대에 남긴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세계관은 중세시대에 얽매여 있었고 그 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파스칼이 남긴 유명한 문구인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를 생각해 본다. 인간은 심히 나약하고 연약한 존재이고, 또한 살아가면서 자신의 행동과 사상, 사고가 흔들릴 수도 있지만, 인간은 생각할 수 있기에 위대한 존재로 인식될 수 있다.라고 생각해 왔는데, <파스칼의 팡세 생각하는 갈대>를 읽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파스칼이 이야기한 이 말의 본질은 인간은 나약하면서도 생각하는 존재이므로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신상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믿은 인간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유 없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종교란 무엇이고 내가 왜 그 종교를 믿어야 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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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 비틀어 보기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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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적인 느낌은 복합적이다.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고,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고, 이해가 안 되었던 부분도 있었고, 지루한 부분도 있었다. 사실 움베르토 에코의 명성은 이미 익히 들어왔지만 그의 책을 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선 움베르토 에코는 왜 이런 책을 썼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져야 할 듯하다. 이 책은 한마디로 자신이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불만에 대한 토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유머를 섞어 신랄하게 풍자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용 설명서를 따르는 방법’(87p)에서 그는 뚜껑이 잘 고정이 안 되는 설탕 그릇을 발명한 사람을 감옥에 가야 된다고 주장하며, 덧붙여서 그런 설탕 그릇을 발명한 자들은 머지않아 안쪽에서만 문이 열리는 대단히 안전한 자동차를 발명하게 될 거라고 풍자를 한다. 이처럼 어쩌면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그는 불쾌하지 않고 웃을 수 있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럼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한번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책일 수도 있다. 이 책에 대한 주제를 찾는 것도 또한 바보같은 짓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를 찾아본다면, 살다가 짜증나는 것들이 있다면 참지 말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풀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마지막 옮긴이의 글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에코는 자기 글이 어렵다고 말하는 독자들을 오히려 <메스미디어의 계시에 힘입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로 여깁니다.’ 그의 글이 어려운지 안 어려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미디어에 길들여져 세상만사를 너무 쉽게만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공감이 간다. 요즘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쉽게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생각 자체를 하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그렇다면 인간이면서 생각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인간 자체를 거부한다는 말이 아닌가. 최소한 ‘인간’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재미있게 읽은 것들

미래의 카이만 제도를 구경하는 방법(46p)

사용 설명서를 따르는 방법(87p)

수입이 많은 직업을 선택하는 방법(96)

<맞습니다>라는 말로 대답하지 않는 방법(104p)

축구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129p)

유명인을 만났을 때 반응하는 방법(156p)

포르노 영화를 식별하는 방법(160p)

시간을 알지 못하는 방법(195p)

동물에 관해 말하는 방법(218p)

서재에 장서가 많은 것을 정당화하는 방법(233p)

미래로 되돌아가는 방법(261p)

죽음에 담담하게 대비하는 방법(269p)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279p)

 

 

 

ps. 그런데 정작 책에는, 이 책의 제목인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 대한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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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필립 쿡 지음, 권영경 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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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기간이 아님에도 매일 만원을 이루는 도서관, 그 빽빽하고 공기도 별로 안 좋은 곳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측은하기도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점점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취업문을 향해 뛰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왜 저럴까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기는 것도 사실이다. 대기업,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면 좋지만 만약 탈락하면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생지옥이라는 암울한 현실과 불안감, 두려움이 그들을 도서관으로 몰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90년대 말 IMF를 거치며 사회적 안정망들이 하나, 둘씩 제거가 되면서 우리 사회는 빠르게 승자독식사회로 치닫고 있다. 온갖 미디어에서는 더 나은 세계로, 행복한 세계로 가고 있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매일 주입시키지만 우리의 삶은 변한 것이 없거나 점점 힘들어 지고 있고, 그 행복한 세상으로 향하는 사람은 오직 소수뿐이다. 1995년의 미국 상황이 현재 2008년 대한민국과 비슷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은 한국 사회의 현실과 잘 맞아 떨어진다.

이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자독식사회가 되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돈이 최고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승자독식사회가 도래하리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 마르크스로부터 예견되어진 바이다. 그것을 자본주의 신봉자였던 미국에 드디어 문제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저자는 경제학자답게 세부적이고 구체적으로 현재 우리 사회가 어떻게 승자독식사회로 가고 있는지를 경제학적 접근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이 세상을 단순화 시켜 직업이 2가지 밖에 없는 가상의 사회를 만들어 승자독식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분석해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책에서는 승자독식사회의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의 능력 차이가 심화된 결과가 아니라 기회의 분포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기회 분포의 변화는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켜왔고 결국에는 이런 불평등의 증가는 경제성장을 자극하기보다는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결론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통하여 불평등을 막아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예를 들어 누진소득세를 강화한다거나, 연봉의 상한선을 두는 의미 있는 담합을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물론 다 좋은 이야기이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과연 현실세계에서 실현 가능한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이미 이런 문제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지적하고 사회를 이런 식으로 바꾸려 노력했다. 하지만 사회는 점점 더 승자독식사회로 치닫고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나 대한민국 사회 같은 경우 한미FTA를 비롯하여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들은 다 전부 승자독식사회로 가기 위한 것들이다. 사실 나는 의문이다. 우리 사회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데 왜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변하지 않으려고 하는지 말이다.

이미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나은, 살기 좋은 사회로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은 다 해결이 되었다고 본다. 완벽하진 않지만 모범적인 예로 북유럽같은 국가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방법들을 어떻게 실현 하는가’인데, 가장 큰 문제는 국민 개개인의 인식변화가 가장 시급하고도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사회가 어떻게 되는 내가 승자가 되면 될 것이 아닌가’라는 자기과신 혹은 천박한 생각 많고 또한 ‘국가 경제를 위해 비정규직 확산에는 동의 하지만 나는 비정규직이면 안 된다는 이중적인 생각’ 같은 것들은 정말 심각한 문제이며 하루 빨리 바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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