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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걷다 -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
박종언 지음 / 파이돈 / 2023년 1월
평점 :
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그의 책 <나와 너>에서 나-그것에 관계를 나-너의 관계로 변화시킬 것을 역설한다. ‘너’에 대한 것은 인격적인 대화적 관계이고, ‘그것’에 대한 것은 비인격적인 비대화적 관계다. 대화적 관계는 인격의 관계로서 그리고 주체와 주체의 관계로서 직접적이나, 비대화적 관계는 경험과 이용을 뜻하는 주-객의 이해관계, 소유관계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과학문명과 제도화된 사회체제는 인간 특유의 자유, 개성, 창조력 그리고 인권 등을 마비시킴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있다. 규격화, 기계화, 기능화, 조직화, 관료화, 집단화, 비인간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부버는 허허벌판에서 천막을 칠 네 개의 기둥조차도 없는 ‘집 없음’에 대한 이유가 관계의 나-그것에 있다고 보고 집에서 사는 것처럼 세계 속에 살 수 있는 나-너의 관계로 관계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현대문명에 대한 치유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마음을 걷다>에는 인터뷰이와 나-너로 만난 필자의 생생한 육성이 담겨 있다. 인터뷰이들 또한 정신장애 당사자들과의 만남에 있어 나-너의 관계성을 잊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강제의 반대는 자유가 아니다. 강제의 반대는 소통이다. 자유란 소통의 가능성이다. 소통을 위해 인간은 자유롭고 자주적이며 독립적이어야 하는데, 소통의 전제가 되는 자유는 현실화를 시작할 수조차 없는 잠재 상태에 불과하다. 텅 빈 자유에 어떤 내용을 주고, 진동하고 선회하는 자유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힘이 필요하다. <마음의 걷다>에는 21명의 인터뷰이들이 전하는 자유의 울림이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울림을 끌어내는 필자의 힘 있는 질문들이 이정표처럼 세워져 있다. 이들의 말하기의 전제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관계와 관계의 ‘사이’에서 실존하며 대화하는 진정한 ‘만남’의 순간들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1. 프로파간다와 다른 말하기
프로파간다는 자신의 정신적 행위가 정말로 독특하다는 식으로 타자에게 자기의 의견과 태도를 강요한다. 반면 다른 말하기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정당하다고 인식한 것을 타자의 영혼 속에서 발견하고 촉진한다. 그것이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개방될 필요가 있는 하나의 잠재력으로서 그리고 여러 가능성들 중의 하나의 가능성으로 타자 속에 살아 움직인다. 이때의 개방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며, 방향을 발견한 자와 방향을 찾고 있는 자 간의 실존적 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2. 정신장애 당사자에 대한 창조적 태도
당사자를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성을 지닌 하나의 현실로 본다. 이들의 돌봄 속에서 당사자들은 삶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과정 속에 자기 자신을 참여시키기를 갈망하고 또한 그 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주체가 되는 변화를 겪는다. 자신의 주장만이 옳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주장은 당사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 중의 하나라는 겸손한 자세, 그럼에도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유일한 실존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현실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진다.
3. 자신의 전존재로 획득된 앎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대화를 나눈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의 ‘나’는 인간의 상호성을 형성하는 ‘나’, 주관이 아닌 주체성의 ‘나’이다. 남녀의 사랑이야말로 아마도 ‘나와 너’의 전형이자 인간-인간의 영역을 가장 잘 보여줄 것이다. 사랑이란 상대에게 갖는 특별한 관심과 느낌을 말한다. 3인칭이었던 ‘그’나‘ 그녀’가 ‘너’로 와서 머무는 상태를 말한다. 사랑은 유일하다. 즉 너밖에 없다는 유일성과 친숙성이 있어야 사랑이다. 사랑은 ‘너와 나’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종속성이 아니다. 사랑은 전체적이다. 이러한 사랑 속에서 당사자는 세계를 신뢰하게 된다.
4. 끊임없이 대화하는 열린 자세
현대인들은 틀에 박힌 반응을 함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인격적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격적 책임을 벗어난 삶은 무의미하다. 인격적 책임을 지는 삶은 지나치게 ‘나’가 강조되고 있는 개인주의와 ‘너’를 ‘그것’으로 예속화시키는 집단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정한 ‘나’와 ‘너’를 발견하여 준다. 누군가를 ‘너’로 부를 수 있는 것과 응답할 수 있는 ‘나’를 되찾는 것은 대화적인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는 세계 속에서 그/녀에게 독특한 과업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5. 인간과 함께하는 인간
인간은 관계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인간의 목표는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을 느끼고 말을 건네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세계를 자각하는 것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개인이 직면하고 있는 독특한 상황에서의 개인에 대한 본래적 응답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 된다. 따라야 할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존재론적 수행인 것이다.
6. 상호성을 실현하는 참여
인간 상호간의 의미는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어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그 자신의 인격적 존재 속으로 타인-그 자신을 드러내 줌으로써 공유의식을 갖는 인간-이 참여함을 허락하는 것이다. 한 가지 우화를 예로 들자면, 여우와 늑대가 같은 방향으로 걷다 앞서 걷는 늑대가 밝은 곳을 기다려 여우의 모습을 보고자 고개를 돌린다. 늑대가 ‘너는 내 뒷모습을 보며 걷지만 나는 너의 얼굴을 봤다’고 자랑스레 이야기 한다. 그러자 여우는 ‘나도 방금 전에 네 얼굴을 봤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려면 먼저 자신의 얼굴을 보여 줘야 한다구!’라고 응대한다.
7. 위기를 새로운 시작으로 변화시키는 가능성
위기는 원래 결단과 판단을 의미한다. 위기의 어원을 보면 분리, 결정, 평가, 판단, 정화 등을 가리킨다. 위기란 항상 가장 진지한 자세로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서, 그것은 궁극적 가치의 실현 또는 궁극적 가치에의 저항과 관계된다. 그것은 퇴보, 몰락, 죽음의 가능성을 내포하거나 아니면 구원, 치유,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반전이란 어떤 있을 수 있는 어떤 부정적인 낙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전 상황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들, 상황의 변혁을 의미한다.
정치철학자 양승태는 당사자들이 자각하지 못한 채 우연이나 초월적인 운명의 노리개 역할을 하는 인간적 삶의 실존에 대한 ‘사회적 말하기’가 정치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말하기는 물론 상대방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하지만 그 사회성 자체가 인지되어 직접 ‘말하기’라는 말 속에 투영되고, 그 결과 ‘말하기’를 나타내는 다른 비슷한 언어와 구분하여 새로운 언어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사회적 말하기이다. <마음을 걷다>는 정신장애에 관한 최초의 ‘사회적 말하기’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객체화된 나-그것에 대한 말하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1명의 인터뷰이들에 대한 저자의 지극한 나-너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질문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독자분들에게 바라기는 이 글에서 ‘정보’만을 취하려는 생각에 거리를 두고 무엇이 소통되고 있는지를 감지하는 ‘기쁨’을 얻었으면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승태가 말하는 사회적 말하기의 양식인 ‘말투’를 감지해 내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신장애인의, 정신장애인에 대한 말걸기가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활동적 지식’이 되어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있는지를 가슴으로 느껴보았으면 한다. 세계 속에서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하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그 ‘장소’를 찾게 해 줄지 사뭇 기대가 크다.
랍비 라파엘이 여행을 떠나기 전, 수레의 옆자리에 앉은 제자와 얘기가 오고 갔다. “제가 자리를 좁게 하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제자가 말하자, 랍비는 “그러니 우리가 서로 좀 더 사랑하자. 그러면 우리 둘이 앉고도 남을 충분한 여유가 생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 이 글은 강선보 <마르틴 부버 만남의 교육철학>과 박홍규 <마르틴 부버>, 양승태 <대화, 아이러니, 시민적 삶, 그리고 정치철학의 태동> 를 바탕으로 해서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