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슬픔
박종언 지음 / 파이돈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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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해 내가 존재한다는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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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슬픔
박종언 지음 / 파이돈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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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덕분에 강이 빛나는 모습을 보았어요. 저의 발이 닿을 듯한 거리에 깊고 푸른 강물은 흘러가고 있더군요. 그처럼 가까이 흐를 수 있는 몸을 가졌다는 환한 시야와 강물의 말없는 침묵이 설핏 어지럽기도 했던가요. 때로 물은 사람을 집어삼키기도 한다는, 그 뼈아픈 슬픔이 다시 되새겨졌습니다. 사람의 슬픔에 동요하지 않는 자연의 깊은 침묵. 그 모두가 저 반짝임 속에 있었어요. 살아가면서 슬픈 것은 그렇게 눈을 시리게도 한다는 금언만이 조용한 강물 위로 흩어졌습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이르게 꽃잎을 틔운 풀더미를 보았어요. 분홍빚의 꽃잎. 마치 지금까지의 시간동안 받았던 사랑을 증거하듯 낮은 곳에서 가장 이른 꽃이 피었습니다. 자연도 사랑을 힘을 빌어 성장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분홍빛. 그 연분홍의 여린 꽃잎에 눈을 맞추고만 싶었지요. 낮은 시야에서 발원하는 높이로,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서요. 꽃의 웃음을 보아주지 못한 오랜 회한을 담아서 말이에요




부모님 댁에 가는 길에 좋아하는 빵집에 들렀어요. 분홍빛 꽃들이 참 소담하게 피어서 보내 드려요. 고소한 빵 부푸는 냄새와 알 듯 모를 듯 피어서 주변으로 꽃등을 켠 분홍빛이 잘 어울려서요. 우리 어울려 만나는 시간에도 서로가 빵집이, 빵을 굽는 사람이, 꽃을 심는 사람이, 그 꽃 틔웠을 때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 모두 포근하게 어울려 있었으면 좋겠어요. 편안한 여백과 함께요




아침 햇빛이 호수처럼 아늑하게 고인 모습이 좋아 사진에 담았습니다. 환하게 스민 빛의 호수. 당신 마음 속에도 꼭 그런 것만 같은 곳 있으실 것 같습니다. 가만히 몸을 담그고 머리를 뉘이면 조용하게 평화로운 그런 장소가요. 모든 소음과 먼지 사이에 기적처럼 남아 있는, 어머니 같은, 눈물 나는 고향. 과거는 빨리 지나가 버리는데 여름 햇빛이 뜨겁지도 않은지 풀들은 아직 연한 연둣빛입니다. 뜨거워진 이마에 땀 닦으며 오래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걸었을 것만 같은 어리고 귀한 침묵. 아침은 새소리로 고요하고 연둣빛으로 불어넣고 있습니다. 후아, 후아, 삶을 되살리는 깊은 평화를, 당신의 마음 속에 강물처럼 적시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밤새 비 내리고 조용해진 공원에 꽃들이 피어 있었어요.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는 아픔이 있었어요. 한 시절 꽃으로 피는,

 



공원에 새로 심긴 노란 꽃. 아침 햇빛과 함께 먼저 달려와 있는 작지만 뜨거운 빛처럼 세상을 꿰뚫는 정다운 꽃. 꽃으로 인해 저 역시 노랗게 물들어 길 하나를 낼 듯합니다. 허공 중으로만 채워지는 침묵의 깊은 무게가 이처럼 가볍게 피어 있네요. 열오른 이마로 뱉는 섬어처럼, 아프게 뼈아프게




 

당신, 아침 풍경이에요. 이제 막 시작되려는 하루에 깊은 명상의 빛. 이처럼 빛나는 시작을 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아침볕은 가장 볼품 없는 존재조차 환하게 아름답게 해서요. 가까이 보면 상한 꽃잎들을 찍었어요. 보세요. 꽃잎들이 피어나는 모습을요. 당신에게 이 하루가, 모든 하루의 시작이 이 환한 백지 속에 그려지는 생의 박동이길 기도해요



 

공원을 산책할 때마다 마음을 담아 보게 되는 꽃이에요. 같은 보랏빛 꽃을 매달고도 위치에 따라 꽃의 모습은 얼마나 다른지. 그 미묘하게 변하는 모습을 알아보는 것이 우리가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사람이 누구나 아름다운 존재라면 그 미약한 기척을 알아보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일 거라 생각도 했어요. 사랑하고 기록할 것. 당신, 아직도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당신 마음에 새겨지고 있는 흔들리는 꽃의 문양도 그럴 거에요. 언젠가 그 마음으로 세상의 꽃들을 볼 거에요




풀빛이 참 고와서요. 그게 촛불처럼 밝힌 보랏빛 꽃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저 연한 빛처럼 빛깔을 간직할 것이라는 믿음. 당신 곁으로 번진 풀빛도 참 고와요. 당신이 바라고 꿈꿨던 날이 이렇듯 곱게 물드는 6월의 새벽. 곁에서 저도 오래 들여다 보았어요. 몸 속으로 보랏빛 등을 켜는 법을 알게 되었어요. 가만히 밝혀지는 나의 빛깔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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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 광기와 인정에 대한 철학적 탐구
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 지음, 송승연.유기훈 옮김 / 오월의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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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이 되고자 하며 무엇일 수 있을까

 

미쳤다는 것이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라는 논쟁적인 표제는 사실 많은 내용을 함축한 질문이다. 이전까지 미쳤다는 것은 정신병원과 같은 수용시설에 갇히거나 설사 지역 사회에서 살게 되더라도 원자와 같이 뿔뿔이 흩어져 어떤 집단적 정체성도 가질 수 없는 부정적 고립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낙인은 공고해서 미쳤다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사회관계 바깥으로 쫓겨나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저자는 질문한다. 미친 것을 정체성의 계기로 삼아보자고. 그러면 미친 이들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도래하는 것일까?

 

저자는 매드 운동과 정체성의 인정을 연관 짓는다. 치료나 서비스 개선에 초점을 두는 의료나 복지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발적인 당사자 운동의 입장에서 미쳤다는 것이 갖는 의미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성소수자 운동이 퀴어라는 정체성을 통해 결집하고 사회적·문화적 인정을 얻어냈듯이 아직 뒤처져 있는 매드 운동도 미쳤다는 것을 경유하여 긴 역사동안 배제되고 주변화 되었던 미쳤다는 것에 포함되는 이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갖는 성원권을 얻어내고 미쳤다는 것특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 보자는 것이다.

 

미쳤다는 것을 설명하는 단어는 많다. 저자는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살핀다.

 

먼저 소비자/이용자정체성이 있다. 이것은 시장을 기반으로 의료 서비스 제공이 전화되는 과정에서 당사자가 해당 서비스의 소비자로 받아들여지는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정체성은 선별적 포섭으로 인한 위기라는 다시 말해 예산을 주는 정부 기관에서 받아들일 정도만큼의 주장만을 할 뿐 개혁을 위한 급진적인 주장에 미온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당사자와 전문가가 동등한 관계를 맺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켜 실제 현실적인 권력의 불평등을 가리기도 한다.

 

여기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 생존자정체성이다. 이것은 폭력적인 정신의료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은 당사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남은 이들은 사회나 정신의료 시스템이 무시하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낙인을 부여했던 정신적 고난과 치료의 경험은 생존자 담론 안에서 가치 있고, 더 우월한 지적 기반으로 인정된다. 자신의 경험에 관한 전문가이며, 정신의료 기관에서의 치료가 어떤 의미인지, 사회의 낙인과 차별에 직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존자의 이야기는 가치있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생존자 담론에서 미쳤다는 것이 긍지와 자부심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광기가 주는 고통과 경험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드 프라이드 운동은 큰 의미를 갖는다. ‘정신적으로 아픈존재로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희생자의 지위를 버리고, 드디어 사회의 완전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광기의 경험과 그것을 둘러싼 언어들을 되찾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매드 프라이드 운동은 사회가 광기를 독특한 정체성 및 문화로서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기를 바라며 당사자들을 창조적이고 영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주체로 본다. 정신의학을 개선하거나 그 강제성에 맞서기보다 광기와 정상성이 인식되는 방식에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일으키는 목표를 가지고 관점을 재구성해 나간다.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는 하나의 문제는 그동안 미쳤다는 것을 의료화 시키고 시설화 시켰던 권력과의 대면이다. 질병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질병은 구성된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질병의 범주는 권력과 지식과 주체화 양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권력은 어떤 지배계급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하고, 이러한 정체성을 우리 모두가 참된 방식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권력은 인간 자체를 지식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과학을 토대로 환자와 건강한 사람, 시민과 범죄자, 그리고 정상과 변태성욕자를 구분하는 과학적 기준을 제시한다. 개인은 권력이 제시하는 합리적 기준에 복종함으로써 사고, 행동, 정체성에 있어자기 반성적인 주체가 된다. 권력은 생산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미쳤다는 것에 진단을 내리는 의료행위와 기준이 되는 규범과 주체화 양식은 그 자체로 권력의 실천일 뿐임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덧붙여 우리가 저항을 구성하고자 할 때 우리는 무() 즉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정체성을 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말한 권력과 지식과 주체화의 양식에 포섭되어 자신도 모르게 억압을 생산하고 실천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정체성과 규범의 억압을 인식하고 그에 대항할 수 있을 때 미쳤다는 것은 잠재적인 가능성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평등해지기까지

 

의료 권력은 많은 정신장애인의 삶을 규제하고 있고 그것은 국가와 결합하여 치안의 논리로 정신장애인의 삶을 제한된 영역 안에 가두어 놓고 있다. 착한 환자 역할로는 결코 정신장애인 대부분이 겪고 있는 사회적 장애의 영역을 구조화 시키는 시야를 확보할 수 없다. 흔히 정신과 환자들에게는 병식이 치료의 중요한 표지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진정한 병식이란 정신장애인이 처한 불평등과 부조리한 현실을 바로 보고 맞서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곳에서 미쳤다는 것이 정체성이 될 수 있는가능성이 열리는 것은 아닐지. 저자의 이해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매드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중에 정체성의 여러 갈래를 탐구하면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체성과 실패한 정체성을 구분 짓는 저자의 입장이다. 기존의 정체성의 한계를 확장하거나 새로운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정체성만을 광기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몫이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들리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치안의 영역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눈다. 어떤 말은 진지한 담론으로 어떤 말은 소음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말하고 볼 수 있는 자리를,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자리를 배정한다. 여기서 능력주의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고 그것은 조화로운 질서로 포장된다. 하지만 해방의 정치에서는 몫이 없는 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기존의 지배의 질서를 거부하면서 평등의 정치를 요구한다. 이때 정치란 아무나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평등의 전제를 놓치지 않는다.

 

이들과 함께 우리는 불평등을 인정하고 이를 무한히 축소하는 방식이 아니라 반대로 평등을 현실에서 끊임없이 입증하고 실현해 나가는 방식으로 평등과 해방의 길을 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우리가 권리를 얻는 방법

 

이에 덧붙여서 말해 보자. ‘권리를 가질 권리가 있다. 정치적 지위를 상실하기 쉬운 정신장애인과 같은 소수자들은 자신의 벌거벗은 권리, 즉 자신이 향유할 수 없는 인권을 경험한다. 그것은 회복할 수 없는 고향의 상실이다. 이들에게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근본적 권리로 인권을 상정하고, 그 인권의 실질적인 실행 및 향유 공간으로 정치적 공론장과 법적 형식의 공간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평등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우리가 평등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정의의 원칙을 지향하는 사회라면 평등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평등은 정치공동체의 밖에서 인식되거나 누릴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평등한 권리를 행사하려는 의지와 그 의지를 지속적으로 공동의 세계 속에서 관철하려는 정치 행위를 통해서만 확보하고 누릴 수 있다. 정신장애인에게 저마다의 개성이란 이 세상에 단 하나이고 유일무이하며 변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무한한 긍정일 뿐 아니라, 공통의 권리를 평등하게 공유하고 있는 한에서만 비로소 질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우리가 권리를 나누는 방법

 

근대사회는 가정을 의미하던 사적 경제 활동이 대중의 유일한 관심사가 된 사회이다. 그것이 사회적 영역으로 부각되면서,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에만 매몰된 순응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정치 영역을 되살리고 행위가 소통, 연대, 협력을 무한히 창출하는 특이성들이 연결되는 공간을 그려볼 수 있다. 경제 지상주의에 빠진 정치 문화를 벗어나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의 사유하고, 대화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과정은, 우리가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나눌 때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해 있다. 공론장이 사라진다면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기존의 분배는 재화를 어떻게 평등하게 분배할 것인가라는 목적에만 집중한다. 그러면서 정작 정의를 실행하는 과정에 대한 논의는 망각한다. 이러한 분배는 비역사적이고 움직이지 않는 사회를 전제하고 사회정의를 부와 소득의 분배 문제로 축소한다. 그러나 정의는 구조를 누락한 분배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분배를 낳는 사회구조와 사회과정에 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작금의 부정의 문제는 부의 재분배만이 아니라 의사결정 과정, 미디어 영향력, 가치 부여와 같은 제도적 맥락으로 인해 일어나고 있다. 정신장애인 뿐만 아니라 성, 인종, 취향 등을 해석하는 지배적 견해는 표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열등하거나 비정상적인 존재로 규정한다. 이는 소수자들의 사회적 지위에 커다란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물질적 재화의 분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매드 운동이 필요한 이유이다.

 

여기서 사람들을 재화의 소유자 및 소비자로 보는 분배 패러다임의 정의 담론을 해체하고, 행동과 행동의 결정을 포함하고, 나아가 역량을 계발하고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수단들의 제공까지 포함하는 보다 넓은 맥락에서 역량 증진의 필요성이 나온다. 즉 개인 역량과 공동의 의사소통과 협력의 발전과 행사에 필요한 제도적 조건들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병리적 사회 극복을 위한 인정투쟁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는가라는 표제는 많은 정신장애인이 자신을 환자가 아니라 공유된 정체성을 나눠 가진 사회적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구조적인 인식의 시초가 되는 질문이기에 중요하다. 즉 이 질문에 내포된 의미는 사회는 정체성의 상호인정을 통한 공존 관계에 기초하고 있으며, 사회적 관계는 이 공존 관계가 점차 고도화되면서 형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쉽게 얘기해 보자. 주격의 와 목적격의 가 있다고 해 보자.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은 목적어로 를 지목하고 있으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나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듯 목적격 는 자아가 현실적 형태를 부여하려는 사회적 경향이다. 이에 반해 주격 란 목적격 에 반대하는 또다른 나의 차원을 말한다. 주격 는 이런 식으로도 저런 식으로도 현실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가 긍정적일 때 해당 개인은 안정된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되고, 반발하는 경우에 정체성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반면 주격 의 반발을 대안적 자아상으로 구체화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사회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록 개인은 현존 사회와 갈등하지만 안정된 자아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으며, 오히려 이러한 갈등은 사회적 가치관을 확장시키는 매개체가 된다.

 

인정 투쟁, 진리 게임식 인정 질서를 넘어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혹은 무시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왜곡되고 자신의 정체성이 손상되는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타자(타집단)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행위는 그(그 집단)의 긍정적 자기이해를 방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시의 상처는 그(그 집단)의 정체성을 인정할 때 극복될 수 있다고 간주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정체성 모델이다.

 

그러나 여기서 정체성 모델이 진정한 것으로 간주되면 될수록, 구성원들은 집단 정체성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 이 모델은 문화적 동일시의 정치를 뒤흔드는 투쟁, 문화 정체성을 대표하는 권력 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투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내부의 차이와 변화를 고려하지 못하는 정체성 모델은 분리주의나 고립화를 면하지 못할 수 있다.

 

또한 이 방향의 정치는 어떻게 그러한 집단 분화가 일어나는지 나아가 어떻게 집단 분화가 더 이상 차별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어떻게 나타난 분화에 따른 차등을 사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에 더 많이 몰두한다.

 

정체성 정치의 한계이다.

 

만약 우리 문화가 정신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가치 평가한다면, 그것은 개별 당사자를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할 수 없도록 방해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낼 수 없고, 사회의 냉담한 시선에 종속적인 위상을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정투쟁은 기존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개별 당사자의 위상을 회복시켜 온전하게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 책의 말미에 있는 매드 서사는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질병과 병리를 넘어 광기의 사회적 의미를 다양화함으로써, 일반적이지 않은 경험, 심리적·행동적 측면의 여러 차이들을 좀 더 폭넓게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매드 프라이드는 우리의 개인적·집단적 강점을 포함하는 매드 정체성, 매드 공동체, 매드 문화를 기념한다. 또한 매드 프라이드는 정신의학의 역사와 광기의 경험 속에서 우리가 느끼도록 강요받은 수치심과 맞서고, 정신의료제도와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억압에 저항한다. 매드 프라이드는 우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에게 광인인 우리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될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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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걷다 -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
박종언 지음 / 파이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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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실천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말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책을 통해 알았다. 마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폭력적 구조와 낙인에 연대로서 우리가 어떻게 맞서 나갈 수 있는지를 서늘한 감성으로 알려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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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걷다 -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
박종언 지음 / 파이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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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마르틴 부버는 그의 책 <나와 너>에서 나-그것에 관계를 나-너의 관계로 변화시킬 것을 역설한다. ‘에 대한 것은 인격적인 대화적 관계이고, ‘그것에 대한 것은 비인격적인 비대화적 관계다. 대화적 관계는 인격의 관계로서 그리고 주체와 주체의 관계로서 직접적이나, 비대화적 관계는 경험과 이용을 뜻하는 주-객의 이해관계, 소유관계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과학문명과 제도화된 사회체제는 인간 특유의 자유, 개성, 창조력 그리고 인권 등을 마비시킴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있다. 규격화, 기계화, 기능화, 조직화, 관료화, 집단화, 비인간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부버는 허허벌판에서 천막을 칠 네 개의 기둥조차도 없는 집 없음에 대한 이유가 관계의 나-그것에 있다고 보고 집에서 사는 것처럼 세계 속에 살 수 있는 나-너의 관계로 관계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현대문명에 대한 치유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마음을 걷다>에는 인터뷰이와 나-너로 만난 필자의 생생한 육성이 담겨 있다. 인터뷰이들 또한 정신장애 당사자들과의 만남에 있어 나-너의 관계성을 잊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강제의 반대는 자유가 아니다. 강제의 반대는 소통이다. 자유란 소통의 가능성이다. 소통을 위해 인간은 자유롭고 자주적이며 독립적이어야 하는데, 소통의 전제가 되는 자유는 현실화를 시작할 수조차 없는 잠재 상태에 불과하다. 텅 빈 자유에 어떤 내용을 주고, 진동하고 선회하는 자유에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힘이 필요하다. <마음의 걷다>에는 21명의 인터뷰이들이 전하는 자유의 울림이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울림을 끌어내는 필자의 힘 있는 질문들이 이정표처럼 세워져 있다. 이들의 말하기의 전제를 따라가 보면 우리는 관계와 관계의 사이에서 실존하며 대화하는 진정한 만남의 순간들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1. 프로파간다와 다른 말하기

프로파간다는 자신의 정신적 행위가 정말로 독특하다는 식으로 타자에게 자기의 의견과 태도를 강요한다. 반면 다른 말하기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정당하다고 인식한 것을 타자의 영혼 속에서 발견하고 촉진한다. 그것이 정당한 것이기 때문에 개방될 필요가 있는 하나의 잠재력으로서 그리고 여러 가능성들 중의 하나의 가능성으로 타자 속에 살아 움직인다. 이때의 개방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며, 방향을 발견한 자와 방향을 찾고 있는 자 간의 실존적 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2. 정신장애 당사자에 대한 창조적 태도

당사자를 무한한 가능성과 창조성을 지닌 하나의 현실로 본다. 이들의 돌봄 속에서 당사자들은 삶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과정 속에 자기 자신을 참여시키기를 갈망하고 또한 그 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주체가 되는 변화를 겪는다. 자신의 주장만이 옳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주장은 당사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 중의 하나라는 겸손한 자세, 그럼에도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유일한 실존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현실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진다.

 

3. 자신의 전존재로 획득된 앎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대화를 나눈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의 는 인간의 상호성을 형성하는 ’, 주관이 아닌 주체성의 이다. 남녀의 사랑이야말로 아마도 나와 너의 전형이자 인간-인간의 영역을 가장 잘 보여줄 것이다. 사랑이란 상대에게 갖는 특별한 관심과 느낌을 말한다. 3인칭이었던 그녀로 와서 머무는 상태를 말한다. 사랑은 유일하다. 즉 너밖에 없다는 유일성과 친숙성이 있어야 사랑이다. 사랑은 너와 나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는 종속성이 아니다. 사랑은 전체적이다. 이러한 사랑 속에서 당사자는 세계를 신뢰하게 된다.

 

4. 끊임없이 대화하는 열린 자세

현대인들은 틀에 박힌 반응을 함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인격적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격적 책임을 벗어난 삶은 무의미하다. 인격적 책임을 지는 삶은 지나치게 가 강조되고 있는 개인주의와 그것으로 예속화시키는 집단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정한 를 발견하여 준다. 누군가를 로 부를 수 있는 것과 응답할 수 있는 를 되찾는 것은 대화적인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는 세계 속에서 그/녀에게 독특한 과업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5. 인간과 함께하는 인간

인간은 관계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인간의 목표는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을 느끼고 말을 건네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세계를 자각하는 것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개인이 직면하고 있는 독특한 상황에서의 개인에 대한 본래적 응답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 된다. 따라야 할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존재론적 수행인 것이다.

 

6. 상호성을 실현하는 참여

인간 상호간의 의미는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어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그 자신의 인격적 존재 속으로 타인-그 자신을 드러내 줌으로써 공유의식을 갖는 인간-이 참여함을 허락하는 것이다. 한 가지 우화를 예로 들자면, 여우와 늑대가 같은 방향으로 걷다 앞서 걷는 늑대가 밝은 곳을 기다려 여우의 모습을 보고자 고개를 돌린다. 늑대가 너는 내 뒷모습을 보며 걷지만 나는 너의 얼굴을 봤다고 자랑스레 이야기 한다. 그러자 여우는 나도 방금 전에 네 얼굴을 봤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려면 먼저 자신의 얼굴을 보여 줘야 한다구!’라고 응대한다.

 

7. 위기를 새로운 시작으로 변화시키는 가능성

위기는 원래 결단과 판단을 의미한다. 위기의 어원을 보면 분리, 결정, 평가, 판단, 정화 등을 가리킨다. 위기란 항상 가장 진지한 자세로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서, 그것은 궁극적 가치의 실현 또는 궁극적 가치에의 저항과 관계된다. 그것은 퇴보, 몰락, 죽음의 가능성을 내포하거나 아니면 구원, 치유,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반전이란 어떤 있을 수 있는 어떤 부정적인 낙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이전 상황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들, 상황의 변혁을 의미한다.

 

정치철학자 양승태는 당사자들이 자각하지 못한 채 우연이나 초월적인 운명의 노리개 역할을 하는 인간적 삶의 실존에 대한 사회적 말하기가 정치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말하기는 물론 상대방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하지만 그 사회성 자체가 인지되어 직접 말하기라는 말 속에 투영되고, 그 결과 말하기를 나타내는 다른 비슷한 언어와 구분하여 새로운 언어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사회적 말하기이다. <마음을 걷다>는 정신장애에 관한 최초의 사회적 말하기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객체화된 나-그것에 대한 말하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1명의 인터뷰이들에 대한 저자의 지극한 나-너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질문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독자분들에게 바라기는 이 글에서 정보만을 취하려는 생각에 거리를 두고 무엇이 소통되고 있는지를 감지하는 기쁨을 얻었으면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승태가 말하는 사회적 말하기의 양식인 말투를 감지해 내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신장애인의, 정신장애인에 대한 말걸기가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활동적 지식이 되어 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있는지를 가슴으로 느껴보았으면 한다. 세계 속에서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지 못하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그 장소를 찾게 해 줄지 사뭇 기대가 크다.

 

랍비 라파엘이 여행을 떠나기 전, 수레의 옆자리에 앉은 제자와 얘기가 오고 갔다. “제가 자리를 좁게 하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제자가 말하자, 랍비는 그러니 우리가 서로 좀 더 사랑하자. 그러면 우리 둘이 앉고도 남을 충분한 여유가 생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 이 글은 강선보 <마르틴 부버 만남의 교육철학>과 박홍규 <마르틴 부버>, 양승태 <대화, 아이러니, 시민적 삶, 그리고 정치철학의 태동> 를 바탕으로 해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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