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시작하는 마음 - 우리들의 새로운 출발선 위 아 영 We are young 4
이주호 외 지음, 임나운 그림 / 책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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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이 흐릿해서 선뜻 글 쓸 엄두를 내지 못한다. 

<봄, 시작하는 마음>을 읽으며 길어올려진 나의 중학 생활은 세 가지였다.

과목별 선생님들, 온통 여자인 급우들, 담임선생이 지도한 특별활동반.

 

사회를 가르친 담임선생님은 대학을 막 졸업한 국사 전공자로서 패기 넘치게 '시 창작' 특별활동반을 개설하였다.

교과서 동시나 읽었을 소녀들에게 한국과 외국의 명시들을 읽어주고 직접 짓게 했다. 선생의 감성에 반한 나는 매주 한두 편씩 시를 썼다.

 

가끔 선생은 친구들 앞에서 내 시를 칭찬하며 낭송할 기회를 주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읽는 동안 나는 몽글몽글한 구름 위에 떠 있었다.

 

시 쓰는 재미에 빠진 어느 날, 새로운 시를 써서 칭찬받을 기대를 하며 특활 수업에 갔다.

선생이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창작한 시가 아니라 모방한 시냐? 모방이야말로 최고의 연습이야. 잘했어."

야단을 맞진 않았으나 내가 지은 거라고 제출했기에 거짓말한 기분이 들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야 외국 시인이 쓴 시구라는 걸 알았다. 언젠가 읽고 지나쳤다가 불현듯 생각난 시구를 내가 지은 시라고 착각한 나는 거 참 잘 썼네, 하며 선생께 제출했던 것이다.

정직하지 않으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몸으로 기억하게 된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내 관심 영역에 시 창작 따위는 없었다. 멋진 담임 선생님에 끌려 ''라는 새로운 세계에 한 발을 디딘 경험이 있었기에 무언가를 창작하는 기쁨도 알게 되었고, 정직이라는 가치도 배울 수 있었다.

    

<, 시작하는 마음>은 새로운 출발, 새로운 세계로 입문하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는 작가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열네 살, 혹은 열여덟 살의 문지방을 넘었으며, 어른이 되어 새롭게 시작한 일들은 무엇인지 담백하게 들려준다.

 

태지원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에 톤(tone)이라는 만화 동아리에서 활동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작가는 그 경험 이후 자신이 이야기를 사랑하고 펼쳐 내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작가는 지금도 새로운 원고를 쓸 때면 만화를 그리던 열일곱 살의 설렘을 만난다고 고백하였다.


p.51 내가 만든 이야기 속 극적이고 근사한 삶을 사는 인물들과 현실의 나는 달랐다. 머뭇거리고 서툰 일상을 보냈다. 심지어 적응력도 느렸다. (중략) 직접 내 손으로 짓고 허물 수 있는 세계를 처음으로 발견한, 그런 봄이었다. - 태지원 씀.

 

감정사회학자인 김신식 작가는 수치심을 느꼈던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돌아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이 다른 친구들보다 점점 부족해졌던 이유를 톺아보며(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 '기본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p. 88, 92 '그리 따져 묻다 보면 그동안 자신이 굳건히 믿어 온 배움의 내용도 의구심의 대상이 되는구나. 충분히 알았다고 여겨 온 나름의 답과 가치들이 낯설고 새롭게 보이는구나.' (중략) 기본기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묻는 걸 창피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 김신식 씀.

 

인간의 뇌는 즐거운 경험보다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배운다고 한다.

이승주 소설가는 영원히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엄마를 잃은 뒤에 새로운 행동을 하게 됐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경험은 작가를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p. 189 내일도 엄마가 내 곁에 있을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다음과 내일은 없었다. 싸우고 화해하지 못한 제 영영 헤어졌다. 우리가 서로 눈을 맞추며 얘기할 수 있는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중략) 그리고 전에 없던 버릇이 생겼다. 가족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헤어질 때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았다. - 이승주 씀

 

이밖에도 각계각층의 직업군에서 일하는 다섯 작가(이주호, 김해리, 황효진, 강지혜, 채반석)의 글을 더 볼 수 있다.

어느 세대라도 공감할 만한 <, 시작하는 마음>을 읽는 동안, 무의식 저 깊숙이에 박혀 어렴풋해진 나의 학창 시절을 길어 올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시작'이라는 폭풍을 겪은 나 혹은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 올리는 두레박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이 무언가를 시작하는 마음은 어떠했나?

당신의 두레박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올라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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